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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딸의 10년 전 고백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딸의 10년 전 고백에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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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아이가 무심히 회상하던 날, 나는 망치로 머리를 크게 얻어맞은 듯했다. 그날은 'N번방' 사건이 화마처럼 덮쳤을 때였다.
  
딸이 초등학교 2학년 때,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친하게 지내던 남자아이 K가 있었다. 아이들끼리 친숙하다 보니 엄마들도 가까이 지냈다. 가끔 서로의 집을 오가며 놀기도 했는데, 그날은 딸이 K의 집으로 놀러 갔던 날이었다.

K의 엄마가 잠시 집을 비우면서 아이들끼리 있게 되었는데, 그때 K가 느닷없이 랩톱(lap top, 휴대형 컴퓨터)을 들고 와 뭔가를 재생시켜 딸아이에게 보라고 권했다. 어린 딸은 역겨운 동영상으로 추측했으나, 아마도 저급한 포르노 동영상 혹은 불법 촬영물이었을 것이다.

보기 싫다는 딸을 자꾸 재촉하던 K는 이번엔 더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반바지를 내리더니 자신의 성기를 딸에게 내밀며 보라고 했다. 너무 늦지 않게 K의 엄마가 집으로 돌아오면서 K의 만행은 거기서 멈출 수 있었다. 참, 기가 막힐 일 아닌가?

이 사건은 지금 벌어진 일이 아니다. 10년 전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는 휴대폰이 거의 모든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대체되고 있던 때였다. 한마디로 언제, 어디서나 아이들이 포르노 혹은 불법 동영상을 볼 수 있게 됐다는 말이다.

게다가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에 접속한 아이들이 이를 원하지 않는 친구들에게까지 전해 문제 되는 사건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에 무분별하게 심취한 아이들은 이를 교실에서 자랑삼아 얘기하거나, 동영상의 성행위 장면을 거리낌 없이 교실에서 재현하기도 했다. 이게 10년 전 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일이다. 이는 딸이 실제로 겪은 일이자 내가 학교 폭력 위원회를 하면서 종종 마주한 사건이기도 했다. 
  
그때는 불법 촬영 동영상의 실체를 모른 채, 엄마들끼리 종종 아이들이 '야동'이라 불리는 포르노를 보는 것에 관용을 베풀어야 하느냐 마느냐로 설전을 벌이기도 했다. 일부 쿨한(?) 엄마들은 '포르노가 아이들의 성교육 일면을 담당할 수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한가한 얘기였다. 'N번방' 사건으로 나라가 발칵 뒤집힌 지금, 그때 그 엄마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딸이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학부모 대상 독서토론 동아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부모에게 아이들의 성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는 화두이기에, 아이들의 성을 다룬 책을 읽고 토론한 날이었다. 토론장의 엄마들, 특히 남아를 둔 엄마들은 놀랍게도 자신의 아들을 매우 순진무구한 무성의 존재로 상정하고 있었다. 이미 초등학생 때부터 포르노나 불법 동영상을 돌려보며 웃었을 일부 아이들을 어떻게 무성의 존재로 생각할 수 있는 걸까?
   
중학교는 부모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성 스토리의 집하장이라고도 볼 수 있다. '패드립'(패륜적 욕설)은 순진할 정도다. 일명 '섹드립'(선정적 농담)은 여학생들이나 여교사를 성적으로 대상화하며 교실에 넘실댔다. 남자아이들의 과도한 성적 대상화에 지겨운 여학생들 극소수가 미러링으로 남학생에게 대항할 뿐, 대다수 여학생은 남학생들의 거침없는 성희롱에 속절없이 당하는 불쾌한 시간을 감내해야 했다.
  
나다움 어린이 책 회수가 안타까운 이유
   
 김병욱 미래통합당이 25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문제 삼은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엄마 인권선언>.
 김병욱 미래통합당이 25일 국회 교육위원회에서 문제 삼은 책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엄마 인권선언>.
ⓒ 노란돼지, 시금치, 담푸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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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되면 필자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독자들은 알아챘을 것이다.

지난 26일, 여성가족부(아래 여가부)는 '나다움 어린이 책' 7종 총 10권을 회수하기로 했다. 나다움 어린이 책은 아이들이 성별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성을 존중하고 '나다움'을 찾아가도록 돕기 위해 여가부가 2018년 12월 시작한 교육문화사업이다.

그러나 '전국 초등학교 5곳에 보급된 성교육 서적 중 일부가 동성애를 조장·미화하고 남녀 간 성관계를 노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김병욱 미래통합당 의원(경북 포항남구울릉군)의 주장을 일부 언론이 자극적으로 기사화되면서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소신 있게 성교육을 추진해야 할 여가부는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하고 맥없이 회수라는 백기를 들고 말았다.

회수 대상 책은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 <아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한 놀랍고도 진실한 이야기> <걸스토크> <엄마는 토끼 아빠는 펭귄 나는 토펭이> <여자 남자, 할 일이 따로 정해져 있을까요> <자꾸 마음이 끌린다면> <우리가족> 등 7종 10권이다.
  
'나다움 어린이 책'이 아이들에게 유해하다고 지적하는 이들은 책이 전달하려고 하는 맥락을 소거한 채, 일부 그림과 사진만을 문제 삼아 책이 마치 도색잡지나 되는 양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당 책들은 덴마크, 스웨덴, 프랑스, 호주, 일본 등 여러 나라에서 1970년대부터 출간되어 아동인권교육 자료로 활용되거나 국제 앰네스티의 추천을 받는 등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도서들이다. 

특히 논란이 된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는 1971년 덴마크의 교사이자 성 연구가인 페리 홀름 크누센이 쓴 책으로, 지금까지 유아동 성교육 자료로 쓰이고 있다. 

해당 책을 몇 해 전 접했을 때, 이렇게 오래 전에 성교육 책이 출판되고 교과서에 실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책이 얼마 전이 아니라 1970년대에 만들어져 보급되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이 책을 문제 삼는 김병욱 의원이나 일부 누리꾼들은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성평등이 기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각성한 덴마크와 같은 나라에선, 한국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성교육 내용을 교실에서 그것도 초등학교 교실에서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쳐왔다.

한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내용을 교실에서 교육해 온 위 나라들에선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덴마크, 스웨덴 등 나라들의 성평등 지수는 한국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고, 성범죄율이 한국에 비해 현격히 낮다. 이 현실은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핀란드 최연소 총리 산나 마린은 동성애 부부의 자식임에도 국민으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으며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 이 놀라운 현실이 함의하는 바는 무엇일까?

성 평등한 세상은 저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르 홀름 크누센, 1971) 책 중 한 장면.
 "아기는 어떻게 태어날까?"(페르 홀름 크누센, 1971) 책 중 한 장면.
ⓒ 김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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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9살 남아에게 당한 성폭력을 덤덤히 말하는 딸에게, 나는 왜 그때 말하지 않았느냐고 묻고 말았다. 딸은 당시 한 번도 상상하지 못한 일이 갑자기 벌어지는 바람에 당황했고, K가 자신을 때린 것은 아니다 보니 말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성폭력 피해는 이런 것이다. 어린아이가 어린아이를 가해할 수 있는 범죄이며, 십 년이 지나서도 잊히지 않는 사건이다. 성폭력이 딸에게 치명적으로 벌어지진 않았지만, 치명적이었다면 돌이키기 어렵다.
  
K는 아마 포르노나 불법 촬영물의 성행위에 노출되었기에 그런 행위를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아이의 의식에 온전한 성교육이 먼저 들어섰다면, K는 이런 행동을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남아를 둔 부모들은 여전히 자기 아이를 "우리 애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라고 보호막을 치려 하겠지만, 진실은 전혀 다르다. 잊지 말자. 아이들은 결코 무성의 존재들이 아니다.
   
무의미한 성교육으로는 어떤 효과도 거둘 수 없음을, 이 나라의 성 불평등 현실이 이미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오직 온전한 조기 성교육만이 그나마 해결의 열쇠를 쥘 뿐이고, '나다움 어린이 책'은 그 도구로 적절하다. 성교육은 더 어릴 때, 더 용기 있고 과감하게 이루어져야만 실효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딸이 캐나다에 잠시 머물 때 다니던 학교에는 화장실마다 생리대와 콘돔이 비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하루는 성교육을 하기 위해 한 강사가 왔는데, 그는 성교육을 '나다움 어린이 책' 이상으로 매우 상세히 진행했을 뿐 아니라, 성폭력의 실태를 생생하게 전달하면서, 성폭력이 당신에게 일어난다고 해도 그것이 절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폭력이 일어날 시 대처 방법까지 면밀히 전달했다고 한다.

성 평등한 세상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 이 '힙'한 성교육 강사는 '퀴어'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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