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10살 때까지 단칸방에 살았다. 철 대문을 밀고 들어가면 단칸방 네 개가 나란히 있었는데, 그중 두 번째가 우리 집이었다. 현관을 열면 시멘트를 바른 바닥과 연탄불을 뗐던 작은 주방이 나왔다. 방에는 장롱, 티브이, 서랍장 하나가 전부였다.

그 시절의 나는 거실, 식탁, 샤워라는 단어를 몰랐다. 단칸방인 우리 집은 거실과 방의 구분이 없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기에 그 단어들 대신 방, 밥상, 목욕탕을 먼저 배웠다. 그곳에서 엄마는 연탄가스를 마셨고, 아빠는 불같은 성질을 못 이겨 밥그릇을 던졌고, 나는 내복만 입은 채로 울며 엄마에게 맞았다. 다 가난이었다.

제일 안쪽 네 번째 단칸방에 살던 집 주인 아주머니는 작은 구멍가게를 했다. 집 끝 비좁은 통로를 조금 걸어 나가면 그 구멍가게의 뒷문으로 이어졌다. 성인 서너 명이 들어오면 가득 찼던 그 작은 슈퍼가 어린 나에게는 거대한 종합선물상자처럼 느껴졌다. 엄마에게 졸라 딱 한 개만 골라야 했던 보석 반지 모양의 사탕도, 쫀드기도, 폴라포도 가득한 곳이었으니까. 그때 나의 장래 희망은 슈퍼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는 그 구멍가게 아주머니와 매일 수다를 떨었다. 엄마가 오면 말을 받아주느라 동시에 많은 손님을 받기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아주머니는 매일 엄마를 불렀다. 수다를 떨면서도 장사를 할 수 있었고, 장사보다 수다가 재밌었고, 무엇보다 손님이 우르르 몰려오는 경우가 잘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시간에 2천원... 엄마의 아르바이트
 
 .

관련사진보기

어느 날 슈퍼 근처에 건물 공사가 시작됐다. 점심시간이 되면 공사장 일꾼들이 급하게 허기를 채우러 떼 지어 왔다. 빵과 우유를 사 먹고 생라면을 부숴 먹었다. 그러다 한 아저씨가 아주머니에게 돈을 더 낼 테니 라면을 '끓여'달라고 부탁했다. 다음날엔 두 명의 아저씨가, 그다음 날엔 다섯 명의 아저씨가 슈퍼 앞에 쪼그리고 앉아 끓인 라면을 먹었다.

자연스럽게 구멍가게 아주머니는 매일 점심시간마다 라면 장사를 하게 됐다. 졸지에 분식 구멍가게가 되어버린 그곳은 점심 때가 되면 일손이 모자랐다. 누구 한 명은 부엌에서 계속 라면을 끓여야 했고 간간이 손님도 왔기에 혼자서는 동시에 다 하기가 힘들었다.

그 '누구 한 명'의 일을 우리 엄마가 맡게 됐다. 두 시간 동안 라면을 끓여주고 2천 원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매일 계산대에서 바로 꺼내 천 원짜리 두 장으로 주었다. 그러면 엄마는 나를 불러 먹고 싶은 걸 2개 고르라고 했다. 나는 신이 나서 하루는 반지 사탕과 쫀드기를, 하루는 반지 사탕과 폴라포를 골랐다.

내가 맛있게 먹고 있으면 천 원짜리 한 장은 동전 몇 개로 바뀌어 엄마의 손바닥 위에 놓였다. 반지 사탕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다. 먹고 나면 플라스틱 반지가 남아서 더 좋았다. 어느 날은 열심히 모은 반지를 열 손가락에 다 껴 보고는 행복해 죽는 줄 알았다.

엄마는 라면 아르바이트를 하고 나면 손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뜨거운 물이 튄 자국이 남았고, 땀 범벅이 된 티셔츠가 가슴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 자국으로 사탕을, 그 땀으로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을, 그때의 나는 몰랐다. 사탕을 먹고 남는 반지가 탐났고, 달콤하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맛있었을 뿐이었다.

건물이 완공되자 일꾼들은 더 이상 라면을 먹으러 구멍가게에 오지 않았다. 엄마도 라면을 끓이지 않게 됐다. 이제 나는 엄마를 겨우 조르고 졸라 하루는 반지 사탕만, 또 하루는 폴라포만 먹어야 했다. 둘 다 동시에 먹고 싶었는데... 엄마가 다시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끓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내 손가락에 낀 플라스틱 반지는 열심히 모아도 네 개뿐이었다.

집집마다 서린 지긋지긋한 가난

엄마는 가끔 반지 사탕을 빨고 있는 나에게 말했다. 네 아빠 라면도 못 끓여주는데 딴 일꾼들 라면만 끓여준다고. 전날 지긋지긋 하다며 아빠에게 윽박지르던 엄마는 다음날 라면을 끓이며 아빠 걱정을 했다. 아빠는 가끔 밥상 위 그릇을 허공에 집어 던지며 성을 냈다. 그깟 이천 원 벌면서 생색을 낸다고. 하지만 다음날엔 집에 돌아와 그릇 대신 주머니에서 후시딘 연고를 꺼내 던지곤 했다. 다 가난이었고 사랑이었다.

엄마의 말처럼 지긋지긋했던 시간이었을 것이다. 매일 노동을 한다고, 매일 라면을 끓인다고, 나아지지 않는 살림살이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우걱우걱 먹고, 쑥쑥 크고, 휘휘 돌아다녔다. 이천 원. 그게 뭐라고 우리 가족은 서로를 향해 소리치고 한숨 짓고 눈물 흘려야 했을까.

철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 집과 똑같은 단칸방 네 집이 있었다. 하루는 첫 번째 집에서, 하루는 두 번째 우리 집에서, 다음날은 세 번째 집에서, 윽박과 악이 울려 퍼졌다. 그때는 그랬다. 딱 단칸방만큼의 지긋지긋한 가난이 집집마다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필자의 브런치(www.brunch.co.kr/hjl0520)에도 실립니다.


댓글2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000 응원글보기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글을 쓰면 삶의 면역력이 생긴다고 믿습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