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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현장의 크고 작은 안전사고 중 가장 일상적이고 잦은 것은 무엇일까?

직군별로, 현장별로 조금씩 다르겠지만 많은 스태프들이 한 번씩은 겪어본 것은 '넘어짐'이다. 2019년 안건보건공단 '방송 영화 제작 현장 실태조사'에서 가장 많은 재해의 형태가 '추락'이었고 두 번째가 '넘어짐'이었다.

또한 2019년 영화산업노동조합이 실시한 '영화스태프 안전보건실태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고 유형 또한 넘어짐이었으며, 2020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진행한 '방송현장 노동안전실태조사'에서도 넘어짐에 대한 증언이 많았다. 넘어짐은 언뜻 경미한 일로 생각될 수도 있는데, 드라마 현장의 노동환경과 분위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유형이기도 하다.

대본 앞에 '안전사고 가이드라인' 붙어있지만
 
드라마 현장에서는 카메라, 조명, 소품 설치 등을 위해 안전장비 하나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이 많다.
 드라마 현장에서는 카메라, 조명, 소품 설치 등을 위해 안전장비 하나 없이 높은 곳에 올라가는 일이 많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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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시간에 쫓기고, 모두가 긴장한 채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곳. 하지만 밤샘과 장시간 노동으로 지쳐 있는 곳. 조금의 실수도 용납되지 않아 고성과 욕설이 끊이지 않는 곳. 윽박지르지 않으면 안 굴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 바로 드라마 촬영 현장이다. 촬영장 바닥에는 전선 목재 합판이 널브러져 있어 걸려 넘어지기 쉽고, 카메라 조명 음향 등 고가 장비들이 즐비한데 그것들은 사람보다 더 비싸고 중요해서 넘어지더라도 내 몸보다 먼저 지켜야 한다.

넘어져서 차라리 눈에 보이는 상처가 있으면 병원에라도 가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시 벌떡 일어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맡은 일을 해야 하고 촬영을 이어간다. 넘어진 탓은 조심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고, 위험을 피하는 일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사고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현장의 구조와 시스템에 대해서는 제작사도, 방송사도 고민하지 않는다. 노동자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다가, 용기를 내어 문제제기를 하면 잘리고, 그러다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방송현장을 완전히 떠나기도 한다.

제작사, 방송사가 전혀 고민하지 않는다고 하면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아주 소수이지만 몇몇 드라마 현장에서는 사전 예방 교육을 하고, 안전 수칙을 만들어 지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이젠 대부분의 드라마 대본 앞에 '안전사고 예방관련 가이드라인'이 붙어 있기도 하다.

하지만 가이드라인의 내용을 보면 제작사가 해야 할 일을 개인에게 떠 넘기고 있거나, 실제 노동자들이 현재의 시스템 안에서 할 수 없는 일들이거나, 안전예방이라기보다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항들이 대부분이다.

"촬영 시작 전 스탭 및 출연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건강에 이상이 있을 경우 이를 즉시 알리고 휴식을 취하도록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드라마 촬영현장에서 몸이 아프다고 쉬겠다고 하면 바로 집에 가라고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당으로 급여가 책정되는 드라마 스태프들은 그날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된다.

"촬영장 및 주변의 위험 요인 발견 시 연출 프로듀서에게 즉각 통보한다." "고소작업 시에는 항상 2인1조로 안전을 확보한 후 작업을 진행한다." 이 조항 또한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위험 요인 발견 시 연출 프로듀서에서 즉각 통보할 수 있는 스태프들이 얼마나 될까? 무섭고 걱정되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이 드라마 현장이다. 위험 요인을 제거하고, 고소작업 시 항상 2인 1인조로 진행하도록 할 의무는 스태프가 아니라 제작사와 방송사에게 있다.

산재보상은커녕 치료조차 제대로 못 받는다

"촬영에 필요하다며 진짜 황산을 가져오라고 지시했어요. 아무런 안전 장비 없이요." (소품팀)

"동작대교 위에서 위험한 장면을 촬영할 때였어요. 안전고리를 하나씩 밖에 안 줘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싶어 무서웠어요." (촬영팀)

"한 겨울에 강물에 빠지는 씬을 찍는데 10살도 안된 아역배우를 빙판 아래 얼음 물 속에 넣었다 뺐다 반복했어요. 아이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있는 게 괴로웠어요." (그립팀)

"렉카차 위에 올라 차량씬을 촬영하는데 속도감이 나야 한다며 감독이 시속 50km로 달려야 한다고 마구 우겼어요. 위험하다고 했는데도 전혀 듣지 않았어요." (조명팀)


2020년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진행한 '방송현장 노동안전실태조사'에서 드라마 현장의 노동자들이 들려준 이야기다. 작업 중지권은커녕 위험하다고 말하기도 어렵고, 말한다해도 통하지 않는 현장에서 다치거나 질병에 걸려도 개인이 모든 걸 감당해야 한다.

그나마 제작사나 방송사가 상해보험을 들어두어서 입원비, 치료비를 일부 지원받는 경우를 제외하고 대부분은 자기가 비용을 감당한다. 산재보상은커녕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다시 일하러 나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여러 가지 한계 속에서도 현장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난 드라마 조연출은 스태프들에게 "빨리빨리"라는 말 대신 "천천히"해도 된다고, 서두르지 말고 조심히 움직이라고, 그게 촬영에 도움이 되는 거라고 말하고 있다고 했다.

그럴 때면 옆에 있는 선배나 감독에게 욕을 먹기도 한다. 또한 촬영전에 대본 앞 안전보건 가이드라인을 다 같이 크게 읽고 촬영을 시작한다고 했다. 많은 한계가 있고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현장 분위기 자체가 조금은 달라지지 않겠냐고 했다.

시청자들도 함께 해주셔야 진전이 가능하다 
 
드라마 현장의 디졸브 노동은 오늘도 이어진다. 꿈을 찾아 온 현장이 좋아서 오래 일하고 싶지만, 매일 번아웃 되는 일상에서 가능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드라마 현장의 디졸브 노동은 오늘도 이어진다. 꿈을 찾아 온 현장이 좋아서 오래 일하고 싶지만, 매일 번아웃 되는 일상에서 가능할지 알 수 없어 불안하다.
ⓒ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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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가 설립된지 4년이 되어간다. 이한빛 피디가 방송현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의 문제를 제기하며 세상을 떠난지 5년이 되었고, 얼마전에는 5주기 추모제를 치렀다. 그동안 방송현장은 달라진 것보다 달라지지 않은 것이 더 많고, 가끔은 더 나빠지고 있는 게 아닌가 두려울 때도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조연출처럼 힘들지만 현장에서 고군분투하는 노동자들을 만나고, 조금은 변하고 있다고, 더디지만 변할 거라도 말해주는 분들이 있어 힘을 내고 있다.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방송작가유니온처럼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힘을 모으고 변화를 위해 싸우는 노동자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 하는 여러 단체의 활동가들이 많이 있다.

하지만 뜻있는 개인이나 단체들의 의지와 열정만으로 방송현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법과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 방송산업자체의 자각, 방송사와 제작사의 책임강화 등 구조적인 변화가 동반되어야 한다. 현행 산업안전보건법은 드라마 촬영장처럼 몇 개월씩 바뀌는 프로젝트 현장에 효과적으로 적용되기 어렵다. 또한 건강검진, 근골격계유해요인조사, 작업환경측정 등 정기적으로 이행되어야 할 법적 의무는 드라마 제작이라는 단기적 목표를 중심으로 한 드라마 산업에서 제대로 이행되기 쉽지 않다.

2018년 근로기준법 개정으로 무제한 노동을 가능하게 했던 특례업종에서 방송업이 빠지고, 52시간 상한제가 실시되면 노동시간이 줄어들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하지만 행정적, 법적으로 드라마 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이 인정되었음에도 현장은 그대로다. 4년 전에 "잠을 안 재워요", "연속 20시간 넘게 촬영중이에요. 살려주세요." 이런 제보 전화를 받았다면, 지금은 제보 전화의 노동시간이 16~18시간 정도로 줄어든 정도랄까.

법의 허점을 핑계로 끄덕도 하지 않는 방송사, 제작사가 사용자 책임을 다 하도록 압박하고 여론화하면서 다양한 연대를 만들어 만들어가야 할 시점이다. 다양한 플랫폼을 구축해가는 드라마 산업안에서, 점점 위상이 높아져가는 K드라마를 만드는 노동자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고 부당한 현실을 바꿔나가는 데 시청자들도 함께 해주시기를 당부드린다.

"아이가 너무 춥고 고통스러워 우는 데 한 컷만 더하자, 한 컷만 더하자 하니까 애가 눈물을 참고 연기를 해요. 컷 하면 감정 잡고 연기하고, 또 컷 하면 춥고 고통스러워서 울어요. 방수 군화 신고 패딩입고서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아이가 얼음물 넣었다 뺐다 하는 장면을 잊을수가 없어요. 좋은 현장이라면 아이를 그렇게 혹사시키지 않고 아크릴로 얼음장을 만들어 따뜻한 물을 넣고 블루 스크린 대고 찍었을거에요."

위에서 언급한 얼음물에 빠지는 연기를 하는 아동청소년 배우에 대해 말했던 그립팀 스태프의 이야기다. 차가운 얼음장 안에 갇혀 있는데, '컷'을 위해 버티고 있는 모습이 드라마 현장 노동자들 모두의 모습같이 보여 종종 그 장면을 생각한다. 위로가 되는 드라마를 만드는 노동자이 스스로도 행복할 수 있도록, 그가 말한 '좋은 현장'이 우리에게 오는 날을 기대해본다. 모두가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진재연은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사무국장입니다.


태그:#드라마, #안전보건,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안전한 현장,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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