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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나를 붙잡은 말들'은 프리랜스 아나운서 임희정씨가 쓰는 '노동으로 나를 길러내신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편집자말]
일이 없는 아버지는 삶이 무료했고 입이 심심했다. 아직 들어오지 않은 딸 방에 들어가 괜히 기웃기웃해 본다. 침대 위 어질러진 옷가지를 정리하고, 책상 아래 쓰레기통도 비우고, 그러다 방 한쪽에 놓인 과자 한 봉지를 본다.

마침 삶도 입도 심심했던 아버지는 그 과자를 뜯어 아그작 아그작 씹어 먹는다. 달달하니 맛있다. 한참을 먹다 보니 과자 한 봉지에 심심한 입은 좀 가셨지만 무료한 삶은 여전히 그대로다. 자신의 하루하루도 이 한 봉지의 과자처럼 씹어 삼켰으면 싶다.

정신없이 과자 한 봉지를 비워내니 아차차! 내가 무슨 짓을 했지 싶다. 다 큰 어른이 딸 과자를 탐했다는 것에 미안하고 부끄러워 부랴부랴 집 앞 슈퍼로 향한다. 그 사이 딸은 집에 들어온다.

방문을 열고 들어가니 아침에 정신없이 허겁지겁 나가느라 어질러졌던 방이 말끔히 정리돼 있고, 가득 찼던 쓰레기통도 비워져 있다. 텅 빈 내 방에서 흔적 없는 아버지의 흔적들을 본다. 아빠가 내 방을 또 치우셨구나. 아빠가 내 쓰레기통을 또 비우셨구나.

아버지는 쓰레기통에 쓰레기가 있는 꼴을 못 본다. 자주 들여다보고 매번 비운다. 일터에서의 성실함은 집안에서의 부지런함으로 이렇게 티가 난다. 그때 마침 아버지가 부랴부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다.

"과자 사 왔다! 아빠가 모르고 먹어서 과자 사 왔다. 이거 먹어라!"

밑도 끝도 없이 나에게 과자 한 봉지를 내미는 아버지. 나는 과자가 없어졌다 말하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과자를 먹었냐 묻지 않았다. 아버지는 왜 과자 앞에서 허겁지겁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 과자는 애초부터 내 과자는 아니었을진대. 그저 내 방에 놓여 있었을 뿐인데. 아버지는 죄인처럼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아버지가 내민 것은 허둥대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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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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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수일 때 한낮의 카페에 앉아 있던 그 기분을 기억한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마다 내가 백수임을 알아채는 것 같았다. 취직한 친구가 "뭐 하냐?"라고 물어오면 아무것도 안 하는데 뭐라도 하는 것처럼 바쁜 척하기도 했다.

출퇴근이 없다는 건 나의 무능을 들키는 일 같았다. 일부러 정장 비슷한 옷을 입고 화장을 공들여 하고 외출한 적도 있었다. 나만 빼고 모두 다 직장인인 듯했다. 갈 곳 없고 할 일 없는 그때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지금 나의 아버지는 그것과 닮은 감정인 걸까? 내가 어느새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손님처럼 느껴졌던 것일까? 나는 한때 이십 대에 직업이 없었던 거지만 이제 앞으로 오랫동안 생업이 없을 일흔의 아버지는 그때 내가 느낀 부끄러움과는 다른, 좀 더 복잡한 마음일 것이다. 나는 청춘이었고 그것은 잠시였지만, 아버지의 청춘은 지났고 그것은 길어질 수도 있으며, 어쩌면 계속될 수도 있을 테니.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기분일 것이다.

과자 한 봉지도 아버지에겐 죄책감이 될 수 있었다. 아버지에겐 그냥 먹는 과자가 아니라 일이 없어 집에 있다 먹는 과자였기 때문이다. 딸 방에 놓인 과자 한 봉지를 먹은 것이 자신 삶의 무료함을 드러낸 것 같아 싫고 부끄러웠던 것일까. 아버지가 내민 것은 과자가 아니라 허둥대는 마음 같았다.

그것이 아닌데. 셀 수도 없이 수많은 과자와 밥을 먹여 딸을 키워냈는데. 딸이 없는 딸 방에서 겨우 그깟 한 봉지의 과자를 먹었다고 쩔쩔매며 조급해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나는 낯설었고, 그 행간이 읽혀 마음이 찌르르했다. 아버지는 자신이 먹은 과자를 딸에게 다시 먹이려고 똑같은 과자를 급하게 사 와야 했다. 먹어야 자식이고 먹여야 부모인 걸까.

아버지가 마음 놓고 심심해 하셨으면 좋겠다. 죄책감 없는 심심함이 가득했으면 좋겠다. 입이 심심할 때, 삶이 무료할 때, 맛있게 과자 한 봉지를 드시고 더 맛있는 과자를 사러 마음 편히 동네를 거닐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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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여행·문화 담당 기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기 위해선 이야기의 힘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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