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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탁월한 사상가이자 시·서·화에 뛰어난 예술가였던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
ⓒ 다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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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문학사상』은 1976년 10월호에 "새로 찾아낸 다산의 소설소품ㆍ시론ㆍ그림"을 특집으로 꾸미면서 「처녀바람」, 「현진자전(玄眞子傳)」, 「장천용전」, 「김씨부인전」, 「빈사전(貧士傳)」등 5편의 단편 소설을 발굴, 소개하였다. 어느 때 쓴 작품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정약용이 아무리 '백과전서파' 지식인이라 해도 소설까지 지은 것은 놀랍다. 이 잡지는 특집의 후기에서 "지금까지 묻혀있던 그의 시와 시론ㆍ소설ㆍ소품과 함께 그가 그린 그림까지 발굴하여 소개하는 데는 10년 동안 꾸준히 다산을 연구해온 김영호 교수의 공이 컸다."고 밝혔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500여 권의 서책을 형상화한 조형물(왼쪽)과 다산의 정신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는 조형물(오른쪽)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500여 권의 서책을 형상화한 조형물(왼쪽)과 다산의 정신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는 조형물(오른쪽)
▲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500여 권의 서책을 형상화한 조형물(왼쪽)과 다산의 정신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는 조형물(오른쪽) 다산 정약용 선생이 저술한 500여 권의 서책을 형상화한 조형물(왼쪽)과 다산의 정신을 기린 내용을 담고 있는 조형물(오른쪽)
ⓒ 유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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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는 「빈사전」을 소개한다. 전문이다.

           빈 사 전

영암군에 한 빈사가 살고 있었다. 그 빈사의 종은 큰 부자였다. 

하루는 그의 종에게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돈 일천냥을 빌려 주면 내가 당연히 갚아 줄 것이다. 설령 네가 죽는다 할지라도 너는 청귀(淸鬼)가 될 것이 아니냐." 했다. 이 말을 듣고 종이 대답하였다. "오직 명하신 대로 따르겠습니다."

빈사가 다시 말한다.

"귀찮겠지만 네가 나에게 빌려줄 돈 일천냥을 너희 집에 그대로 두어 두어라. 그래서 네가 소금을 구입할 때에는 내 돈으로도 소금을 구입하고 네가 쌀을 구입할 때에는 역시 내 돈으로도 쌀을 구입하여라. 그리하여 네 복대로 돈을 이용하여 나로 하여금 실패하지 않도록 해라." 

종이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로부터 수개월 뒤에 종이 빈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소인은 일천냥으로 소맥을 사들여 누룩을 디디려고 합니다. 어르신네는 어떻게 하시렵니까?" 하였다. 빈사가 대답하였다. 

"네가 구입하는 것을 내 돈으로 구입하도록 해라." 장차 누룩을 디디려고 할 때 종의 집에는 염병이 생겨 수개월 동안 떠나지 않았다. 

종이 빈사께 찾아와 청하기를 "저의 집 사정이 이러하니 청컨대 어르신댁에서 먼저 누룩을 디디도록 하십시오."  했다. 빈사가 그렇게 하라고 허락했다.

그러자 그후 흉년이 크게 들어 밀가루가 좋은 쌀 이상으로 귀하게 되었다. 금주령이 아주 엄하게 내려 술 빚는 사람도 없게 되었다. 종의 집에서는 밀을 팔아 무려 4배나 되는 큰 이익을 보았지만 빈사는 겨우 본전을 갈무리하여 여전히 가난할 뿐이었다. 빈사가 탄식하기를 "이것은 운명이다. 내 다시는 돈 벌이를 꾀하지 않으리라" 했다. 

주역이라고 하는 책은 우발라(優鉢羅) 꽃과 같아 향기가 있고 빛깔이 있고 열매도 있고 뿌리도 있으며 또한 가지도 있고 잎사귀도 있으며 어느 한 곳인들 기묘하지 않은 곳이 없다. 

미천한 학자가 얄팍한 짐작으로 겨우 한 가지의 맛만을 보고 대의가 이곳에 있다고 한다. 그리하여 자기와 의견이 같은 사람은 돕고 의견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여 각각 문호(門戶)를 세는 흉이 많고 사효(四爻)는 두려워함이 많고 오효(五爻)는 공이 많아 저절로. 

이로써 구한다면 통하지 않음이 없다. 효(爻)가 변하지 않았을 때는 원래 그런 상(象)이 있기 때문에 효사(爻詞)에 이런 점이 있는 것이다.

소박의 제을(帝乙)이 누이를 시집보낸다는 것과 부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곧 이것이다. 그 때문에 후세에 와서 효(爻)의 변화에 어두워졌다. 이제 만일 효(爻)의 변화에 있어서 이 봉안에 원래 이런 상(象)이 있음을 알지 못하면 역시 통하지 않는 것이다. (주석 9)


주석
9> 『문학사상』, 49호, 330~331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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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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