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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소리 좀."

반응이 없다. '들릴 리가 없지.' 화장실 문을 두드리며 짜증 섞인 말이 나간다. "소리 좀 줄여 달라고!" 대답은 없고 소리만 작아진다. 미안해해도 모자랄 판인데 무언의 답이 불만으로 들려 내 불쾌지수를 높인다. "혹시, 화장실에 방음장치가 된 줄로 아는 건 아니지!" 아무리 돌려 말해도 직진 스타일. 같은 일이 반복되면서 다짜고짜 신경질 어투로 아침을 시작한다.

'아, 조용히 살고 싶다.' 클래식도 소음으로 들리는 아침, 남편의 애청곡이 들린다. 흥얼흥얼 콧노래에 눈은 반쯤 내리깔고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 있다. 감성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턱을 좌우로 흔들며 거실과 주방을 오간다. 올라오던 짜증도 범접하기 힘든 분위기. 한마디 하려다 잠시 숨을 고른다.

"합쳐서 반으로 나누면 딱인데."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다. 몸무게, 혈압은 물론 감성지수, 이성지수도 양극에 있다. 평형을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 부부조합이다. 음악을 들으면 담배 피울 때만큼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는 남편과 소리 더듬이가 초미세로 발달한 나는 볼륨이라는 과제를 놓고 늘 옥신각신한다.

잔잔하게 시작한 노래는 절정에서 몹시 커지는데, 그 진동에 그만 내 인내심은 바닥을 보이곤 한다. 이웃까지 들먹이며 배려심 운운해도 남편은 설득당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내가 도저히 이해 안 된다며 '비정상'이라는 눈치다. '음악은 좋은 것'이라는 신념으로 긴 세월 꾸준히 승자의 자리를 꿰찬 남편은 양보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레코드판 사들이는 것이 취미였던 남편은 나를 만났을 즈음엔 2미터 남짓 되는 벽장을 레코드로 꽉 채워 놓은 상태였다. "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음악을 듣기 위해 DJ가 있는 커피숍을 찾아다니던 시절이었다. 전축과 레코드판, 외국가수와 팝송들을 꽤나 많이 알고 있는 그가 멋져 보이기도 했다. 그는 내가 좋아하는 곡을 카세트에 담아 선물로 주기도 했다. 그 많던 애장품은 군대를 다녀오고 이사 가는 와중에 폐기처분 되어, 훗날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겼지만.

결혼 후, 외국 다녀오는 지인을 통해 가장 먼저 장만한 건 전축이었다. 보기에도 럭셔리한 '야마하'는 남편의 보물 1호가 되어 거실벽면 절반을 넉넉히 차지했다. 두 개의 스피커가 본체보다 더 커서 부담되는데도 남편은 매우 흡족해했다. 스피커의 성능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아파트에서는 제 기능을 펼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지만, 어떠하리. 전축의 가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소유 자체로 충분했다.

이사 가는 날이었다. 두 번째라서 요령도 생기고, 무엇보다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옮겨 가게 되어 신바람이 났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가 단비처럼 느껴졌다. 포장이사도 아니었으니 분명히 고생했을 텐데도 기억에 없을 정도로 좋았다. 문제는 전축이었다. 습기에 약한 보물 1호를 바닥에 놓으면 밟을세라, 딴 사람에게 맡기면 깨질세라, 남편은 시종일관 품에 안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전축만 옮기는 날처럼 행동했다.

쿵! 턱! 턱! 메인 앰프가 계단을 굴렀다. 남편은 3층에서 1층으로 내려오다 계단 난간에 아주 잠시 놓았다고 했다. 꿈이었으면 좋았으련만. 할 말을 잃어버린 우리는 상심한 마음을 표현할 사이도 없이 이사를 진행했다. 고치면 된다고 꾸역꾸역 위로했다. 그 후, 몇 번을 서울로 보내 수리했지만 원상복귀 되지 않았다. 울며 겨자 먹듯 남편의 전축 사랑도 점점 시들어갔다. 거금을 주고 구입한 물건이니 내게도 속상한 일이었지만,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 집의 전축은 야마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노래 듣는 시간이 조금씩 줄어들 즈음, 스마트 폰이 등장했다. 가뭄에 물 만난 고기처럼 남편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애청곡들은 카카오 뮤직을 통해 차곡차곡 쌓여갔다. 음반을 사랑했던 저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휴대전화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볼륨 수위도 점점 높아지고 그것도 모자라 블루투스까지 합세했다. 아침마다 실랑이가 벌어졌다.

팝송, 7080가수는 물론 최근 노래까지 줄줄이 저장해 있는 남편의 기억창고는 아직 쓸 만하다. 기분에 따라, 날씨에 따라, 계절에 따라 그날의 대표곡을 고른다. 최고의 선곡을 자랑하며, 모든 음악은 '아내를 위한 것'이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응은 초지일관 무덤덤이다. 좋아하는 듯하면 진도를 더 뺄 확률이 100%이기 때문이다.

내게도 변화가 오고 있다. 어쩌다 노래가 없는 조용한 아침. 둘이 아침을 준비하고 밥을 먹다보면 무언가 빠져있는 느낌이 든다. 가랑비에 옷이 젖었는지, 서당개 30년에 풍월이 나오는 건지 알 수 없다. 나도 어느새 음악이 있는 아침모드에 젖어들고 있나 보다. 잔소리만 했던 이미지를 회복해 볼까 하고 유튜브를 연다.

"여보, 듣고 싶은 노래있어?"
"음. 오늘 같은 날은 너랑 나랑 그대와 함께."
"너랑 나랑... 그런 노래 없는데?"
"너랑 나랑은 가수고, 노래제목이 그대와 함께고."
"너랑 나랑이 가수였어?"


남편이 크게 웃는다. 오늘도 우리 집의 '너랑 나랑'은 DJ와 애청자로 그대와 함께 하루를 연다.

덧붙이는 글 | 블로그, 브런치에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전축, #노래사랑 ,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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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육십부터.. 올해 한살이 된 주부입니다. 글쓰기를 통해 일상이 특별해지는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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