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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이 다른 나라의 정부수립 단계와 달라서 친일 청산을 못 하고, 친일 세력들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했다. 깨끗하게 나라가 출발하지 못했다."

7월 1일 이재명 경기지사가 안동 이육사문학관에서 한 발언이다. 7월 4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역사 왜곡을 내세워 이재명 지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이란 황당무계한 망언을 집권 세력의 차기 유력후보 이재명 지사도 이어받았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역사의 단편만을 부각하고 있다."

누구의 말이 맞을까? 둘 다 역사에 부합하지 못한다. 역사는 현재의 기반이며 미래의 가치이다. 차기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서 선두그룹을 형성하고 있는 이재명과 윤석열. 이들의 역사적 가치관을 볼 때 국가의 장래가 밝게 보이지 않는다. 더 슬픈 현실은 언론과 학자도 자신의 이념에 따라 이들의 주장에 줄을 서고 있다는 점이다.
  
1945년 9월 7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명의로 공포된 포고문 문안
▲ 맥아더 포고문 1945년 9월 7일 더글라스 맥아더 원수 명의로 공포된 포고문 문안
ⓒ 광복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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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점령군인가 

먼저 미군은 점령군일까? 한반도에 미군의 진출은 얄타회담(1945년 2월 4~11일)에서 시작되었다. 미국은 일본과 상호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있었던 소련의 참전을 끌어냈고, 이것이 38선 이남에 미군이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게 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카이로 선언(1943년 11월 27일)은 한반도에 미군과 소련군 주둔의 길을 터놓았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절차'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키기로 했기 때문이다.

테헤란 회담(1943년 11월 28일)에서 나온 '40년간 수습 기간 후 조선의 독립'이라는 로드맵이 이를 증명한다. 포츠담선언(1945년 7월 26일)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주둔이 구체화 되었다. 외적으로 카이로회담의 이행을 내세웠지만, 한반도를 38도를 기준으로 갈라 남쪽에는 미군 북쪽에는 소련군을 진주시키기로 이면 합의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강대국의 결정은 일본의 항복 직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과 3년 동안의 군정으로 현실화하였다.

맥아더 포고령(1945년 9월 7일)을 보면 점령한다(occupy) 1회, 점령(occupation) 2회, 점령군(occupying forces)이 1회 등장한다. 이재명 지사는 이를 두고 자신의 표현이 틀리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포츠담선언의 의미는 다르다. 제6항에 "일본 군국주의를 몰아내야 하며", 제7항에 "이를 위해 연합군은 일본 내의 특정 지점들을 점령해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

연합군의 점령대상은 조선이 아니라 일본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에 대한 고증과 이해 없이 미군을 점령군으로 표현한 이재명 지사의 역사 인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도 마찬가지다. 미군을 점령군으로 칭하는 관점을 단순하게 역사 왜곡으로만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일본의 처지에서 보면 점령군이고, 38선 이하 조선에서 보면 해방군이 아니던가. 소련군도 마찬가지다. 소련과 일본의 처지에서는 점령군이고, 38선 이북 조선에서 보면 해방군이 된다.

점령군과 해방군? 선 자리 따라 다르게 보일 뿐 

다음으로 친일 세력이 미 점령군과 합작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했는가? 대한민국 초대 입법, 사법, 행정 3부의 수장 전원, 내각 14명 중 7명이 항일독립 운동가 출신이다. 신익희 국회의장은 임정 내무총장, 이승만 대통령은 임정 초대 국무원장, 김병로 대법원장은 신간회 집행위원장, 이시영 부통령은 임정 법무재무 총장, 이범석 총리 겸 국방장관은 광복군 참모장, 지청천 무임소 장관은 광복군 총사령관, 김도연 재무장관은 독립운동가(2.8 독립선언 주역), 이인 법무장관은 독립운동가(조선어학회 사건 주역), 조봉암 농림장관은 사회주의 항일운동가, 전진한 사회장관은 항일노동운동가 출신이다.

이외 초대 내각으로 윤치영 내무장관, 장택상 외무장관, 안호상 문교장관, 임영신 상공장관, 민희식 교통장관, 윤석구 체신장관, 이윤영 무임소장관이 있다. 외적으로 보면 친일 세력이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라는 주장에는 한계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것만으로 정부수립의 주체를 판단할 수 없다. 이승만은 냉전 시대에 반공 이념을 도입하여 미국의 낙점을 받은 후, 지주 및 친일 세력과 동맹을 맺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 강점기에 채용된 공무원을 그대로 임용했다. 이는 윤치영 내무장관 담화(동아일보 1948년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 담화(관보 1호, 9월 1일), 이범석 국무총리 담화(동아일보 8월 26일)에서 잘 나타난다.

그 결과 미군정 시 임용된 약 2만 5000명의 경찰이(1946년 11월 미군정의 조미 공동회담 결정 사항 및 권고사항) 그대로 임용되었는데, 이들 중 5000여 명이 일본 경찰 출신이었고 군대도 일본군 출신이 장악했다. 1945년 12월~1946년 4월까지 군사영어학교에서 배출된 장교 110명 중 87명이 일본군, 21명은 만주군, 2명은 중국군 출신이었고 이들이 국군창설과 한국전쟁 주역이 되었다. 한국전쟁 당시 총참모장과 9개 사단급 지휘관 중 일본군 출신 8명, 만주군 1명, 중국군 1명이었다.

미군은 점령군이었나? 미군에게 한반도 진주는 패전국 일본의 영토를 점령하는 행위이며, 일본의 관점에서 승전국인 미군이 패전국인 자국 영토를 점령하는 것이다. 조선에서 보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해방군이 된다. 고로 맥아더 포고령을 인용하여 미군을 점령군으로 묘사한 이재명 지사의 주장은 지엽적이다.

윤석열 전 총장은 소련군을 대비시켜, 역사가 아니라 이념적 관점에서 접근했다. 친일 세력의 국가? 이승만이 미국과 결탁하여 대통령이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초대 정부에서 군대와 경찰을 비롯한 공무원의 주류가 일본 강점기 출신이다. 국가 운영을 위한 고육지책이라고 하지만, 친일파(pro-japanese)를 내치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초대 정부가 점령군과 친일 세력의 합작품이라는 이 지사의 판단은 역사적 사실과는 괴리가 있어 보인다. '대한민국의 정통성 부정'이라는 윤석열 전 총장의 주장은, 역사라기보다 지지 세력 확장을 위한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

태그:#이재명, #윤석열, #미군점령군, #소련군해방군, #점령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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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대학원 졸업(정치학박사) 전,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현, [비영리민간단체] 나시민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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