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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외는 '신문사가 긴급한 뉴스를 속보로 전하기 위해 정기 간행 이외에 임시로 발행하는 인쇄물'을 말한다(이하 '호외' 관련 내용은 정운현, <호외로 읽는 한국현대사> 참조).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만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을 때 통감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伊藤公(이토공) 遭難(조난)」이라는 호외를 배포했다. 1961년 5월 16일 조선일보는 호외에 「오늘 새벽 군부 쿠테타」라는 제목을 붙였다.

1986년 11월 17일자 조선일보 호외는 「金日成(김일성) 銃(총) 맞아 被殺(피살)」이라는 '세계적 오보'를 터뜨렸다. 조선일보는 그로부터 8년 지난 1994년 7월 9일 「金日成(김일성) 사망, 북한 중앙방송 사망 34시간 만에 발표」라는 호외를 재차 발행했다.

일본신문, 한일의정서 체결을 '일대 쾌거'로 호외
 
 정운현 저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의 표지
 정운현 저 <호외로 읽는 한국 현대사>의 표지
ⓒ 인문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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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호외가 발간된 때는 1894년 7월 23일이다. 1892년 인천에서 창간된 일본어판 신문 조선신보는 일본군이 경복궁을 급습해 명성황후 정권을 타도하고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옹립한 사건을 '왕성(王城)을 점령했다'라고 표현했다.

일본의 니로쿠신보(二六新報)가 1904년 2월 23일 발행한 호외는 일제의 우리나라 침략사 일부를 상징한다. 이 호외는 「一大(일대) 快報(쾌보) 日韓協約の(일한협약의) 成立(성립), 外交上の(외교상의) 大成功(대성공)」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일본이 한국과의 외교에서 협약을 맺는 대성공을 이루었는데 이는 어마어마하게 기쁜 소식이라는 뜻이다.

발행 날짜로 보아 기사에 등장하는 협약은 2월 22일의 한일 의정서를 가리킨다. 일대쾌보(一大快報)라고 했으니 한일 의정서의 내용이 일본에 크게 유리하다는 뜻이다.
  
"한국 황실 보호를 위해 일본군은 항시 대기 중"

전문이 6개조인 한일 의정서의 핵심은 '제3국의 침략이나 내란으로 대한제국 황실이 위험에 처한 경우 대일본제국은 군사적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한반도의 특정 지역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제 4조이다.

게다가 제 6조에는 '본 협약과 관련되는 미실세조(未悉細條, 본문에 밝히지 않은 세세한 사항)는 대일본제국 대표자와 대한제국 외부 대신 간에 그때그때 협의해서 결정한다(臨機協定)'라고 규정했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대한제국 외부 대신하고만 논의하면 무엇이든 일본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규정한 것이다.

5월 들어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께(任權助)는 한국 외부 대신 이하영(李夏榮)을 압박했다. 하야시는 이하영에게 한일 의정서 제 6조 '미실세조 임기협정' 규정에 따라 새로 18개 조항을 만들어 왔다면서 내밀었다. 그로부터 불과 석 달 뒤인 8월 22일 외부 대신 서리 윤치호(尹致昊)는 하야시의 요구 조항을 담은 '1차 한일 협약서'에 서명했다. 1차 협약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한국 국가 재정의 중요한 일을 일본인 고문에게 일임한다.
외교와 내치, 그리고 중앙행정기관 개선을 위해 일본이 추천하는 고문을 두고 의정부 의결 전에 의견을 들어야 한다.
관찰사청(도청)에도 일본인 참여관을 둔다.
한국 군대의 숫자를 줄이며 훈련은 일본인 교관이 맡는다.
진황지(陳荒地, 개간되지 않은 땅) 개간권을 일본 자본에 준다. * 6월 들어 일본인 나가모리 도키치로長(森藤吉郞)에게 50년 동안 나라 안 모든 미개간지의 개간·정리·개량·척식 권한을 주려는 계획이 추진된다.


1차 협약의 핵심은 대한제국 재정·외교·내치의 중요 사항을 모두 일본인 고문이 결정한다는 점이다. 1차 협약서의 내용은 '한국의 자주 독립권은 을사늑약(1년여 뒤인 1905년 11월 18일의 2차 협약)이 있기 전에 벌써 박탈당하고 말았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한일의정서 체결 이전에 이미 조선은 망국 상태

사실 일제는 8월 22일의 1차 협약, 아니 2월 23일의 한일 의정서 체결 이전부터 이미 온갖 강점을 자행해온 터였다. 그들은 강압·불법 협약조차 맺기 전에 창덕궁(조선 임금이 상주하며 나랏일을 보던 건물)·저경궁(인조가 임금이 되기 전에 살았던 집)·문희묘(정조의 문효세자를 기리는 사당)·환구단(임금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의친왕(고종의 5남)궁, 장악원(음악을 맡아보던 관청)·광제원(국립 병원)·사복시(궁중의 말과 가마를 맡아보던 관청) 등의 관공서를 점거했다.

뿐만 아니라 재동의 기병대·저동의 공병대·서소문의 시위 1대대·통내의 진위 1대대·동궐 앞 친위 3대대 등 군영들과, 그 외 많은 학교들을 제멋대로 군사 주둔지로 삼았고, 용산과 마포 등지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는 그곳을 마구간으로 썼다. 또 교동·사동·전동·박동 등지의 큰 저택들을 무단 탈취해서 자기들의 숙소로 삼았다. '러일전쟁 개전과 함께 우리의 수도 서울은 무법천지 수라장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국가보훈처 <의열 투쟁사>).'

이런 상황에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을 일으켜온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정신(경남 의령 의병박물관 게시물)'이 발현되지 않을 리 없었다.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고, 선비들의 상소가 임금 앞에 쏟아졌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의병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 애족 정신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으로 규정한 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 시대부터 비롯되었다'라고 해설한 안내문을 게시하고 있다.
 경남 의령 의병박물관은 "의병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애국 애족 정신으로 국가의 명령이나 징발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외세에 대항한 민군(民軍)"으로 규정한 뒤 "의병의 전통은 이미 삼국 시대부터 비롯되었다"라고 해설한 안내문을 게시하고 있다.
ⓒ 의병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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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기 때 의병 궐기는 우리만의 전통

구한말 의병에는 단발령과 을미사변 때의 을미의병, 한일 의정서·을사늑약 체결 때의 을사의병, 군대해산 때 의 정미의병이 대표적이다. 1904년 8월 22일 1차 협약 때 일어난 의병은 을사의병의 일부이다.

1904년에 봉기한 민중들은 일본군을 직접 공격하는 과단성을 보여주었다. 평안도 영변에서는 봉기한 민중들이 주둔 일본군을 공격했고, 충청도 공주에서는 진위대 병사들이 주재 일본군과 일본인 상점을 습격했다.

이 시기에는 일진회(一進會)에 대한 공격도 많았다. 평안도 안주의 진위대 병사들이 일진회 지부를 공격하여 다수 회원들을 총살했고, 구성과 태천의 군수도 의병진과 연합하여 일진회 지회를 공격했다. 전라도 옥과 군수 구원모, 김제 군수 서리, 지평 사람 맹일호, 원주 진위대도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여 회원들을 처단했다.

호서의 선비 유인석과 전라도 선비 기호만, 충청도 공주의 유회(儒會, 선비들의 모임), 전주부 이속(吏屬, 하급 직원) 김한수 등도 동조하는 민중을 모아 일진회를 공격, 많은 사상자를 냈다.

1904년 의병들, 일진회 집중 공격

1895년 을미의병 때는 없었던 일진회 처단이 1904년 의병 활동에서 유난히 많이 보이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 질문에 대한 아주 간단한 답은 '일진회가 1904년에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정확한 답은 '침략주의 일제에 붙어서 세력을 펼쳐보려고 저들에게 온갖 충성(?)을 다해오던 일진회(국가보훈처 <의열 투쟁사>)'는 '재정의 대부분을 일본군의 특무 기관이나 통감부로부터 지원을 받아(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운영된 구한말 대표 친일 단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헌병대의 보조원은 거의 일진회원 출신이었고, (일진회는) 뒷날 일제하의 경찰로 성장한 반민족 행위의 선두 부대였다(조동걸 <한말 의병 전쟁>).'

선비들, 상소 써서 임금에게 제출하는 투쟁 전개

선비들의 상소 투쟁도 대단했다. 정기조, 최동식 등 전직 관료들은 물론 박기양·이상설·송규헌 등 현직 관원들도 일제의 요구를 즉각 물리치지 않고 우물쭈물하는 외부 대신의 죄를 통박하였다. 전국에 통문을 돌려 일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반대 투쟁을 독려하던 김기우도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

또 이순범 등은 '우리나라 땅은 8~9할이 미개간이고 논밭은 1~3할밖에 안 되므로 일본인들에게 개간권을 주면 우리 백성들이 더욱 비참하게 살게 될 것이 자명한데, 폐하께서는 왜 매국노들의 머리를 찍어 서울 큰 거리에 매달지 않으십니까?' 하고 임금의 구국 영단을 촉구했지만 받아들여지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법부로 끌려가 국문을 당했다.

그래도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수 만 인파는 보안회(保安會)까지 조직해 연일 종로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보안회를 중심으로 한 민중의 투쟁은 마침내 일본으로 하여금 황무지 개간권 확보를 1908년 동양척식주식회사 설립 때까지 미루게 만들었다. 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려 내기에는 이미 역부족이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기사가 길어서 이하영, 윤치호, 일진회에 관한 내용은 후속으로 싣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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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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