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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의 물성(物性)을 좋아한다. 책을 집어 들었을 때, 엄지와 검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드는 책등의 그립감과 손바닥에서 팔뚝을 지나 어깨에 전해지는 무게감을 좋아한다.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바람이 살랑이는 순간과 그때에 손끝으로 느껴지는 종이의 매끄러운 감촉을 좋아한다.

헌책은 헌책대로 새책은 새책대로 좋지만, 나는 특히 새책의 종이 냄새와 아직 펼쳐진 적 없는 빳빳한 세계를 사랑한다. 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마다 매번 겪어도 언제나 새롭게 좋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이 새로운 설렘을 오래 유지하려고 한다.
 
파주 지혜의 숲
 파주 지혜의 숲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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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기억해두고 싶은 페이지가 있어도 책 모서리를 접는 것을 삼가고 플래그(flag) 포스트잇이나 떼어도 자국이 남지 않는 마스킹 테이프를 이용한다. 밑줄을 긋더라도 볼펜이나 사인펜보다는 지울 수 있는 연필을 사용하고, 뒷장에 자국이 남지 않을 정도의 압력만 가한다.

새책을 집어 들었을 때의 그 깨끗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종이의 질감이 살아있는 깨끗한 책을 쌓아놓고 바라보면, 묘한 뿌듯함을 느낀다. 하나의 완성된 존재로서 책을 아끼게 된다. 물론 이것은 닳도록 보아야 하는 학습서(學習書)를 제외한 경우이고,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문득 그림책 작가 '키티 크라우더'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그녀는 습작을 할 때 그림에서 생명력을 느낄 때가 있다고 한다. 그때가 그녀의 그림책 속 인물들이 생겨나는 순간이다. 그녀는 말한다. 자신이 죽는 날, 자신이 그린 인물들이 그녀를 환영하러 나와줄 것이라고. 그 생각을 하면 뭉클해진다고. 그림책 작가다운 상상력이다.

잠시 그 모습을 그려보았다. 마치 잠자는 백설공주를 일곱 난쟁이가 둘러싸고 있는 모습일까, 아니면 낯선 숲 속 길에서 반가운 이들을 만나는 모습일까. 그림책 속 캐릭터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죽는 날, 내가 읽은 책 속의 여러 단어와 문장들이 나를 감싸안는 상상을 해보았다. 다정한 말과 문장들이 아름다운 화음이 되어 나를 둘러싸기를.

사실 나는 책을 좋아할 뿐 엄청난 독서가는 못된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도 아니라서 완독(完讀)을 하더라도, 책에 담긴 사유를 한 번에 다 껴안기도 버겁다. 그렇지만 재독(再讀)을 할 때마다 이전 독서에서 느낀 감흥과는 다른 의미를 발견하거나, 새로운 생각들이 생겨나는 순간이 좋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나뿐만은 아닌지, 독일의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문학의 건망증이란 부제가 붙은 '...... 그리고 하나의 단편'이란 소설에서, 독서와 망각에 대한 생각을 재미있게 풀어낸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자문한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준 책이 무엇인가에 대해. 그는 어떤 시의 마지막 행을 생각해낸다. 그것은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라는 구절이다. 남자는 다시 생각한다. 그러면 삶을 변화시키는 책이란 무엇인가.

남자는 책장 앞에서 하나의 책을 집어 읽기 시작한다. 책의 문장들은 훌륭하다. 남자는 책에 밑줄을 긋고 그 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고 싶다. 그런데 이미 책에는 밑줄이 그어져 있고, 메모도 적혀있다. 이전에 그 책을 읽은 사람의 흔적이다. 그 순간, 남자는 자각한다. 이전에 그 책을 읽은 사람은 바로 본인 자신임을.

남자는 책장 앞에 서서 한탄한다. 자신이 여태껏 읽은 고전, 역사서, 희곡, 문학책들이 책장에 꽂혀있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아주 일부일 뿐이다. 그렇다면 책을 왜 읽는가. 남자는 곧 변명거리를 생각해낸다. 독서라는 행위는 즉각적이고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이며 서서히 뇌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라고.
 
책 전등
 책 전등
ⓒ 김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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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의 사고(思考)를 의식의 흐름대로 재치 있게 풀어낸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작가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역시, 나의 의식을 서서히 파고든다. 어떤 일들은 그렇다. '독서'와 같이 오랜 축적이 이루어진 후에야 변화가 생긴다. 그래프로 보자면 x와 y축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 오랜 x의 시간 끝에 한 단계 뛰어오른 y라는 결과가 나타나는 식이다.

남자는 망각의 늪에서 책의 내용을 기억하려 애쓰지만, 기억나는 것은 한 가지. '너는 네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란 문구뿐이다. 어쩌면 남자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부수적인 것은 이미 남자의 무의식 속으로 흡수되어, 그의 사고를 서서히 변화시키는 중인지 모른다.

새해가 되었다.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의지가 샘솟는다. 새해, 첫날, 새로운 나이, 시작, 그런 것들에 기대를 걸게 된다. 계획을 세우고 소원도 빈다. 영어공부라든지 운동, 다이어트, 자격증 등등. 의욕이 지나쳐 빠르면 3일, 길면 세 달 안에 계획이 마무리되기도 한다.

소설을 읽고 올해의 나의 마음가짐은 변했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초반에 힘을 빼지 않기로 한다. 변화해야 한다는 사실만 깊이 새기면 된다. 변화하기 위해 부단히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렇다면 언젠가는 그러한 노력들이 아름다운 단어와 훌륭한 문장이 되어 나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나의 마지막을 환영해줄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도.

·사족(蛇足)
그러니 올 한 해는 스스로를 많이 격려하고 응원해주기를. 나의 말과 글로 누군가에게 생채기를 남기지 않기를, 바란다.

태그:#책, #독서, #새해, #파트리크쥐스킨트, #키티크라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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