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건설부장관 시절의 김재규.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2년동안 건설부장관을 역임했다.
 건설부장관 시절의 김재규. 그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2년동안 건설부장관을 역임했다.
ⓒ 국가기록원

관련사진보기

김재규는 1974년 9월 17일 건설부장관으로 입각하였다.

중정 차장에서 9개월만이다. 그가 중정 신직수 부장 체제에서 벗어난 것은 그나마 행운이었다.

"신직수는 1976년 10월, 로비스트 박동선이 미국 의회에 거액의 로비자금을 제공한 사실이 보도됨으로써 시작된 한ㆍ미간의 외교 마찰을 빚은 코리아게이트사건이 발생하고, 중앙정보부 요원 김상근이 미국에 망명한 것을 계기로 그해 12월 3일 경질되었다." (주석 8)

박정희가 그를 건설부장관에 임명한 데는 비화가 전한다.

박정희 씨가 5사단장을 할 때, 김재규 씨는 5사단 참모장을 했는데, 박 사단장은 어느 겨울날 김 참모장에게 하사관학교를 지으라고 명령했다. 김재규 참모장은 날씨가 추워서 흙을 바를 수가 없어 고민하다가 박 사단장에게 황소 한 마리를 보상금으로 달라고 했다. 김재규 참모장은 황소 한 마리로 회식을 베풀어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미제 식기에 숯불을 넣어 이긴 흙이 얼지 않게 해서 다림질하여 흙집을 지었다. 김재규장군의 호위병을 지냈던 이종도 씨에 따르면, 박정희 대통령은 김재규 장군이 5사단 하사관학교를 기발한 아이디어로 지은 사실을 기억해서 그를 건설부장관에 임명했다는 것이다. (주석 9)

그가 입각할 즈음 정치상황은 살얼음판이었다. 1974년 1월 8일 유신헌법에 대한 반대와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호에 이어, 민간인들을 군사법정에서 재판하는 비상군법회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제2호 선포, 4월 3일에는 민청학련사건 발표와 함께 긴급조치 4호를 선포하였다. 하나같이 초헌법적인 권력행사이고 민주인사들을 탄압하고자 조작된 사건이었다.

이와 같은 긴박한 상황에서 8ㆍ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박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재일교포출신 문세광에 의해 저격 피살되고, 8월 23일에는 사쿠라 논쟁을 빚었던 이철승 대신 김영삼이 선명노선을 내걸고 신민당 총재로 당선됨으로써 정가는 더욱 긴장되고 있었다.

경제사정도 어려웠다. 1973년의 오일쇼크로 오일이 배럴당 3달러에서 12달러로 치솟았다. 오일쇼크는 석유 소비를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하는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중화학공업화 드라이브를 추진하는 도중이어서 타격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건설부장관에 기용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2년 3개월 동안의 재임중 중동(中東) 건설수출을 적극 추진, 상당한 실적을 올린다. 

74년 6천 9백만 달러의 중동건설은 그의 재임중인 75년 8억 5천만달러로 격증했다. 중동과 전혀 관련이 없었던 그가 중동시장개척의 선구자가 된 것은 특기할만한 일이다.

어쨌건 당시의 경제난국은 중동건설 진출로 고비를 넘기면서 호황으로 돌아섰는데 그는 장관취임 직후에 "나는 경제도 모르고 오직 총만지는 것만 알고 있다. 우리 경제가 앓고 있는 병의 진원지는 중동이다. 처방도 중동에서 찾아야 한다. 그 곳의 오일달러를 들여올 궁리를 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중동에 착안한 것은 당시 건설업자로 중동에 자주 드나들었던 동생 황규(恒圭) 씨의 권유가 단초를 열었다고 한다. (주석 10)


김재규의 건설부장관 재임 중 중동건설붐이 일어나고 많은 외화와 일자리가 창출되었으며, 중동특수를 타고 현대건설 등이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하였다.

현대건설의 경우 1975년 10월 바레인 아랍수리조선소 건설공사 수주를 시작으로 12월 사우디 해군기지 해상공사를 따냈고, 1976년에는 당시로서는 사상 최대의 건설프로젝트였던 주베일신산업공사를 8억 3000만 달러에 수주하는 개가를 올렸다. 건설장관으로서 큰 업적에 속한다.


주석
8> 앞과 같음.
9> 오성현, 앞의 책, 101쪽.
10> 김대곤, 앞의 책, 128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박정희를 쏘다, 김재규장군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재규 , #김재규장군평전, #신직수, #박정희, #김재규건설부장관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냉전세력 극복하는 길을 찾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