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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있었다. 시계방을 운영하던 그는 한때 잘나가는 '사장님'이었다. 장사가 잘될 때는 하루 순수익이 100만 원 넘게 날 때도 있었다. 그런데 IMF가 닥쳤다. 사업은 순식간에 기울었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빚을 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고, 빚은 순식간에 눈더미처럼 불어나 3억 5천만원에 이르렀다. 지금도 큰돈이지만 90년대 후반 IMF의 혹한 속에서는 한 사람이 감당하기 힘든 거액이었다.
 
'알바왕' 이종룡이 쓴 '3억 5천만원의 전쟁' 표지
 "알바왕" 이종룡이 쓴 "3억 5천만원의 전쟁" 표지
ⓒ 호랑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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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3억 5천만원의 전쟁>을 쓴 저자 '이종룡'의 사연이다. 이종룡은 사업을 하다 지게 된 빚 3억 5천만 원을 하루 두 시간만 자고, 최대 10개에 이르는 알바를 전전하며 일해 10여년 만에 모두 갚았다. 생활전선에서 그가 벌인 사투는 '전쟁'이라는 단어가 붙어도 지나침이 없다.

MBC 교양프로에서 방영된 저자 이종룡의 얘기는 공중파를 타고 전국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종룡의 놀라운 사연을 알게 된 대중은 그에게 '알바왕'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3억 5천만원의 전쟁>은 '알바왕 이종룡'이 거액의 빚을 지게 된 계기로부터 이를 모두 갚기에 이르는 10여 년의 기간 동안의 경험과 깨달음을 담은 책이다.

알바왕의 일과표

하루 22시간 동안 몇 분간의 자투리 잠을 제외하면, 온통 돈벌이에 할애된 그의 일과는 인생 산전수전 겪었다는 사람들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TV 방영 당시 카메라가 온종일 뒤를 쫓으며 실제임을 검증하였던 그의 하루를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30 - 09:30
떡 배달 준비 및 세 군데 마트에 떡 배송.
09:30 - 11:30
떡 도시락 포장 작업
11:30 - 12:30
한국GM 군산공장 떡 배달
12:30 - 13:00
빈 시간
13:00 - 20:30
태권도 학원 차량 운전
20:30 - 23:30
떡 포장 작업 및 한국GM 군산공장 야간 배달
23:30 - 24:00
빈 시간.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잠을 잔다.
24:00 - 02:00
목욕탕 청소
02:00 - 03:30
배달할 신문에 광고지를 삽입하는 작업.
03:30 - 05:00
신문 배달
05:00 - 06:00
신문 배달이 끝나면 집에 들러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
06:00 - 06:30
빈 시간. 떡 공장으로 이동.


계획표상으론 가능할지 몰라도 사람의 몸으로 실천 가능한 일인지는 믿기 힘든 중노동이다. 기계라고 해도 고장 나거나 멈출 거 같다. 하지만 이종룡은 사람의 몸으로 이 일을 10년간이나 해냈다. 황당무계하게 들리는 사연이라 의심하는 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젠 <3억 5천만원의 전쟁>의 사실 여부를 가리긴 힘들 것 같다. 당사자인 이종룡이 고인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어리석었는가

이 책을 들고 독서모임에 나간 적이 있다. 그리고 이종룡의 놀라운 사연을 한 방에 모인 사람들에게 들려주었다. 대부분의 반응은 잠적하거나 개인파산같은 구제절차에 의지하기 보다는 돈벌어 갚아버리는 길을 택한 그의 삶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단 한 사람의 의견은 달랐다. 콘텐츠 사업을 벌여 평생 먹고 살 만큼의 큰돈을 벌었다는 그 사람은 이종룡의 사연을 두고 놀랍지만 맘 편히 손뼉칠 수만은 없는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본인도 많은 빚을 졌었지만 그랬기에 큰돈을 벌었고, 본인이 아는 사람 중에는 계속 빚을 늘려가면서 수익 없는 사업을 지속하면서도 사치스런 생활을 유지하는 케이스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랜 세월을 중노동에 시달리며 빚을 다 갚아야 했던 이종룡의 사연은 좀 더 생산적이고 쉬운 길을 알려주지 못한 사회의 책임도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3억 5천만원의 전쟁>에서 이종룡은 빚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지금도 빚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잠이 번쩍 깬다. 그런데 사람들을 보면 빚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다. 빚을 얻어 집을 사고, 빚을 얻어 사업을 시작하면서... '갚으면 되지 뭐' 하며 너무 쉽게 생각한다.' (제3장 서두)

'요즘에는 빚을 얻어 집을 사는 사람들이 많다. 집값이 오른다고 너도나도 빚을 얻어 집을 사고는 좋은 집에 앉아 빚 걱정만 한다. 집만 좋으면 무슨 소용인가? 빚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면 집은 편안히 쉬는 장소가 아니라 무거운 족쇄일 뿐이다. 혹시나 집값이 오르지는 않을까하며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빚부터 갚으라고 충고하고 싶다' (제3장 - 빚지면 죽는다 中에서)

 

나는 이종룡이 보이는 빚에 대한 관점이 너무 고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최근에 우리가 경험한 부동산 열풍을 돌이켜보니 더욱 그랬다. 특히 서울 집값은 오늘이 제일 싸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데, 대출을 얹어 집을 사는 것이 어리석다고 보기도 힘들다.

IMF로 망했지만, 새롭게 빚을 끌어다 다시 일어선 사례도 많이 있다. 그러지 못하고 일해서 돈을 다 갚는 방법을 택한 이종룡의 모습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도피 생활을 전전하느라 주민등록마저 말소되고, 신용거래가 불가능했던 이종룡의 처지는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빚과의 전쟁에서 알바왕이 남긴 말

<3억 5천만원의 전쟁>에서 이종룡은 빚을 갚은 비결에 대해, 그저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정리하고, '먼저 돈을 모아야만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말한다. 또한, 책 곳곳에서 돈을 대하는 자세의 중요성에 대해 거듭 강조한다.
 
'하루빨리 빚을 갚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지출부터 줄여야 한다'
'푼돈은 없다. 모든 돈은 다 위대하다'
'돈을 벌고 싶다면 푼돈 부터 아끼고, 빚을 갚고 싶다면 작은 것부터 아껴라... 적은 돈이라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다. 큰 돌탑은 작은 돌들이 모여 이루어진다'
'돈을 쓸 때는 세 번 생각해. 필요한 지출인지 아닌지..... 섣불리 돈 쓰지 않는 것. 그게 가장 훌륭한 소득이 되는거야!'

 

특히, 파트타임으로 큰 빚을 갚은 사람인 만큼 자투리 시간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했다.
 
'사람들은 돈은 아끼면서 정작 시간은 아끼지 않는 것 같다.(중략) 시간은 돈이라는 말도 있는데 왜 그렇게 시간을 낭비하면서 돈돈돈 하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잠을 줄이면 더 많을 일을 할 수 있고, 돈도 더 벌 수 있다. 아침잠 2시간 줄여서 그 시간에 신문을 돌리면 적어도 50만원은 더 벌 수 있다.' (제5장 - 침대는 가장 위험한 장소 中에서)
 

읽는 내내 자신을 돌아보며 따끔한 반성을 느끼게 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갑갑했다. 비합리적인 소비 습관을 못 고치면서 돈이 부족함을 불평해선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침대의 안락함에 대해 단지 위험으로만 치부하며 잠을 줄여 신문을 돌리면서 살아야 한다면 또 그건 뭔가 싶었다.

하지만 <3억 5천만원>의 저자 이종룡은 무조건 돈을 버는 데 시간을 쏟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들에게 좀 더 원하는 일에 대해 진지해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시간은 절대 부족하지 않다. 사라지는 시간을 관리하지 못할 뿐이다.(중략) 빈틈을 찾아라. 찾고 또 찾으면 못 찾을 리 없다.(중략) 직장인이라면 출퇴근할 때 차에서 보내는 30분 동안 어학 공부를 해도 좋을 것이다. 취미 활동도 좋고, 자기 계발도 좋다'
 

그리고 돈도 시간도 결국 습관으로 귀결되는 문제라고 <3억 5천만원의 전쟁>은 말한다.
 
'어린 시절 주위에 문신한 친구들이 꽤 많았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목욕탕에서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살이 찌고 나이가 든 친구의 몸에 남아 있는 문신은 과거보다 훨씬 늘어나고 흉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나쁜 습관이란 이 처럼 몸에 새긴 문신과 같다. 한 번 몸에 새겨지면 끝이다. 평생을 따라다닌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 나쁜 습관 부터 없애라고 말하고 싶다'(제5장 - 나쁜 남자, 나쁜 습관 中에서)
 

다시 시작하지 못한 삶

책의 말미에서 이종룡은 '다시 10년이다'라고 말하며, '앞으로도 흐트러짐 없이 10년을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꿈과 희망을 갖고 다시 달릴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종룡에겐 그의 바람과는 달리 새로운 10년은 주어지지 않았다. 책이 나온 지 불과 5년이 지난 2014년, 대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관련 기사).

나는 아직도 무엇이 정답인지 모르겠다. 몸을 돌보지 않고 일해 돈을 빌려준 사람들에게 보답한 그의 삶은 경이롭고 숭고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좀 더 게으르고 무책임하게 살았으면 또 어땠을까 싶다. 시간이야 더 오래 걸렸겠지만, 그래도 빚은 갚을 수 있었을 테고, 빚을 갚으며 얻은 지식과 경험을 밑천삼아 새로운 삶을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3억 5천만원의 전쟁>은 저자 이종룡의 삶과 죽음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얇은 책이 가지는 두께를 넘어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삶이 그저 의미없게 느껴지고, 더 이상 꿈꿀 희망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있는가? 여기에 하루 24시간을 온 몸을 불사르며 전력투구라는 단어 그대로 살다간 사람이 있다. 삶에 목적을 부여하는 것은 반드시 숭고하고 거창한 일 들만은 아니다. 게을러 나태해졌을 때 다시 꺼내고 싶은 책이다.

태그:#3억5천만원의전쟁, #알바왕이종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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