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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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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은 23세 때 이벽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듣고 두 형과 함께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았다. 한자로 쓴 『천주실의』 등 각종 서책도 열심히 읽었다. 세례명은 요한(Johane)이었다. 이로 인해 혹독한 탄압을 받고 폐족의 신세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1797년 정조에게 「자명소(自明疏)」를 올려 배교를 분명히 하였고,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 때에도 국청을 받을 때 이미 천주교를 떠났음을 진술하였다. 해서 셋째형은 처형되었는데 그는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배교'가 본심이 아니어서 해배된 후 다시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 3년 후부터 신앙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하였다. 그에게 천주교 진리는 언제나 명백한 것으로 보였다. 그는 항상 외딴 방에 칩거하면서 소수의 친구 밖에는 만나지 않았다. 그는 자주 단식과 그밖의 속죄를 위한 고행을 하였다. 그는 직접 만든 아주 고통을 주는 허리띠를 항상 띠고 있었고 또한 자주 몸의 여러 군데를 작은 쇠사슬로 감았다. 그는 오랫동안 묵상을 하고 묵상한 일부를 적어놓았고, 또 미신을 반박하고 무식한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 여러 가지 책을 저술하였다.

그의 저서 중 일부는 여러 박해 동안 땅속에 숨겨둠으로써 썩어 없어졌다. 그러나 그 중 많은 것이 그의 집안에서 보존되었다. 그는 완전히 복권된 후에도 그의 은둔적 생활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고, 날로 더해가는 그의 신앙심은 그를 아는 모든 신자들을 기쁘게 하였다. 그는 1835년 유방제 빠치피꼬 신부로부터 성사를 받고 사망하였다. 그는 그의 배교의 스캔들을 조선교회 앞에서 그의 좋은 모범으로 보상하였다. (주석 4)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조예가 깊은 최석우 신부는 "다산이 자명소를 올렸고 또 배교한 사실도 잘 알고 있으며 누구보다도 그것을 개탄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다산의 회개를 더할 수 없이 기뻐하였고, 그의 신앙을 더욱 높이 평가하고 있다." (주석 5) 고 배교에서 '회개'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황경한의 묘 천주교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과 그의 부인 정난주(정약용의 조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황경한의 묘
▲ 황경한의 묘 천주교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황사영과 그의 부인 정난주(정약용의 조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황경한의 묘
ⓒ 김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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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으로서의 다산의 신앙생활에는 확실히 파란과 우여곡절이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단계적으로 볼 수 있었다. 다산은 한때 선교에 종사하고 교회일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열렬한 신자였다. 그러나 그는 교회를 멀리하고, 나아가서 신앙까지 배신하였다. 먼저 글로 배신을 밝혔고, 다음 국가의 최고 법정에서 그것을 공언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는 참회하고 이전 신앙생활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공적인 신앙생활이라기 보다는 내적인 신앙생활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마치 사막의 은수사(隱修士)처럼 은둔생활을 하면서 기도와 묵상과 고행에 전념하였다. (주석 6)

반론도 만만치 않는다. 정약용 연구에 조예가 깊은 김상홍 교수는 그가 끝내 회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편다. 

첫째, 다산이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운명하였다는 다블뤼의 기록은 사실과 다르다. 그는 다산이 운명하기 3일 전에 조선을 떠났다.

둘째, 유방제 신부는 사제직을 더럽힌 부도덕한 인물인데, 다산의 자손들이 그에게 종부성사를 받게 했겠는가.

셋째, 다산 연보를 보면 유방제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넷째, 운명하기 3일 전에 쓴 유작 시「회근시」에서 철저한 유교적 삶과 충직한 신하로서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다섯째, 다산의 장례 절차를 그의 유명대로 유교의식으로 거행하였다. (주석 7)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마재성지 마재성지는 다산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의 생가다. 대개 천주교 성지는 순교와 관련된 곳이 많다. 절두산, 새남터, 황새울 등등... 하지만 이 곳은 독특하게도 한 인물의 생가가 성역화 됐다. 그만큼 우리 천주교에서 정약종의 업적과 희생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 곽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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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조목조목 정약용이 회심하지 않고 운명하였다고 주장한 김상홍 교수는 다음과 같이 유학자를 '성인품'에 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끝으로 첨언할 것은 다산의 시성(諡聖)에 관한 문제이다. 천주교측은 1990년 봄, 천주교 전래 초기의 신해사옥과 신유사옥 때 순교한 정약종ㆍ황사영ㆍ주문모 등 98 위(位)를 '성인품(聖人品)'으로 시성해 줄 것을 로마 교황청에 청원하였는데 여기에 다산을 포함시킨 것으로 신문에 보도되었다. 모진 탄압과 고난을 극복하고 초기 교회의 발전에 공헌하고 순교한 분들이 속히 시성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문제는 다산이 과연 '성인품'에 오를 수 있느냐는 것이다. 다산은 배교 이후 철저한 유교주의자로서 일관하며 생을 마쳤다. 다산이 성인으로 시성될 만한 공적과 기적을 남겼는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입증할 증거가 없다. 오히려 다산은 앞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배교 이후 천주교리를 혹독하게 비판하였고, 금정찰방 재직시에는 여신도를 잡아다가 강제로 결혼시키는 등 천주교의 박해와 탄압을 하였다. (주석 8)


주석
4> 다블뤼, 『조선순교사비망기』, 최석우, 「정약용과 천주교의 관계」, 『다산학보』 제5집, 67쪽, 재인용.
5> 최석우, 앞의 책, 68쪽.
6> 앞과 같음.
7> 김상홍, 『다산문학의 재조명』, 121~125쪽, 발췌.
8> 앞의 책, 149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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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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