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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1922년 모스크바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참석할 당시 사진(출처 : 반병률 교수) 최운산 장군(가운데)으로 추정되는 사진 속 인물이 여운형(왼쪽)과 함께 한 사진이다. 이 사진을 입수 발굴한 반병률 교수는 최운산 장군(가운데)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 반병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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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형제들을 비롯하여 독립운동가들이 지극히 어려운 여건에서도 줄곧 무장전쟁론을 제기하고 실전에 나선 것은 공허한 백 마디의 언설보다 왜적 하나라도 없애는 것이 조국독립의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간도지역 교민 자제들과 국경을 넘어온 애국청년들로 독립군이 편성되고 러시아와 체코제 등의 무기를 구입하여 무장을 갖추게 된 독립군 부대는 수시로 월경하여 일제 기관을 공격하였다. 그 중심에 최진동 부대가 있었다.

만주지역의 항일독립군단체들은 3ㆍ1운동 이후 축적된 무장병력을 바탕으로 1920년에 들어와서 활발한 국내진공유격전을 전개하였다. 일본측의 첩보보고서에 따르면, 1920년 1월 3일까지 독립군에 의한 국내진공작전이 24회 있었는데, 공격지역은 대부분 함북 온성지방이었다.  

상해의 『독립신문』은 1920년 3월부터 6월까지 독립군의 기습대와 전령대가 협동하야 도강하여 벌인 소전투가 총 32회에 달했고, 일본 순경대정탐을 격살하고 일본관서와 순사파출소를 파괴한 것이 34개에 달했다고 한다. 일본관헌은 북간도의 독립군단체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격을 감행하였다"고 보고한 바 있는 최명록(崔明祿, 최진동) 부대가 1920년 3월부터 6월에 걸쳐 국경의 종성군을 공격하였다고 보도했다. (주석 1)
 
 최운산·최진동 형제
 최운산·최진동 형제
ⓒ 최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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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운산 형제들이 추구하는 무장전쟁론의 기본은 국내에서 일본군을 축출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국경을 넘어 일제 관서와 파출소 등을 공격하였다. 일제 정보기관은 "최진동 부대는 조선국내에 대하여 가장 빈번하게 무력침력을 감행한 부대"라고 하였다. (주석 2)
 
독립운동연합부대가 편성되면서 무기구입에 대한 자금이 더욱 시급히 요구되었다. 최운산 형제들이 속한 군무도독부도 많은 금액을 제공했다.

일본측 첩보보고에는 1920년 5월경 북간도의 독립군단들이 총기구입에 충당한 군자금 가운데 간도방면에서 모집하여온 금액은 총 50만 원이었다고 한다. 이를 단체별로 보면, 국민회 17만 원, 군정서 13만 원, 군도독부 6만 원, 의군단 7만 원, 신민단 3만 원, 광복단 4만 원이었다고 한다. (주석 3)

최씨 일가의 살림을 도맡았던 김성녀는 남편과 그 형제들이 독립전쟁에 나서면서 수많은 군사들의 옷을 만들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많은 재산을 투입하였음을 증언한다. 

김성녀 여사는 자경단부터 대한북로독군부까지 수백에서 수천에 이르는 장정들을 먹이고 입히는 큰살림을 혼자 책임졌다. 최운산 3형제가 대한군무도독부와 대규모 통합군단 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면서 온 집안이 군사기지가 되었을 때도 엄청난 규모의 독립군들 뒷바라지를 적극적으로 해내신 분이다.
 
할머니는 독립군의 숫자가 정말 많았다고, 재봉틀을 여러 대 마련해 군복을 지었고, 매번 어마어마한 규모의 식사준비를 해야 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리고 당신이 한 끼에 최고로 많이 밥을 해먹인 독립군의 숫자가 3000명이 넘었다고 하셨다. (주석 4)


최운산 형제들은 1920년 1월 만주의 독립군부대가 통합하여 독립군인의 수가 수천 명에 이르자 석현의 대규모 토지를 5만 원에 매각해 노령에서 무기를 구입하여 통합부대의 모든 독립군들을 완전 무장시켰다. 그리고 국내에 진공하여 왜적의 기관을 습격하였다.

1920년 3월부터 대한군무도독부는 본격적인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했다. 함경북도 온성군 풍리동, 풍교동, 남양동을 비롯 수십 군데 경찰서와 헌병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이때 최운산 장군이 직접 50명~2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뛰어난 사격술로 전화선을 명중시켜 연락을 두절케 한 전과(戰果)가 일본군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최운산 「연보」)

1920년 5월 19일 만주 독립군부대들은 각각의 부대의 이름을 버리고 독립군 통합군단(대한북로독군부)를 창설하면서 서약서에 대한민국의 연호를 사용했다. 


주석
1> 미촌수수(梶村秀樹)ㆍ강덕상 편, 『현대사자료』27, 반병률, 『만주 러시아 지역 항일무장투쟁』, 87쪽. 
2> 국사편찬위원회, 「간도에 있어서의 불령선인단의 상황(1920.10)」, 『한국독립운동사(3)』, 630~631쪽.
3> 미촌수수ㆍ강덕상, 앞의 책, 135쪽, 반병률, 앞의 책, 131쪽.
4> 최성주, 앞의 책, 10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무장독립투사 최운산 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그동안 연구가들의 노력으로 연해주와 서간도의 독립운동은 많이 발굴되고 알려졌지만, 2020년 봉오동ㆍ청산리대첩 100주년을 보내고도 두 대첩에 크게 기여한 최운산 장군 형제들의 역할은 여전히 묻혀진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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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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