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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r Organization, ILO) 협약에 대한 비준 문제를 두고 논란이 많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해도 있는 것 같아 몇 가지 문제를 짚어볼까 합니다.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

첫째, ILO를 노동자 단체로 오해하는 문제입니다. 1919년 창설해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ILO는 1차 세계대전의 참화를 수습하고 새로운 국제질서를 만들려는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물입니다. "사회정의 없이 항구적 평화 없다"는 교훈이 ILO 헌장에 새겨져 있습니다. 사회정의의 핵심에 노동문제가 있고 모든 나라의 노사정 3자가 모여 함께 해결하자는 정신 아래 ILO가 만들어졌습니다.

이렇듯 ILO는 노동자단체가 아니라 노사정 3자단체입니다. ILO의 임무는 모든 나라와 모든 사업장에 적용될 수 있는 국제 노동법을 노사정 3자 합의로 만드는 것입니다. ILO가 만든 국제 노동법을 국제노동기준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요즘 듣고 있는 ILO협약이 그것입니다. 
 
 1919년 창설한 국제노동기구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1919년 창설한 국제노동기구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는다
ⓒ I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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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ILO 협약을 노동자를 위한 기준으로 오해하는 문제입니다. 노사정 3자 구성에서 알 수 있듯 노동자만이 아니라 사용자와 정부의 기준이기도 합니다. 노사정 3자 합의의 의미는 이것이 지켜져야 기업-산업-경제의 안정과 평화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최소한의 노동기준을 지키지 않을 때 인류는 전쟁과 혁명을 경험했습니다. 1914~1918년 1차 대전과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이 대표 사례입니다. 전쟁과 혁명의 산물로 ILO가 만들어졌습니다. 

'핵심' 보다 '기본'협약 

셋째, '핵심'협약에 대한 오해입니다. 1919년 가을 워싱턴에서 ILO 출범 총회가 열립니다. 여기서 6개 협약이 만들어집니다. 1호 협약은 일하는 시간을 하루 8시간 주 48시간으로 규제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협약을 정부는 비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루 8시간 주 48시간이 한국의 법과 제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죠. 1호 협약 이후 모두 189개 협약이 만들어지는데 ILO는 이를 3가지 범주로 나눕니다. 기본(fundamental), 거버넌스(governance), 기술(technical) 협약입니다.

핵심협약으로 통용되는 기본협약은 8개, 정부가 우선하여 실행할 정책을 담은 거버넌스 협약은 4개, 노동자 보호를 위한 기술 협약은 177개에 달합니다. 기본협약과 거버넌스협약은 말 그대로 기초를 까는 것입니다. 이를 통과해야 기술협약을 제대로 집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기본협약 비준으로 ILO협약 문제가 끝나는 게 아니라, 진짜 핵심인 기술협약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핵심협약'과 '기본협약'을 혼용하지만, 앞으로는 '기본협약'으로 통칭하는게 바람직합니다.

넷째, 국제'일'기구(International Work Organisation)가 아니라 국제'노동'기구(International Labour Organisation)라는 이름의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 ILO는 노동(labour)을 보호하려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work)을 규제해야 합니다. 1919년 첫 총회에서 만들어진 6개 협약을 살펴보면, 일하는 시간과 야간근무(night work)를 규제하고 여자와 아동을 보호하는 내용들입니다. 일을 규제한다는 것은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불했다는 이유로 일에 대한 지배권과 통제권을 행사하는 자본가를 규제한다는 의미와 같습니다. 

국가와 개인,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 설정

다섯째, ILO기본협약을 노사 간 문제로 오해하는 것입니다. 1930년 만들어진 29호 '강제노동 금지' 협약은 국가에 의한 노예노동을 금지하는 문제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문제가 ILO에서 다뤄지는 이유도 노예노동, 즉 강제노동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노사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개인 간 문제입니다. 

1948년 만들어진 87호 '결사의 자유' 협약은 이 권리를 누릴 주체로 노사 단체를 못 박고 있습니다. 국가의 개입 없이 노사가 자유롭게 단체를 결성하고 운영하면서 알아서 교섭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노사 자치는 시민사회의 핵심 영역이기에 87호 협약은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설정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아동노동의 보호와 남녀평등과 차별 금지를 명시한 다른 기본협약들도 의무 이행의 주체는 국가입니다. ILO기본협약은 노사 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개인과 시민사회의 문제에 간섭하고 개입하면 안 된다는 '자유'민주주의의 기초를 다루고 있습니다. 

여섯째, ILO기본협약 비준을 위해 국회를 통한 입법과 동의가 필요하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헌법을 보면 국제조약의 비준권은 대통령에게 있습니다. 입법사항과 재정 문제가 있을 경우 국회 동의 절차를 밟게 됩니다. 1991년 ILO 가입 이래 정부는 29개 협약을 비준했습니다. 대부분 국회를 통한 입법이나 동의를 받지 않고 이뤄졌습니다. 관료들은 '선(先)입법'이 충분히 이뤄졌기 때문에 국회를 통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5월 22일 청와대 분수대 앞, ILO 핵심협약 즉각 비준 촉구 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이 진행 중이다?
 5월 22일 청와대 분수대 앞, ILO 핵심협약 즉각 비준 촉구 시민사회단체 공동기자회견이 진행 중이다?
ⓒ 참여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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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ILO협약 비준과 실행에 적극 나서야 

대한민국이 비준한 29개 협약에 관련된 법령을 꼼꼼히 살펴보면 협약과 충돌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주 48시간 1호 협약도 비준하지 못한 상황에서 1935년 만들어진 47호 주 40시간 협약을 비준한 바 있습니다. 발암물질 협약이나 화학물질 협약 등 보건안전에서 획기적인 협약들을 비준하였으나 법령은 이 협약들의 정신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전보건과 관련하여 ILO협약들이 가장 강조하는 내용은 노동자들의 정보접근권과 위험 사업장을 이탈할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1971년에 만들어진 135호 '노동자대표 보호 및 편의제공' 협약은 노조 전임자 임금을 노사 자율로 결정하라고 강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노조법에서는 노조 전임자 임금 지급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현행 법령과 기존 관행은 ILO협약 비준에서 국회의 역할은 없으며 행정부의 의지가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국가가 경제발전의 목적을 위해 개인의 노동력을 동원하지 말라는 것인 '강제노동' 협약의 요체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새마을운동은 강제노동의 대표적 사례인데, 그 기원은 1938년 조선총독부의 국가 총동원령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결사의 자유' 협약은 국가가 노사 단체를 비롯한 시민사회의 영역에 개입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렇듯 ILO기본협약은 노사 간 관계 설정이 아니라 국가 대 개인, 국가 대 시민사회의 관계를 설정하는 문제라는 점을 꼭 기억해주시기 바랍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윤효원 님은 참여연대 노동사회위원회 실행위원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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