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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차례 불어닥친 태풍을 견뎌낸 들녘이 누렇게 채색되고 있다. 짙푸르던 나뭇잎도 서서히 색깔을 바꾸고 있다. 가을이 무르익어 찬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한로(寒露)가 8일로 코앞이다.

천변을 걷고 있는데, 하얀 백로 한 마리가 눈앞에서 날아간다. 저만치 왜가리도 보인다.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나는 백로들이다. 문득, 무안 상동마을이 떠오른다. 이른 봄부터 여름까지 때 아닌 눈이라도 내린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곳이다.

백로와 왜가리 떼로 인해 산자락이 온통 하얗게 변하는 '학마을'이다. 전라남도 무안군 무안읍 용월리에 속한다. 서해안고속국도 무안나들목에서 무안읍 방면으로 옛 국도의 오른편에 자리하고 있다. '백로․왜가리 집단 서식지' 입간판을 보고, 논과 논 사이 농로를 따라가서 만난다.
  
 상동마을을 오가는 왜가리. 새들이 지난 여름에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나고 일부만 남아 있다.
 상동마을을 오가는 왜가리. 새들이 지난 여름에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나고 일부만 남아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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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연저수지를 앞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동마을 풍경. 사진 오른편으로 청용산이 자리하고 있다.
 용연저수지를 앞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는 상동마을 풍경. 사진 오른편으로 청용산이 자리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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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마을에 있는 용연저수지와 청용산이 백로와 왜가리의 집단 서식지다. 사람이 사는 마을과 바짝 붙어있는 게 색다르다. 새와 사람이 함께 사는 마을이다. 그만큼 마을사람들이 새들을 지요히 여기며 보살펴준다. 새들의 서식지가 지금껏 유지되고 있는 것도 볼만장만하는 마을사람들 덕분이다.

백로와 왜가리에 대한 마을사람들의 애정이 각별하다. 새들에 해가 될 만한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 새에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의 접근도 막는다. 조금 과장하면,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경음기도 누르지 않는다.

주민들끼리 다툴 일이 생겨도 새들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춘다.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환경보전 생활수칙'에도 백로·왜가리 보호 규정이 들어있다. 마을에서 만난 주민들의 성격도 하나 같이 노글노글하다.

그렇다고 백로와 왜가리가 한없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새들로 인한 주민들의 피해가 상당하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흡사 수백, 수천 마리의 개구리가 한꺼번에 우는 것처럼 크다. 분변의 흔적도 부지기수다. 산림 소유자의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다. 새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청용산은 나주정씨 문중의 것이다.
 
 상동마을 위를 나는 왜가리와 백로. 한데 모여 살던 새들이 떠난 마을이 한적한 농촌마을로 변했다.
 상동마을 위를 나는 왜가리와 백로. 한데 모여 살던 새들이 떠난 마을이 한적한 농촌마을로 변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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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좋게 보는 사람들도 있지. 밤낮없이 시끄럽다고. 먹이를 찾는다고 모 심어놓은 논을 짓이겨놓기도 하고, 분명 피해가 있어. 새들을 쫓아 버리자는 의견도 일부 있긴 헌디, 그러면 쓰간디. 같이 살아야제."

상동마을에서 태어나 여태껏 살고 있다는 김영대(77) 어르신의 말이다. 걱실걱실해 보이는 김 어르신은 "백로와 왜가리가 마을 잘 살아라고 응원하는 것 같다"며 "새들이 마을의 보물"이라고 말했다.

주민들은 새들이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고, 잘 살게 해준다고 믿고 있다. 해마다 찾아드는 백로와 왜가리이지만, 한국전쟁 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고 했다.

백로와 왜가리는 해마다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상동마을로 날아든다. 청용산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다가 7∼8월에 날아간다. 벌써 수십 년째 되풀이 되는 일상이다. 시나브로 백로와 왜가리가 마을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청용산을 배경으로 빈터에서 콩을 훑고 있는 상동마을 주민. 청용산은 지난 여름까지 백로와 왜가리가 한데 모여 살던 곳이다.
 청용산을 배경으로 빈터에서 콩을 훑고 있는 상동마을 주민. 청용산은 지난 여름까지 백로와 왜가리가 한데 모여 살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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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대 어르신이 청용산을 가리키며 백로와 왜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어르신은 철새 예찬론자이다.
 김영대 어르신이 청용산을 가리키며 백로와 왜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 어르신은 철새 예찬론자이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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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연저수지에 연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여름에 시인묵객들을 초청하고 싶어. 백로와 왜가리가 날고 연꽃이 가득한 마을을 보여주고 싶은데, 돈이 없네. 무안군에서 도와주면 좋겄는디, 모르겠어. 내년에는 할 수 있을랑가."

백로와 왜가리가 함께 사는 마을에 대한 김 어르신의 자긍심이 묻어난다. 김 어르신은 지난 9월 무안스포츠파크에서 열린 전남마을이야기박람회에 무안 대표로 나가 상동마을을 소개하고, 당당히 최우수상을 받았다. "백로와 왜가리가 없었다면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며 웃는다.

"특별한 풍경이 없잖아, 여기에. 사람들이 관심 가질 만한 문화유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디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우리 같은 사람 보러 올 리는 없고, 새들 보러 오제. 외지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새들이여. 마을의 이미지도 새들이 있어서 좋아졌고, 친환경 생태마을로 소문도 나고."

김 어르신이 청용산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용연저수지와 어우러지는 상동마을. 저수지 제방의 소나무숲에서 본 풍경이다.
 용연저수지와 어우러지는 상동마을. 저수지 제방의 소나무숲에서 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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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동마을에 사는 한 어르신이 집앞 비닐하우스 옆 텃밭에 마늘을 심고 있다. 어르신도 백로와 왜가리 보호에 남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상동마을에 사는 한 어르신이 집앞 비닐하우스 옆 텃밭에 마늘을 심고 있다. 어르신도 백로와 왜가리 보호에 남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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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동마을이 백로와 왜가리 집단 서식지가 된 것은 1960년대 중반이다. 한국전쟁 이후 뜸하던 백로와 왜가리 수천 마리가 날아들었다. 이후 지금까지 해마다 거르지 않고 찾고 있다. 새들의 서식지는 법적으로도 새들의 땅임을 공인받았다. 1968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법으로 보호받는, 엄연한 새들의 땅이다.

백로와 왜가리는 지금 바다 건너, 멀리 있는 다른 둥지를 찾아 떠나고 없다. 하얗던 청용산도 푸르름을 되찾았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새들은 여기서 겨울을 나며 텃새로 산다. 주관이 뚜렷한 것인지, 고집불통인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평온한 분위기의 상동마을 풍경. 집 마당에 고추가 가득 하다.
 평온한 분위기의 상동마을 풍경. 집 마당에 고추가 가득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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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구슬처럼 생긴 가새잎개머루. 상동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만났다.
 옥구슬처럼 생긴 가새잎개머루. 상동마을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가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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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길을 따라 가붓이 걷는다. 트랙터 한 대가 옛 우물가에서 쉬고 있다. 그 옆 비닐하우스 앞에선 한 어르신이 자투리땅에 마늘을 심고 있다. 빈 터에서 콩을 훑고 있는 노부부한테도 인사를 건넨다. 담장에 걸린 하늘수박과 주렁주렁 걸린 감이 마음까지 넉넉하게 해준다. 옥구슬처럼 생긴 가새잎개머루도 눈길을 끈다. 해질 무렵 마을 골목이 여느 때보다 호젓하다.

상동마을에는 70여 가구 200여 명이 살고 있다. 벼농사를 주로 짓는다. 양파와 마늘, 콩도 재배한다. 마을이 친환경 생태마을로 지정돼 있다. 마을사람들이 담그는 된장, 청국장, 고추장 등 전통 장류의 상표도 '학동네 전통장'으로 쓰고 있다. 백로와 왜가리가 만들어준 친환경 이미지를 함께 팔고 있다.
  
 용연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길. 상동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용연저수지를 둘러싸고 있는 소나무 숲길. 상동마을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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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갯돌에서는 이 마을을 배경으로 한 연극 '학마을 연가'를 공연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닌, 함께 살아가는 생명공동체의 가치를 갖고 있다는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었다. 몇 년 전이었다.

상동마을은 무안을 대표하는 들노래인 '상동들노래'의 태 자리이기도 하다. 들노래는 모찌기, 모심기, 논매기, 풍장 작업을 함께 하면서 불렀다. 영산강 유역 들노래의 특성을 잘 보여주고, 남성 노동요의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전라남도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주민들로 이뤄진 들노래보존회도 유지되고 있다.
  
 장이 담가진 항아리와 어우러진 청용산 풍경. 산자락에 새들이 모여 있으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장이 담가진 항아리와 어우러진 청용산 풍경. 산자락에 새들이 모여 있으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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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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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오마이뉴스 에디터.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은경의 그림책 편지',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를 연재합니다. 2017년 그림책에세이 '하루 11분 그림책 짬짬이 육아'를 출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