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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 다산 정약용의 생가
▲ 여유당 다산 정약용의 생가
ⓒ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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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화살은 정약용도 비켜가지 않았다.

회갑을 맞이했을 때에도 그 느낌을 "다시 태어난 것과 같이 하여 한가히 세월을 보내는 일을 그만두고, 아침저녁으로 성찰하는 일에 힘써 하늘이 내려주신 성품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지금 그렇게 살아간다 해도 큰 잘못은 없으리라."(「자찬묘지명」)라고 자부했는데, 70줄을 넘기면서 기운도 떨어지고 병치례도 잦아졌다. 

1832년(71세)부터 육신의 쇠약증세가 심해졌다. 그해 추석에 쓴 「시골의 추석풍경」에서 "쇠하고 병든 이 몸이"라고 적었다.

 맑은 가을 시골에선 즐거움에 들떠있고
 가을 동산 오곡백과 입맛나게 뽐내누나
 등나무, 지붕 호박 잎져서 둥그렇고
 낙엽 지는 산 언덕에 밤송이 입 벌렸네.

 맨 국자로 걸러 뜬 술, 잔치 때에 비할소냐
 시구(詩句) 하나 없어도 시골 이웃 정겨웁다
 슬프고 안타깝다 쇠하고 병든 이 몸이
 금빛 찬란 추석달도 마음에 걸리누나. (주석 1)

 
하피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하피첩.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두 아들 학연(學淵, 1783~1859)과 학유(學遊, 1786~1855)에게 전하고픈 당부의 말을 적은 서첩이다.(사진출처 국립민속박물관)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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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가정사에도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1821년 9월 맏형 정약현이 사망하였다. 정약용에게는 이복형으로, 이벽의 누이와 결혼하여 매부지간이 되었으며, 딸은 황사영과 결혼하였다.

"신유년(51세, 1821년)의 화란에 우리 형제 세 사람이 모두 기괴한 화란에 걸려들어 한 사람은 죽고(약종), 두 사람(약전ㆍ약용)은 귀양가 버렸으나 공은 휑뎅그렁하게 물의의 가운데 들어가지 않고 우리 가문을 보호하고 우리 집안 제사를 이어갔는데 한세상에서 공공연히 칭송하여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였다. 그러나 하나의 목숨을 어쩌지 못하여 마침내 초췌하게 죽어갔으니 오호, 슬프도다."(「선백씨(先伯氏) 정약현 묘지명」) (주석 2)

큰아들 학연은 1807년에 아들 대림을 낳았다. 정약용의 장손이다. 할아버지 사후인 1855년(철종 6년) 식년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둘째 아들 학유는 뒷날 「농가월령가」를 짓고, 『시경(詩經)』에 나오는 생물명을 정리한 『시명다식(詩名多識)』등 저술을 남겼다.
  
사촌서당 복성재(復性齋)라고도 하며 정약전이 소흑산도에서 이곳 사리마을로 옮겨와 세운 서당이다. 아우 정약용이 쓴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가 있다.
▲ 사촌서당 복성재(復性齋)라고도 하며 정약전이 소흑산도에서 이곳 사리마을로 옮겨와 세운 서당이다. 아우 정약용이 쓴 「사촌서실기(沙村書室記)」가 있다.
ⓒ 이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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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노령에도 시 짓기와 저술에 대한 보완작업을 멈추지 않았다. 60세에 『사대고례산보(事大考例刪補)』와 『역학서언(易學緖言)』을 마무리하고, 73세에는 『상서고훈수략(尙書古訓蒐略)』과 『상서자원록(尙書知遠錄)』을 수정하여 『상서고훈(尙書古訓)』으로 합편하고, 『매씨서평』을 개정하였다. 

이즈음 정세를 보면, 1833(순조 33)년 3월 서울에서 쌀 폭동이 일어나고 1836년(헌종 2)년 1월 프랑스 신부 모방(Maubant)이 의주를 거처 서울에 밀입국하였다. 이에 앞서 1827년에는 전라ㆍ경상ㆍ충청에서 천주교 신자 수백 명이 체포되었다.
  
다산의 묘소 정약용과 홍씨 부인의 합장묘
▲ 다산의 묘소 정약용과 홍씨 부인의 합장묘
ⓒ 이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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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년 2월 22일 조선에서는 큰 별이 떨어졌다.

오전 7시~9시 남양주 마재의 여유당에서 정약용이 75세로 눈을 감은 것이다. 우연하게도 부인 풍산 홍씨와 결혼한 지 60주년이 되는 회혼일이었다. 그는 운명하기 3일 전 「회혼시(回婚詩)」를 지었다. 

                   회 혼 시

 60년이 풍륜처럼 돌고 돌아 눈앞에 번득이고
 복숭아꽃 곱게 피던 봄철의 신혼 같네
 생이별 죽어 이별 늙기를 재촉터니
 슬픔 짧고 기쁨 기니 임금님 은덕인가.

 결혼하던 이날 밤 사랑 얘기 다시 좋고
 첫날밤 장옷에 쓴 글씨 아직 남았어라
 갈라지고 다시 만남 나의 숙명이던가
 합근잔 들고 나서 자손에게 물려주리. (주석 3)


정약용은 회갑을 맞은 해에 자신의 사후 상제(喪祭)에 대해 「유명(遺命)」이라는 글을 아들들에게 남겼다. 입관절차ㆍ장례절차ㆍ묘소ㆍ묘비 등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두 아들 학연과 학유는 아버지의 유언의 명령대로 장례를 치렀다. 다산은 벼슬이 통정대부였으니 대부의 예에 따라 사망 3개월째인 4월 1일, 살던 집의 뒷산의 유산(酉山)의 자(子)의 방향, 즉 남쪽을 향해, 자신이 점지해 두었던 곳에 장사지내졌다." (주석 4)

정약용의 현손인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1922년에 완성한 「사암선생연보」에서 증조할아버지의 생애와 업적을 요약 정리하였다.

아! 공(다산)은 처음에 거룩한 임금을 만나 정조 대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경전을 토의하고 학문을 강론하며 먼저 그 바탕을 세우고, 중년에 상고(上古)의 성인들을 경적(經籍)에서 사숙(私淑)하여 아무리 심오한 것도 연찬하지 않은 것이 없고, 아무리 높은 것도 우러르지 않은 것이 없다. 만년에는 대월(對越: 침묵ㆍ묵상)의 공부와 착한 일과 잘못한 일을 숫자로 세어 가며 착한 일의 숫자가 많아지게 하는 행실의 공부에 엄한 태도를 지녔다.… 이미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서 대단한 체하지도 않았고, 이미 노년에 이르렀다고 해서 조금도 해이하지 않았으니, 아! 지극한 덕행(德行)과 성대(盛大)한 학문이 아닌가! (주석 5)


주석
1> 김지용, 앞의 책, 537쪽.
2> 『다산산문선』, 196쪽.
3> 김지용, 앞의 책, 562~563쪽.
4> 박석무, 『다산 정약용평전』, 570쪽.
5> 앞의 책, 572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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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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