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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을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만큼 난해한 연극은 아니다. 그 이유는 <굴뚝을 기다리며>를 직접 쓰고 연출한 '극단고래'의 이해성 대표가 한국 사회의 아주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작품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만큼 난해한 연극은 아니다. 그 이유는 <굴뚝을 기다리며>를 직접 쓰고 연출한 "극단고래"의 이해성 대표가 한국 사회의 아주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작품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 극단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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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연극 좀 보았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꼭 한 번쯤은 보았을 사무엘 베케트의 대표작 <고도를 기다리며>. 이 연극을 본 사람들 가운데 자신있게 백 퍼센트 이해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두 사람이 그토록 기다리는 '고도'는 과연 누구인지, 아니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게 만드는 난해한 이 작품에 바치는 오마주 <굴뚝을 기다리며>라는 연극이 우리를 찾아왔다. 

<굴뚝을 기다리며>는 <고도를 기다리며>만큼 난해한 연극은 아니다. 그 이유는 <굴뚝을 기다리며>를 직접 쓰고 연출한 '극단고래'의 이해성 대표가 한국 사회의 아주 구체적인 현실에 기반해 작품을 집필했기 때문이다. 

2016년 11월 4일 블랙리스트 사태로 광화문에서 점거농성이 시작되었을 때 이 대표는 연극인들이 만든 '연극인 텐트'에 함께 했다. 당시 그가 그 현장에서 자주 만났던 사람들은 연극인이 아니라 노동자들. 특히 해고노동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고공농성에 대한 본격적인 인터뷰를 하게 되었고, 경북 칠곡군 스타케미칼 공장 안 굴뚝 위에서 408일 동안 고공농성을 했던 이 회사 해고자 차광호씨와의 대화는 그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2018년 겨울 이해성 대표는 파인텍 농성장에서 15일 동안 연대 단식을 진행했다. 그 기간 동안 끊임없이 굴뚝에 올라가 있는 홍기탁, 박준호 두 사람을 바라보았는데, 단식 기간 전후로도 1년 이상 굴뚝 위의 그들을 올려다보면서 그는 <고도를 기다리며>의 고도를 떠올렸다. 연대 단식 농성을 하기 전에는 굴뚝 밑에서 '굴뚝바라지'(굴뚝 위 농성자들을 지켜주기 위해 굴뚝 아래에 텐트를 치고 옥바라지 하듯 챙겨주는 일)를 하며 일주일에 한 번씩 문화제도 열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오마주
 
이해성 '극단고래' 대표.
 이해성 "극단고래" 대표.
ⓒ 이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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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그가 본 <고도를 기다리며>에는 인간 실존에 대한 고민과 구원에 대한 성찰이 섞여 있었다. 주인공들이 기다리는 것은 신(神)일 수도 있고 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에게 이 작품은 이승과 피안(彼岸)의 세계에 대한, 둘 사이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 같아 보였다. 

굴뚝 위에 올라가 있는 사람들 역시 발 한 쪽을 피안에 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들 삶의 실존적인 의미가 궁금했고, 그들이 이 일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길래 육체적인 한계를 넘어선, 죽음을 바로 옆에 두고 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가 궁금했단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복직일까? 그 마음으로 과연 저렇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극단적 육체의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작가 이해성이 써온 작품들은 어쩌면 대단히 계몽적인 색깔을 띨 수도 있었다.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다룬 <빨간시>나 세월호나 쌍용차와 같은 사회적 재난의 유가족들을 다룬 <비명자들> 시리즈 등 실제로 같은 테마를 다룬 작품들 중에는 신파에 빠지거나 프로파간다(propaganda)적 성격을 보여주는 공연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신파에 빠지면 안 된다', '날 것을 그대로 작품에 가지고 가면 안 된다'라는 생각으로 사회적 재난의 피해자들과 그 피해자들의 고통을 모르고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 사이의 간극을 없애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런 이유로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는 노동 문제를 '노동적'으로 풀지 않기 위해 여러가지 장치들을 했다고 한다. 이 작품에 대한 고민이 노동 문제에서 시작됐다고 해서 심각하거나 비장하리라는 생각은 오해다. 주인공 나나와 누누가 주고받는, 때로 유쾌하기도 하고 때로 풍자적이기도 한 대화는 보고 나와서도 내내 의미를 곱씹게 되는 츄잉껌 같다. 

고공농성자를 통해 본 한국사회의 모습

자본의 횡포 혹은 욕망이 노동자 개인의 삶을 망가뜨리는 대표적 형태가 바로 '부당해고'라고 이 대표는 이야기한다. 고공농성은 부당해고에 대한 가장 강력한 저항의 형태로, 그는 <굴뚝을 기다리며>에 해고노동자들뿐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가지 욕망들 간의 충돌을 담고자 했다.  

나나와 누누는 나와 다른 사람, 이성과 감성을 상징하며 작품 전체에는 욕망과 폭력과의 상관 관계, 자기 욕망과 타인의 행복 간의 문제 등이 담겨있다. 또한 이분법적 대립 구조로는 한국 사회에 넘실대는 혐오를 없앨 수 없다는 작가의 고민도 볼 수 있다. 

스스로를 보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와서 보고 노동계에 있는 이들도, 또 노동문제에 크게 관심 없었던 시민들도 와서 이 작품을 봤으면 좋겠다는 게 작가의 바람이다. 보수와 진보 양쪽에서 다 욕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 자체가 의미있다고 본다. 그에게 예술 행위란 어찌 보자면 종교의 목적, 곧 깨달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구도(求道)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작가 이해성은 깨달음의 세계와 속세의 세계를 연결하는 일을 하고 싶어서 예술을 택했다고 한다. 종교보다는 쉬운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전달하고 싶어서. 내가 모르는 진실에 대한 욕구, 내가 모르는 진실을 사람들과 나누고자 하는 욕구가 예술의 발로였던 만큼 그는 이 작품을 통해서 한국사회 고통의 문제에 대한 깨달음을 찾고자 한다.

공연 첫날 기분이 어떨 것 같냐는 물음에 그는 "결과에 대해 크게 연연해하지 않는다"라고 답했다. 공연 과정 전체를 모두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에게 연습 과정과 무대 위의 공연 시간은 별반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습할 때도 공연할 때처럼 최선을 다하되, 공연할 때도 과하게 긴장하지 말라'는 게 그가 배우들에게 늘 하는 이야기다. 

70미터 높이 허공의 공간인 굴뚝이라는 배경에서 연습을 공연처럼 해왔던 배우들이 보여주는 고공농성자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표현될지 궁금하신 분들은 6월 10일부터 27일 사이에 대학로 연우소극장을 찾으면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강윤주 경희사이버대 문화예술경영학과 교수는 '극단고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태그:#굴뚝을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이해성, #극단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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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주 기자는 경희사이버대 문화창조대학원 문화예술경영 전공 주임교수이다. 지난 십여년 간 생활예술, 곧 생업으로 예술을 하지 않는 아마추어 예술인들의 예술 행위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지금은 건강한 예술생태계 구축을 위해 예술인의 사회적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이를 위한 다양한 예술인 사회적 교육 과정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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