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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문경은 풍경에 진심이다.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시원스레 펼쳐진 무수한 초록의 질감들이 상춘객들의 경탄을 자아내게 한다. 문경새재는 이번 여정에 없던 여행지였다.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전부터 몽골 여행을 하고 싶었다. 몽골의 맑은 밤하늘에서 은하수와 별을 보고 싶었다.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설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올해도 코로나19로 인해 몽골여행은 포기해야 했다.
 
문경새재 국민여가 캠핑장에서 본 주흘산 풍경이다.
▲ 문경새재, 주흘산 문경새재 국민여가 캠핑장에서 본 주흘산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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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귀정사에서 템플스테이를 하며 알게 된 여행지기와 간간이 안부를 물었다. 그가 올 겨우내 머무르고 있다는 괴산의 한 공동체 삶터에 들러 짧은 만남을 가졌다. 여행지에서 만난 지기와 일 년만이다. 귀한 인연이다. 트렁크에 캠핑 장비를 실었지만 목적지는 미정이다. 점촌 시내의 모텔에서 하루 머물렀다. 모텔의 벽을 타고 들려오는 묘령의 새벽은 다시 잠이 들지 못한 채 싱숭생숭했다.

새들도 힘들게 넘는다는 '문경새재'를 가다

상주, 문경, 점촌. 고등학생 시절 기숙사에서 같은 호실을 썼던 친구들의 고향이다. 그래서 지명은 익숙하지만 낯선 여행지다. 문경새재 국민여가 캠핑장에 텐트를 쳤다. 어제는 토요일이라 캠핑장 사이트가 만석이었다. 선착순이었던 것을 4월부터 예약제로 바뀌었단다. 문경 진흥공단에서 위탁 운영하는 캠핑장은 이용료가 이만 원으로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캠핑장까지 올라가는 언덕이 높고 차를 사이트에 바로 대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데크마다 전기도 들어오고 캠핑장에서 바라본 풍경이 아름답다.
 
국민여가 캠핑장에서 바라본 주흘산 전경
▲ 문경새재 국민여가 캠핑장에서 바라본 주흘산 전경
ⓒ 김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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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드라이기로 버틴 '문경새재'의 새벽

일요일이다. 캠핑을 하는 팀은 둘이다. 소란스러웠을 어제와 달리 캠핑장은 고즈넉하다. 솔로 캠핑은 이번이 처음이라 조금 설레기도 하고 떨린다. 텐트를 치는 몸짓이 서툴고 어색하다. 삼십분여 낑낑댔더니 텐트가 완성되었다. 새벽에 춥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캠핑장 관리소 직원이 지나가다 왜 타프는 안 치냐고 묻는다. 캠핑이 처음이라고 했더니 웃으신다.

"산이라 밤이 되면 춥고 새벽엔 고라니랑 멧돼지가 나타나서 겁을 주기도 해요."

지나가며 농을 던지신다. 까짓것 고라니랑 같이 놀지 뭐. 외부의 힘보다 내부의 힘이 강한 나는 크게 개의치 않는다.

"아직은 밤에 추울 텐데 핫팩이나 전기장판이 있어야 할 거예요."

해가 지자 바람이 불고 새벽이 되자 추웠다. 새벽 찬 바람은 얇은 텐트를 비집고 들어왔다. 간간히 산짐승 소리도 들렸다. 자다가 추워서 두 번이나 깼다. 이불을 머리까지 덮고서 몸을 벌레처럼 웅크렸지만 두 발이 시렸다. 궁여지책으로 헤어드라이기를 켰다. 이불 안이 금세 따듯해졌다. 하지만 새벽 찬 공기는 드라이기의 온기를 앗아가 버린다.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고 한다. 임진왜란 후 세 개의 관문(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 문경새재 문경새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 유역을 잇는 영남대로 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고 한다. 임진왜란 후 세 개의 관문(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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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반과 라면으로 아침을 간단히 먹고 문경새재를 걸었다. 제2관문인 조곡관까지 가는 게 목표다. 문경새재는 조선시대 과거를 보는 선비들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가는 길이다. 새재라는 말에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억새가 우거진 고개, 하늘재와 이우릿재 사이의 고개라는 의미다.

제1관문을 지나면 조선시대와 고려시대 드라마 촬영 장소인 오픈세트장과 조령원터, 동화원, 그리고 장원급제 길이 이어진다. 이어서 교귀정(交龜亭), 산불됴심비, 제2관문(조곡관), 제3관문(조령관)으로 이어진다.
   
문경새재의 첫 관문이자 3개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뚝 솟을 '흘'자와 빗장 '관'자를 쓰는데 문경의 진산 주흘산과 빗장을 잠그듯 문을 잠가 놓는다는 의미로 추측된다.(안내문)
▲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문경새재의 첫 관문이자 3개 관문 중 옛 모습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우뚝 솟을 "흘"자와 빗장 "관"자를 쓰는데 문경의 진산 주흘산과 빗장을 잠그듯 문을 잠가 놓는다는 의미로 추측된다.(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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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이순신, 태조 왕건, 해를 품은 달

매표소에서 이천 원에 입장권을 사고 오픈세트장을 들렀다. 평일인데도 관광객들이 제법 보였다. 단체보다는 나이 지긋한 부부나 젊은 연인끼리 온 팀들이 많다. 광화문과 경복궁 등 오픈세트장은 마치 타임슬립이라도 한 것처럼 고려와 조선시대의 건물을 실감 나게 재현해 놓았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어, 인생이 찰나와 같은 줄 알면서도 왜 그리 욕심을 부렸을꼬… 허허허. 이렇게 덧없이 가는 것을…"

-태조왕건, 궁예 마지막 대사-

이곳에서 태조 왕건, 불명의 이순신, 대조영, 해를 품은 달 등을 촬영했다. 길을 걷다 보니 계곡물이 시원하게 흐르는 바위 길가에 태조왕건에서 궁예가 자신의 부하들에게 최후를 맞이하기 전에 하던 마지막 대사가 적혀있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한 곳으로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해를 품은 달, 대박 등의 유명 사극 좔영지로 유명하다. 매년 5월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인 문경 전통 찻사발 축제가 개최된다(가이드북 참조)
▲ 문경재 오픈 세트장 고려와 조선 시대의 풍경을 실감나게 재현한 곳으로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 대조영, 해를 품은 달, 대박 등의 유명 사극 좔영지로 유명하다. 매년 5월 대한민국 최우수 축제인 문경 전통 찻사발 축제가 개최된다(가이드북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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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오픈세트장이 있는 제1관문 까지는 전동차를 타고 갈 수 있다. 가다 보니 수시로 승객을 태운 전동차가 오고간다. 마주 오던 전동차에서 귀에 익숙한 동요가 흘러나온다. 하지만 전동차에 탄 승객들은 대부분 머리가 희끗희끗하다. 아이나 어른이나 설렘을 채우는 미소는 한결같다.
 
문경새재 안에 조성된 오픈세트장, 사립문이 정겹다.
▲ 오픈세트장 문경새재 안에 조성된 오픈세트장, 사립문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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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과 경복궁을 보고 반대편 초가집 세트장으로 향했다. 초가 입구의 얼기설기 엮은 사립문이 어릴 적 살던 시골집을 연상시킨다. 앞을 보며 걷는데 좌, 우, 정면으로 젊은 세 연인이 다정하게 손을 잡거나 휴대폰으로 서로를 찍어주고 있다.
 
나그네들이 하룻밤 묵어 가던 시골집이다.
▲ 시골집 나그네들이 하룻밤 묵어 가던 시골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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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재를 넘어 시골집에 묵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문경새재를 넘던 과객들이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하룻밤 묵어가던 시골집이다. 최근에 복원된 것으로 보이는 작은 초가집 한 채가 외로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제1관문과 제2관문 사이에 조령원터가 있는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출장을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던 시설이다.
   
조선 후기에 세워진 희귀한 산림 보호 비석이다.
▲ 산불됴심비 조선 후기에 세워진 희귀한 산림 보호 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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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벅터벅, 새재를 넘다보니 조선시대 후기에 세워진 산불됴심 표지석이 보인다. 한문이 아닌 한글로 쓰인 표지석이 인상적이다.
 
현재 국내애 고어로 된 한글비석은 모두 4점이나 조령산불됴심 표석을 제외하곤 모두 국한문 혼용으로 되어 있어 국내 유일의 순수한글 비석이라 할 수 있다(표석)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가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는 감사와 교대를 하는 교귀정이다.
▲ 교귀정 새로 부임한 경상감사가 임무를 마치고 한양으로 가는 감사와 교대를 하는 교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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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 경상감사가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교귀정(交龜亭)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임금으로부터 명을 받은 신, 구 경상감사가 서로 업무를 인수인계하던 장소다. 1896년 의병 전쟁 시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99년 복원하였으며, 경상감사 교인식 재현 행사를 거행해오고 있다. (문경새재 가이드북) 
   
제1관문에서 3관문으로 가는 길이 약 6.5킬로미터 정도 거리다.
▲ 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3관문으로 가는 길이 약 6.5킬로미터 정도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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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관문까지 세 시간 남짓 걸었더니 제법 출출하다. 제3관문이 남았지만 여기까지만 걷기로 했다. 관문을 지나자 등산복 차림의 중년 여성 네 명이 바위 사이에 마련된 벤치에 앉아 지친 발걸음을 쉬고 있다.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약수를 한 모금 들이키니 산행 중 쌓였던 갈증이 해소된다. 공원 입구 편의점에서 산 빵과 바나나 우유로 허기를 달랬다.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늠름하고 고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관문 정면에 조곡교라고 쓰인 다리가 있고,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관문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 문경새재 제2관문 문경 조령의 중간에 위치한 제2관문으로 늠름하고 고운 자태를 지니고 있다. 관문 정면에 조곡교라고 쓰인 다리가 있고, 아래로 흐르는 계곡과 관문이 어우러지는 풍경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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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산하는 걸음은 수월했다. 출발할 때 눈여겨 두었던 식당에서 더덕구이 정식을 시켰다. 2인분 이상이지만 1인분도 해주셨다. 식당마다 보이는 메뉴판이 무척 크다. 커다란 메뉴판 아래 작게 쓰인 영문은 어설픈 영어가 아닌 한글식 발음을 그대로 표기했다. 빨간 양념이 잘 밴 더덕구이 향이 막힌 코를 자극한다. 침이 고인다. 식감도 좋고 된장찌개와 반찬도 맛이 깔끔하다. 공깃밥이 모자라 하나 추가했다. 

주흘산의 일출과 봄의 전령사들

첫날은 새벽에 두 번이나 잠이 깰 정도로 추웠는데 이튿날은 몸이 적응한 탓인지 별로 춥지 않았다. 헤어드라이기 덕분이다. 사방에서 아침을 깨우는 향기와 소리들이 밤새 굳었던 몸을 풀어주고 두 귀를 맑게 열어준다.

시선이 가는 곳마다 4월에만 볼 수 있는 무수한 질감의 초록들이 경쟁이라도 하듯이 스스로를 마음껏 뽐낸다. 잠이 덜 깬 몽롱한 의식으로 텐트 안에서 보는 주흘산의 일출이 장관이다. 빛의 명암에 따라 산야의 아침과 저녁, 그리고 오후의 풍경을 제 스타일 대로 수놓는다.
 
텐트 안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일출
▲ 문경새재의 일출 텐트 안에서 바라본 주흘산의 일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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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주흘산의 일출은 예상하지 않은 선물이다. 자연이 내게 주는, 함부로 계량할 수 없는 선물이다. 에머슨의 자연, 소로우의 월든, 예이츠의 이니스프리의 호수가 이러했을까. 이쯤 되면 만물에 신이 깃들어 있다는 스피노자의 범신론에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노 시인의 부름으로만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 꽃들은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이곳에 만개한 꽃들은 누군가의 부름 이전에 꽃으로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있다. 나는 발견자가 아니라 단지 그 향기와 곁을 스쳐 가는 낭인이다.

이 세상에 나를 태어나게 해 주신 부모님과 신에게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다. 눈 앞에 펼쳐진 초록의 비경을 바라볼 눈이 있어. 새들의 지저귐을 들을 귀가 있어, 무엇보다 새벽 찬 기운을 느낄 촉감이 있음을 감사하게 되는 아침이다. 몽골의 맑은 밤하늘,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수한 별들, 은하수를 보지 못했어도, 나를 닮은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도 지금 여기에서 충분히 행복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인철 시민기자의 네이버블로그와 다음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문경새재, #캠핑여행, #주흘산, #태조왕건, #조령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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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 뉴스 시민기자입니다. 진보적 문학단체 리얼리스트100회원이며 제14회 전태일 문학상(소설)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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