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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남제일관 정면의 야경
 영남제일관 정면의 야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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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는 긴 역사 속에서 많은 것을 잃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이름을 잃어버렸다. '창씨개명'의 결과였다. 대구의 우리말 이름 '달벌(달구벌)'을 한자 이름 '대구(大丘)'로 개명한 사람은 신라 경덕왕. 재위 16년인 757년에 벌어진 일이다. 경덕왕은 우리나라의 사람 이름과 땅 이름을 중국식으로 창씨개명해야 한다고 믿은 '뼛속까지 친중파'였다(관련 기사 : '대구'의 이름이 자꾸 바뀐 사연).  
대구가 두 번째로 잃어버린 것은 대구읍성이었다.

대구읍성은 프랑스의 유명한 지리학자 샤를 바라(1842∼1893)가 극찬했던 문화유산이다. 그는 1888년 가을에 조선을 여행한 후 귀국해 발표한 <조선기행>을 통해 '대구읍성은 북경성을 축소해 놓은 듯 아름답다'라고 감탄했다.

하지만 대구읍성은 어느 친일파의 손에 철저히 파괴됐다. 조선이 아직 건재하던 시절에 이미 야마모토(山本)라는 일본식 이름을 쓰고, 훗날 박충중양(朴忠重陽)으로 창씨개명한 인물. 바로 박중양(朴重陽)이다.

친일파가 부숴버린 대구읍성

샤를 바라의 <조선여행>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이 가득했다.
 
성문의 정자에서 나는 가을 햇볕 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들이 이마를 맞대고 있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 - 샤를 바라 <조선기행>
    
1906년 10월 당시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였던 박중양은 조정에 공문을 보냈다. 대구직할시 교육위원회가 1988년에 발간한 <우리 고장 대구 - 지명 유래>에는 박중양이 보낸 공문의 일부가 실려 있다. 
 
성벽이 낡아 토석이 곳곳에서 붕괴돼 통행에 지장이 있을 뿐 아니라, 위험하기도 하니 성벽을 철거해 버리면 넓은 5칸 도로가 생기고 길 좌우에 보기 좋게 민가를 지을 수 있으니 대구 부청으로 하여금 주관케 하여 이 공사를 시행케 하고자 보고하오니 허가해 주시기 바라나이다. - 광무
10년 10월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 겸 대구 군수

조정은 박중양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구읍성은 영조대왕이 재위 12년인 1736년에 축성해놓은 국가의 중요 군사 시설인 바, 조정의 철거 허가는 애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박중양은 임의로 대구읍성의 북쪽 성벽부터 부쉈다. 그 후 박중양은 서쪽 성벽, 남쪽 성벽, 동쪽 성벽을 차례차례 모두 헐어버렸다.
 
대구(읍)성의 역사
261년(신라 첨해왕 15) 달성토성 축성
1390년(고려 공양왕 2) 달성토성에 석축 추가 설치
1590년(선조 23) 대구부민과 선선, 군위, 인동 등 3개 읍민들이 대구토성을 축성. 임진왜란 때 완전히 파괴됨. 이 토성은 고성으로 불렸는데, 현재 중구 고성동에 위치한 것으로 비정
1596년(선조 29) 달성토성에 석축을 더 추가하고, 그 안에 경상감영 설치
1736년(영조 12) 대구읍성 쌓음, 5개월 만에 완성. 토성이 아니라 석성(대구 최초의 석성). 높이 5m, 두께 8m, 둘레 2,700m. 영영축성비도 세움
1870년(고종 7) 서구의 침입에 대비한 대원군의 정책에 따라 성을 크게 보수, 8-9개월 걸림. 수성비 세움
1906-1907년, 친일파 박중양이 대구읍성을 부숨

조정은 불허했지만...
 
 대구 동구 망우공원에 새로 세워져 있는 영남제일관(대구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의 모습
 대구 동구 망우공원에 새로 세워져 있는 영남제일관(대구읍성의 정문이자 남문)의 모습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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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외국인이 성내에서 장사를 하는 행위는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그 탓에 일본 상인들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일본 상인들은 박중양에게 청탁해 성벽을 없애버리기로 했고, 박중양은 그들의 청탁을 받아들여 막무가내로 대구읍성을 부쉈다.  

그 무렵 대구에 거주했던 일본인 카와이 아사오(河井朝雄)의 회고록 <대구물어(大邱物語)>에 따르면, 당시 일본인들은 대구읍성 바깥 땅을 대거 소유하고 있었는데, 성벽이 없어지자 그 땅값이 10배 이상 폭등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성벽을 허물고 나서 생긴 평지 중 일부만 도로로 만들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차지해 상권까지 장악했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목적을 달성했다. <우리 고장 대구>의 표현에 따르면, 박중양의 '영단(?)'에 힘입어 대구읍성을 없앤 일본인들의 본래 목적은 '한국의 민족의식을 소멸시키고, 성터의 땅을 자기들이 사용하자'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겉으로는 성을 뜯어 그 자리에 길을 낸다고 하고선 길 폭은 좁히고 남은 땅은 집을 지었다.
 
박중양씨의 (성벽을 부수겠다는) 속뜻을 전해들은 이와세(岩瀨靜), 나타에(中江五郞平), 사이토(齊藤芳造), 이토(伊藤元太郞) 네 사람은 극비리에 한국인과 일본인 인부 60명을 부산에서 고용해 데리고 와서 하루 밤새에 성벽의 이곳저곳을 파괴했다.

그 이튿날 아침이 되니 '치기영 치기영 치기영' 하며 목도꾼들이 큰 돌 작은 돌을 운반하고 있었다. 한인은 원래 어깨로 물건을 지지 않고 등으로 물건을 져 나른다. 여자들은 머리에 무거운 것을 이고 다닌다. 일본인은 어깨로 중량(重量)을 운반하는데 '목도꾼'이라는 특수 노무자가 하는 일을 박 관찰사 서리(박중양)가 이때 처음 보았다고 했다. 무거운 짐을 둘이서 져 나를 때 일본인은 '양찌기 양찌기'라는 소리를 질러 호흡을 맞춘다. 이를 '치기영 치기영'으로 들은 한국인 인부들이었다.

박 관찰사 서리는 몇 곳을 허물어놓으면 수복할 일은 없을 것이고, 시대에 눈떠서 정부에서도 파괴 작업을 계속하도록 해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이 성벽 파괴 작업이야말로 중양씨의 독단으로 감행한 일로 목이 달아날 각오를 하고 대들었던 것이다.  - 카와이 아사오 <대구물어>
 
사방 성벽이 철거되면서 덩달아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대구읍성이 철저하게 훼철됐으니 그 부속 시설들이 덩달아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대우빌딩 뒤편 작은 삼거리에 있던 동장대도 없어졌고(동성로1가 2-2번지, 동성로 81-1 앞), 약전골목 입구 서쪽 입구에 세워져 있는 약령서문 자리의 서장대도 없어졌다(남성로 152-2번지, 서성로 32). 중앙파출소 자리에 있던 남장대도 없어졌다(동성로3가 56-3번지, 중앙대로 382).

동문동 30-10번지(경상감영길 155)에 있던 진동문도 없어졌고, 북성로2가 15-1번지(북성로 50) 바로 앞 도로에 있던 공북문도 없어졌다. 서문로1가 52-1번지(경상감영길 1)에 있던 달서문도 없어졌고, 달서문과 북장대 사이의 서내동 1-26번지(서성로 74-10에 있던 서소문도 없어졌다. 동성로3가 105-7(동성로 12) 인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동소문 역시 없어졌다.

많은 것들이 사라졌다

종로 17번지(남성로 92)에 있던 영남제일문도 없어졌다. 영남제일문은 대구읍성의 남문이자 정문이었다. 그 후 73년이 흐른 1980년, 영남제일관이 다시 지어졌다. '복원'과는 거리가 멀었다. 박진관의 <대구 지오그라피>에 따르면, 누각 2층 문루의 기둥이 6개 5칸이었는데 무슨 까닭에선지 4개 3칸으로 지어졌고, 크기도 원래보다 1.5배나 커졌다. 그것도 본디 있던 자리가 아니라 아무런 연관도 없을 뿐더러 6km나 떨어진 망우공원 안에 세워졌다(수성구 만촌동 산89-4).

경상감영의 남문이자 정문인 관풍루는 일제가 엉뚱한 위치로 옮겨졌다. 새 주소는 달성동 294-1번지(달성공원로 35) 달성공원 안이었다. 이때(1909년) 대구은행 북성로지점 앞(북성로2가 15-1번지, 북성로 50)에 있던 망경루(북장대)도 함께 옮겨졌다. 그러나 세월과 비바람을 이겨내지 못한 두 누각은 1970년에 해체됐다. 그 후 관풍루는 1973에 다시 지어져 대구시 문화재자료 3호의 영광을 누리게 됐지만, 망경루는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뒤에서 본 영남제일관
 뒤에서 본 영남제일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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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동에 있던 달성관도 그 무렵에 철거됐다. 조선 시대 객사인 달성관은 소중한 문화재였지만, 일본인들의 눈에는 그저 도로 개설에 걸림돌이 되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일본인들이 달성관을 뜯어내려 한다는 말이 나돌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객사에 운집해 반대 농성을 하였다. 일본 거류민단 측은 대구 수비대 1개 대대를 동원해 강제로 농성을 해산시킨 다음 끝내 달성관을 허물어버렸다.

이렇게 대구읍성을 무참히 짓밟은 박중양은 그 이후 어떻게 됐을까? 중앙정부의 불허 방침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국가 중요 군사 시설을 무너뜨렸으니 사형됐을까? 그러나 박중양은 처벌은 고사하고 오히려 영전해 1907년에 평안남도 관찰사가 되고, 다시 1908년에는 경상북도 관찰사가 됐다. 이토 히로부미라는 막강한 '빽' 덕분이었다. 사람들은 '박중양이가 이토의 양자라더니 사실인 모양'이라고 수근댔다.

친일파의 승승장구

성벽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신작로가 개설되자 일본인들은 활개를 치고 다녔다. 의열단 이종암 독립지사의 동생 이종범이 집필한 <의열단 부단장 이종암 전>에 따르면, '왜인들이 대낮에 술에 취해 시커먼 옷자락을 허벅지까지 걷어 올려 가지고 비틀거리며 다니는 꼴'이며 '남의 집 안뜨락까지 함부로 들어가 주정을 부리는 꼴'은 일상의 풍경이었다. '걸핏하면 행인을 붙들어 분견소(파출소)로 데리고 가서 땅땅거리는 왜인 순사의 그 악독한 꼴'을 보아야 하는 일은 고통이었다.

그와 반대로, 박중양은 부귀영화와 호의호식을 만끽하며 잘 살았다. 박중양은 조선인이 오를 수 있는 최고위 관직인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총독부가 조선 통치 25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는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 이하 총독부 대관으로부터 역량과 수완이 탁월하다고 인식되고, 비상한 때에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지사급에서는 박중양"이라고 기술됐다.

1945년 4월 일본제국의회가 조선인 7명을 의원으로 임명할 때에도 박중양이 포함됐다. 조선인 중 일본 제국회의 의원에 선임된 자는 35년에 걸쳐 (1945년 4월 조금 전에 선임된 3명을 포함해도) 모두 10명뿐이었다.
 
 망우공원 영남제일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는 '수성비'(왼쪽)와 '축성비'
 망우공원 영남제일관 앞에 옮겨 세워져 있는 "수성비"(왼쪽)와 "축성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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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산
옛날, 금호강과 신천이 만나는 두물머리는 희고 고운 모래밭이었다. 사람들은 그곳을 백사벌(白沙伐)이라 불렀다. 백사벌은 뒷날 발음하기 쉬운 '백사부리'라 되었다.

백사부리 앞 강변의 산 아래에는 빨랫돌砧이 많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산에 침산(砧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 강점기 때 대구읍성을 파괴한 친일파 박중양은 침산을 자기 소유로 만든 뒤 '산봉우리가 다섯 개 있는 산'이라면서 오봉산(五峰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봉산이 본래 침산이었다는 것은 조선 시대 문장가 서거정의 시로도 확인이 된다. 서거정은 <침산에서 바라보는 저녁놀(砧山落照)>이 대구의 10대 경치라고 했다. '물은 서쪽으로 흘러 산머리에 닿고 / 침산은 푸른 숲은 가을 정취 더하네 / 어디선가 저녁 바람 타고 방아소리 들리니 / 황혼에 나그네 시름 더욱 애끓네'

박중양은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대구에 거주했다. 경기도 양주 태생인 그는 대구가 고향도 아니었지만, 일제 강점기 때 자기 개인 소유로 만든 침산에 별장('침산정')을 지어놓고 유유자적 살았다. 친일파들을 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인 이승만 정부의 비호 덕분이었다.

박중양은 1959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공로를 자화자찬해 세운 기념비 일소대(日笑臺)는 해방 후 50년이 지난 1996년까지 남아 있었다. 1996년 8월 15일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는 일소대 앞에 박중양의 친일 행적을 알리는 안내판을 세웠다. 결국 박중양의 후손들은 1996년 10월 11일 일소대를 철거했고, 2007년에는 침산 자체도 국가 재산으로 환수됐다.
 
대구읍성의 흔적을 찾아보는 답사여행

1. 새로 건축된 영남제일관과 그 앞의 영영축성비(대구시 유형문화재 4호) 및 대구부 수성비(대구시 유형문화재 5호) : 수성구 만촌동 산89-4 망우공원 내 소재
2. 영남제일관 터 표지석 : 종로 17번지(남성로 92)
3. 복원된 관풍루(대구시 문화재자료 3호) : 중구 달성동 294-1번지(달성공원로 35) 달성토성(사적 62호) 성벽 위 소재
4. 진동문 터 표지석 : 중구 동문동 30-10번지(경상감영길 155)
5. 달서문 터 표지석 : 중구 서문로1가 52-1번지(경상감영길 1)
6. 대구읍성 성곽의 바닥 흔적 표시 : 북성로 일대
7. 대구읍성의 성곽에 박혀 있던 돌을 볼 수 있는 대표 장소 : 중구 대신동 277-1번지(달성로 35) 계성학교 아담스관(대구시 유형문화재 45호), 중구 대신동 276-2번지(큰장로26길 36-8) 뒤편 옹벽, 중구 동산동 424번지(달구벌대로 2029) 선교사 주택 단지 안 스윗즈 주택(대구시 유형문화재 24호), 중구 달성동 294-1번지(달성공원로 35) 달성공원 입구 및 관풍루 오르막 계단  
 

덧붙이는 글 | '대구 완전 학습'은 대구를 연구하는 독서 단체 구구단의 토론 자료를 바탕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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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소설 의열단><소설 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네트워크부 에디터. "쓰는 일에, 그렇게 해서 당신을 만나는 일에 나는 어느 때보다 욕심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