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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산 지 딱 십 년째 되던 해의 어느 날, 문득 나도 이제는 '죽음'에 대비할 때가 되었단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인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낮에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묻지마 살인 사건에 관한 뉴스를 접한 뒤거나, 혹은 뺑소니 사망 교통사고의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을 보고 난 다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십 대 중반에 처음 독립한 뒤로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에서 쭉 혼자 살고 있던 내게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계기는 차고도 넘쳤다.

나는 내가 죽고 난 뒤에 나의 유품을 정리하게 될 누군가를 떠올리자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모님이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고 비통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하면 나의 죽음 이후, 남은 사람들을 제대로 위로할 수 있을까? 며칠을 고민한 끝에 격식을 갖춘, 품위 있는 유서가 필요하다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한두 사람의 이름을 추가하거나 삭제하거나 등의 사소한 변경 사항을 제하고 나면 내가 지난 몇 년간 쓴 유서의 내용은 대체로 비슷비슷하다. 너무 많이 슬퍼하지는 말아 달라는 것, 바로 그 당부 한 가지다. 슬픔에 잠식당해 버리면 남은 생은 불행해지기 마련이다. 나는 내가 아는 그 누구의 삶도 불행해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 고통은 지나가는 것이다.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실 슬픔뿐 아니라 좌절감이나 분노, 공포와 같은 다른 부정적 감정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이 주는 위압감에 짓눌려 스스로를 고통 속에 가두어 버린 사람은 현재를 바로 보지 못한다. 과거에만 매달려 있다 보면, 그 어떤 미래도 꿈꿀 수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에겐 누구나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당신이 지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시련에 맞닥뜨렸다고 가정해 보자. 그대로 슬픔에 자신을 던져 버리고 영영 고통 속에 머물 것인가, 떨치고 일어나 남은 생을 향해 당당히 걸어갈 것인가, 당신은 선택해야만 한다.

'마음의 감옥'에 갇힌 홀로코스트 생존자 
 
표지
▲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표지
ⓒ 조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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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당신의 올바른 선택을 응원하는 한 권의 책이 있다. 에디트 에바 에거의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이다. 저자인 에거 박사는 헝가리 출신으로 열여섯 살에 가족과 함께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가 가까스로 살아남은,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다.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면, 창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라"라고 엄마는 말하곤 했다. 생존을 위한 문은 없다. 회복을 위한 문도 마찬가지다. 사방이 온통 창문뿐이다. 더군다나 걸쇠에 손이 잘 닿지 않고, 유리창은 너무 작으며, 공간이 좁아 몸에 들어맞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있는 곳에 그대로 서 있을 수는 없다. 반드시 방법을 찾아야 한다. -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2부 '탈출' 중 p.163
 
그녀는 수용소로 끌려간 뒤 수차례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가혹한 노동과 굶주림을 견뎌냈다. 아무도 어린 소녀를 위해 먼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그러나 사방이 굳게 닫힌 작은 창문뿐이라고 하더라도, 살기 위해선 그것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해냈다.

그녀는 버려진 시체 더미 속에서 등이 부러진 채로 발견되어 미군들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렇게 목숨을 건지고 다시 걷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오랜 세월을 트라우마에 시달려야 했다. 문을 열었다고 생각한 순간, 또다시 창문이었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미국으로 건너가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면서 그녀는 끊임없이 과거로부터 도망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녀가 헝가리 억양을 감춘 영어를 구사하며 완전한 미국인으로 살고자 하는 동안에도, 그녀가 수용소에서 보냈던 그 시절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아무 때고 그녀의 연약한 마음 어딘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서, 그녀를 차갑고 어두운 수용소의 바닥으로 끌어내리곤 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을 옥죄고 있던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 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다.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는 부모를 죽인 나치 장교 앞에서 춤을 추어야 했던 어린 소녀가 '생존자'가 되어 돌아오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1부 '수용소' 편에서부터 93세의 나이에 현역 심리치료사이자 대학교수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 이야기를 담은 4부 '치유' 편에 이르기까지, 그 파란만장했던 삶을 담담하게 그려낸 회고록이다. 또한, 이 순간 어디선가 상처 입은 누군가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자유롭다는 것은 바로 현재에 사는 것이다. 과거에 갇힌 채 "여기 대신 저기'만' 갔더라면" 혹은 "결혼을 다른 사람하고'만' 했더라면…"이라고 말한다면, 자기 스스로 만든 감옥 안에 사는 것과 다름없다.

"~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야" 혹은 "딱 맞는 사람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거야"라고 말하면서 미래에 우리의 시간을 쏟는다 해도 감옥 안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선택의 자유를 실행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현재뿐이다(3부 '자유' 중에서 p.310).

상처 받았더라도, 현재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절망의 끝을 향해 곤두박질치는 듯한 경험을 할 때가 있다. 그러나 더욱 최악은 절망 안에서 자라나는 자기 파괴적인 마음이다. 그것을 우리는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트라우마라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다 보면 우리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게 한다. 바로 행복해질 수 있었던 더 많은 날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거 박사의 조언대로 '현재'를 살아야 한다.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에는 무슨 일엔가 지독히 상처받은 당신이 부디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슬픔에 잠식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저자의 진심이 담겨 있다. 읽는 내내 여러 번 고개가 끄덕여졌고, 깊은 위로를 받았다. 고요하고, 따뜻한 울림이 있는 책이다. 책의 서문에는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전 세계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적혀 있다. 일부를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는 상처에서 자유로운 삶을 선택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롭기로 선택할 수 있다. 무슨 일이 우리에게 닥치든, 과거에서 탈출하여 가능성을 수용하기를 선택할 수 있다. 나는 당신이 자유로워지기로 선택하기를 바란다. - 에디트 에바 에거

마음 감옥에서 탈출했습니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내면의 빛을 보는 법에 대하여

에디트 에바 에거 (지은이), 안진희 (옮긴이), 위즈덤하우스(2021)


태그:#마음 감옥, #심리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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