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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한옥마을 주변으로는 조선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장소들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태조의 어진이 봉안된 전주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한의 묘가 있는 조경단(肇慶壇, 전라북도 기념물 제3호)과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승리 후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연회를 베푼 장소로 알려진 오목대(梧木臺),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李安社, 추존 목조)의 유허지인 이목대(梨木臺) 등이 있다.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추존 목조)의 유허지로, 인근의 자만동 벽화마을에 금표가 남아 있다.
▲ 이목대 태조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추존 목조)의 유허지로, 인근의 자만동 벽화마을에 금표가 남아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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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오목대와 이목대(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에는 고종이 친필로 쓴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오목대의 경우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畢遺址碑)', 이목대에는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다. 또한 조경단이 현재의 모습으로 정비된 것 역시 고종 때로, 이는 당시 전주가 조선 왕실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어때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풍(豊)은 한나라 고조의 출신지가 풍현인 것을 빗댄 것으로, 조선 왕실의 발상지로 해석할 수 있다.
▲ 전주 풍남문 풍(豊)은 한나라 고조의 출신지가 풍현인 것을 빗댄 것으로, 조선 왕실의 발상지로 해석할 수 있다.
ⓒ 김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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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전주에 조선 왕실의 흔적이 많은 이유는 전주 이씨의 발상지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흔적이 전주읍성의 남문인 풍남문(豊南門)과 객사(客舍)인 풍패지관(豊沛之館)이다. 두 장소에서 공통으로 확인되는 풍(豊)은 한나라 고조(유방)의 출신지가 풍현 출신인 것을 빗댄 것으로, 이 경우 전주를 조선 왕실의 발상지로 해석했음을 알 수 있다.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다.
▲ 자만동 금표 이목대가 있는 자만동을 보호하기 위해 세운 금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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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조선 시대에 전주는 중요하게 인식되었고, 왕실과 관련이 있는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금표(禁標)를 세웠던 것이다. 또한 이와 관련한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는데, 바로 자만동 금표와 창덕궁 금표다. 자만동 금표는 자만동 벽화마을 내 골목길에 있는데, 별다른 이정표가 없기에 알고 찾지 않는 이상 그냥 지나치기 쉽다.

자만동 금표는 위치상 인근에 있는 이목대와의 연관성이 주목되는데, 이목대는 이성계의 4대조인 이안사(추존 목조)의 유허지이기 때문이다. 이 경우 자만동 금표는 이목대 일대를 보호하기 위해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목적으로 금표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자만동 금표가 세워진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조경단을 비롯해 오목대와 이목대 일대가 정비된 고종 때로 추정된다.
 
조경단이 있는 건지산 일대에서 확인된 표석이다.
▲ 창덕궁 금표 조경단이 있는 건지산 일대에서 확인된 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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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국립전주박물관의 전시실에는 또 하나의 금표가 있는데, 바로 창덕궁 금표다. 해당 금표는 조경단이 있는 건지산 일대에서 발견되었는데, 표석의 전면에 창덕궁(昌德宮)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창덕궁은 당시 궁에 거주했던 왕 혹은 조선 왕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실제 경술국치(國權被奪) 이후 조선 왕실은 일제의 왕공족(王公族)으로 편입되면서, 황제였던 순종은 이왕(李王)으로, 태황제였던 고종은 이태왕(李太王)으로 격하되었다. 때문에 당시 조선 왕실은 이왕가(李王家)로 불렸으며, 고종의 경우 덕수궁에 머물렀기에 덕수궁 이태왕, 순종의 경우 창덕궁에 머물러서 창덕궁 이왕으로 불리기도 했다.
 
창덕궁 금표에 새겨진 창덕궁은 당시 궁에 거주했던 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 창덕궁 낙선재 창덕궁 금표에 새겨진 창덕궁은 당시 궁에 거주했던 왕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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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명문이 없기에 표석을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해당 금표가 조경단이 있는 건지산 일대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1899년(고종 36)에 조경단을 정비하고, 성역화하는 과정에서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 즉 창덕궁 금표는 조경단 일대가 왕실 소유의 땅이기에 그 경계에 세운 표석으로, 이 일대의 출입과 벌채, 개간 등을 금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자만동 금표와 창덕궁 금표를 통해 전주의 조선 왕실 유적들의 성격과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렇기에 사실상 방치 상태에 있는 자만동 금표와 함께 박물관에 전시 중인 창덕궁 금표에 대한 보존과 관심이 필요하다.

태그:#자만동 금표, #창덕궁 금표, #조경단, #오목대와 이목대,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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