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다산 정약용 초상화.
 다산 정약용 초상화.
ⓒ 이재형

관련사진보기

 
『목민심서』를 완성하고 여름에 『국조전례고』를 마무리할 즈음에 옛 친구 김이교(金履喬)가 찾아왔다.

29세 때 우상 채제공의 천거로 그와 함께 한림의 후보로 뽑혔고 예문관 검열로 임명되어 한림원에서 같이 일했던 막역한 벗이었다. 그는 김이재의 형이었다. 김이교 역시 노론 계열의 시파였지만 한림원 시절 당파를 초월하여 학문과 우의를 나누었다. 바른 말을 하여 세도가 김조순의 친척이지만 전라도에 유배 왔다가 풀려 서울로 가는 길에 찾아온 것이다.
  
백련사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도 인연을 쌓았다.
▲ 백련사  정약용은 백련사의 혜장선사와 초의선사와도 인연을 쌓았다.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하룻밤을 지새우며 회포를 풀고 다음날 떠나게 되었다. 10리 길을 마중하고 헤어지는 순간 김이교는 신상에 관한 '한 마디'를 기다렸으나 정약용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김이교의 부채에 시 한 수를 써주었다.

 역마을에 가을비 내려 송별이 늦어지나
 누가 다시 이 외딴 곳을 찾아주리오
 반자(班子)는 신선이 될 가망이라도 있지만
 이릉(李陵)은 한나라로 돌아갈 기약이 없네
 규장각에서 붓을 휘날리던 생각을 하면
 경신년 임금님 승하하신 날을 차마 말 못하겠네
 참대 숲에 걸린 기울어지는 달이 밝으니
 그 옛날 궁중 뜨락을 회상하며 눈물 흘리네. (주석 6)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다산초당 정약용 선생이 유배하며 기거하시던 곳
ⓒ 이상명

관련사진보기

 
시 중의 반자는 기전체 역사서인 『한서(漢書)』를 지은 동한(東漢)의 사학자 반고(班固)를 말하고, 이릉(李陵)은 전한(前漢) 시대의 장군으로 흉노에 붙들려가 그곳에서 죽은 인물이다. 사마천이 흉노에 항복한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武帝)의 노여움을 사 궁형을 당한 바로 그 장본인이다.

"김이교는 당시 세도가인 김조순의 친척으로 서울에 올라가서 김조순의 사랑방에 갔을 때, 가을인데도 부채를 펴서 슬슬 부치고 있었다. 이때 김조순이 그 부채에 쓰인 시를 보고 정약용이 지은 시임을 알아보고 안쓰럽게 생각하여 조정에 나가 임금에게 아뢰어 정약용을 풀어주게 하였다고 한다." (주석 7)

이 시는 부채에 쓴 시라 하여「선자시(扇子詩)」라 일컫기도 한다.

이와 같은 일화와는 달리 정작 본인(정약용)은 「자찬묘지명」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무인년(1818) 여름 응교(應敎) 이태순(李泰淳)이 상소하여 "정계가 되었는데도 의금부에서 석방 공문을 보내지 않은 것은 국조(國朝) 이래 아직까지 없던 일입니다. 여기서 파생될 폐단이 얼마나 많을지 알 수가 없는 일입니다."라고 하니까, 정승 남공철(南公轍)이 의금부의 여러 신하들을 꾸짖으니, 판의금(判義禁) 김희순(金羲淳)이 마침내 공문을 보내어 내가 고향으로 풀려 돌아왔으니, 가경(嘉慶) 무인(순조 18, 1818) 9월의 보름날이었다.
 
다산초당의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의 별서 정원으로 강진의 서남쪽 바닷가 가까이 만덕산 중턱에 있다.
▲ 다산초당의 천일각에서 바라본 구강포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의 별서 정원으로 강진의 서남쪽 바닷가 가까이 만덕산 중턱에 있다.
ⓒ 김종길

관련사진보기

 
우연인지, 18년의 귀양살이에서 풀리는 때에도 '18'이 겹친다. 순조 18년은 서력기원 1818년이다. 마흔 하나에 귀양와서 어느새 쉰일곱이 되었다. 중년의 세월을 모두 강진에서 보낸 것이다. 그는 이 기간을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 수용하면서 '다산학' 나아가서 '조선지성' 사를 남겼다. 「자찬묘지명」의 이 대목이다.

나는 해변가로 귀양을 가자 '어린 시절에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20년 동안 속세와 벼슬길에 빠져 옛날 어진 임금들이 나라를 다스렸던 대도(大道)를 알지 못했다. 이제야 겨를을 얻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그때야 혼연스럽게 스스로 기뻐하였다.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가져다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고 밑바탕까지 파내었다.

한(漢)나라 위(魏)나라 이후로부터 명(明)ㆍ청(淸)에 이르기까지 유학사상으로 경전(經典)에 도움이 될 만한 모든 학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고 넓게 고찰하여 잘못되고 그릇되었음을 확정해 놓고는 그런 것 중에서 취사선택하고 나대로의 학설을 마련하여 밝혀놓았다.


주석
6> 최익한, 『실학파와 정다산』, 502쪽.
7> 금장태, 앞의 책, 264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다시 찾는 다산 정약용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무장독립전쟁 위한 준비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