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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탁.. 타닥'

워드프로세서 3급 실기 시험장이다. 주어진 시간 20분 안에 문서 하나를 완성해야 한다. 이건 뭔가?

'탓~탁~ 탓~탁~'

나는 독수리 타법이다. 이래서 자격증을 딸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학창 시절 미래에 대한 '꿈'이 막연했다. 차라리 실업계에 진학했다면 좋았을 텐데,  인문계 학교에 다녔다. 고교 졸업 이후 사회생활을 바로 시작했다. 특별한 기술도 없었다. 주방 보조, 세차원, 경마장, 일용직 잡부, 야간 택배 상하차 등 많은 직업을 간접 경험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러 일을 하면서 힘들었지만, 제법 돈도 모았다.

뜨거운 여름 한낮의 열기를 견뎌야 했을 때는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들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나는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 PC와 친해질 겨를이 없었다. 주로 밖에서 일했기 때문도 있었지만, 관심이 많지 않았다. 그렇게 군대를 제대한 이후 10여 년을 외근직으로 회사에 다녔다.

오토바이로 배달을 할 때였다. 수취인이 집에 없어서 전화 통화를 했다. 경비실에 맡겨 달라고 했다.

"네, 고객님 그렇게 해드릴게요." 

작업장으로 복귀를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다음 날 배달 순로를 맞췄다. 퇴근이 늦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경비실에 없는데요?"

약간의 짜증이 섞인 말투였다.

"그럴 리가요. 다시 한번 자세히 보세요."
"없다니까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까 분명 경비실에 맡겼는데 찜찜했다.

밤비가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아파트 경비실에 가서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택배 물건들이 쌓인 곳을 확인했다.

"여기 있네요." 

고객은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쪼르르 가버렸다. 기분이 몹시 상했다. 그 당시 나는 비정규직이었다. 배달 사고가 나면 인사고과에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했다. 해결됐으니 마음이 편했다. 3년 후 시험을 봤고 정규직이 됐다.

사내 내근직 전환 시험 일정 공고가 붙었다. 자격증 3개는 기본이었다. 최종은 필기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부지런히 공부했다.

그러나 워드프로세서 자격증이 문제였다. 나는 마흔 살이었고 컴퓨터 자판과는 거리가 멀었다.

'톡. 탁. 톡. 탁'

손가락이 굳어 내 맘과 같지 않았다. 시험은 얼마 안 남았고 자격증은 꼭 필요했다.

밤늦도록 자판 연습을 하고 또 했다. 마음은 절실하지만, 손이 따라주지 않았다. 애쓰는 모습을 보던 아내가 그랬다.

"나도 시험을 같이 볼까요?"

아내는 결혼 전 출판사에서 교정 일을 했다. 컴퓨터 자판은 영문까지 기가 막히게 잘 쳤다. 자격증은 없었지만, 눈을 감고 쳐도 단 하나의 '오타'가 나오지 않았다. 1급 시험을 봐도 당장 합격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아내와 함께 상공회의소 시험장에 갔다. 주위를 둘러보니 거의 초등학생들이었다. 어른은 나와 아내가 유일했다. 실기 시험을 봤다.

'어떻게 이런 일이...' 빛의 속도로 치는 자판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반은 독수리 타법이었다. 몇 분도 안 돼 시험장 안은 적막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잠시 후 세상의 모든 소리가 사라진 듯했다. 유일하게 내가 치는 자판 소리만 시험장을 울렸다. 주위의 이목이 쏠리기 시작했다.

'저 아저씨가 과연 제시간 안에 문서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인가?'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았지만, 혼자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주눅이 들었다. 몇 칸 앞자리에서 시험을 보던 아내가 나를 돌아봤다. '힘내'라며 주먹을 불끈 쥐며 응원했다. 얼마 후 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둘 다 합격했다. 전업주부가 필요도 없는 자격증을 땄다. 남편을 도와주기 위해 같이 시험을 봤다. 아내가 고마웠다.

내근직 전환 필기시험은 경쟁이 치열했지만, 운이 따라준 덕분에 2등으로 통과됐다. 최종 합격 결과를 아내에게 전했다.

"당신 덕분에 됐네."

아내는 날씨가 안 좋으면 오토바이 타던 남편을 기다리며 노심초사했다. 아내의 걱정을 덜어줘서 좋았다.

그때 아내가 실기 시험장에 없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대부분 5분 안에 끝내는 시험을 20분의 시간을 꽉 채워 시험을 봤다. 긴장됐고 불안했지만, 나는 아내가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금방 안정됐다. 내가 힘들어할 때 그녀는 나를 든든히 지켜줬다. 그래서 내가 자격증을 딸 수 있었다. 평생을 잊지 못할 일이다.

지금, 이 순간 한 마리의 독수리가 날개를 펴고 컴퓨터 자판 앞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닌다. 아내 덕분이다.

덧붙이는 글 | 브런치에 동시 송고 합니다.


태그:#아내, #자격증, #워드프로세스, #시험,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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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찿아가는 가영이 아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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