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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획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다. 이 기획은 반대로 미국외교정책의 특징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문법이 있다는 게 필자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기자말


몇 해 전, 박근혜 정부는 '통일대박론'을 내걸었다. 당시,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서 '대박'을 영어로 '보난자'나 '잭팟'으로 번역해 놓은 걸 본적이 있다. 보난자는 금광맥, 우리말로 노다지를 뜻한다. 박근혜 정부는 남북통일을 마치 미국 개척시대의 엘도라도를 연상케 하는 투기쯤으로 묘사했던 것이다.

정부 주요정책에 대한 이런 식의 표현에 대해 미국인들이라면 어떻게 이해할까? 금을 찾아 헤매든 말든 개인의 자유겠지만 정부 정책을 보난자나 잭팟과 같은 투기행위로 묘사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사고에서는 난센스에 가깝다. 왜냐하면 정부란 '공적 책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국의 대외정책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미국은 독립한 지 250년이 채 안되는 비교적 신생국가에 해당한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미국의 가장 큰 특징은 국가를 누가 만들었는지, 저자가 누군지 분명히 알 수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미국 헌법 첫 줄에 잘 나와 있듯이 'We, the People', 바로 '인민'이다.

미국의 국호는 합중국을 나타내는 '유나이티드 스테이츠'이다. 여기에는 독립적 주들이 연합해 중앙정부를 창설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연방제라는 특정 정치제도가 국가의 이름인 셈이다. 이러한 미국의 건국과정을 사상적으로 가장 잘 표현한 개념이 바로 존 롤스의 '무지의 장막'이다. '무지의 장막'이야 말로 어떤 사전지식도 없이 국가를 만들기 위해 자유롭게 마주섰던 미국인들의 원초적 상태를 잘 보여준다.

독립 당시 미국 시민들은 느슨한 국가형태인 주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주정부는 당시 유럽국가가 보유했던 강력한 집행력을 결여했다. 시민들의 자발적 의사에 따라 구성된 자치적 정치기관이 주정부의 모습이었다. 주 대표자들이 독립 직후인 1787년 필라델피아에 모여 헌법을 제정했다. 미국은 유럽과 같이 절대왕정이 중앙정부를 창설한 게 아니라 시민들이 연합해 국가를 만든 최초의 사례다.

미국 대외정책사를 일별해보면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를 추구해온 미국사회의 발전 양상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는 역사적으로도 잘 확인되는 내용이다. 국가를 막론하고 대외정책의 핵심기구는 외교업무를 전담하는 전문 행정부서와 상비군이다. 이러한 국가기관을 일상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경비가 소요되며, 그 비용은 결국 국민의 세금으로 충당할 수밖에 없다.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세입세출권은 헌법에 따라 국민의 대표자인 하원이 통제했다. 그래서 행정부는 유럽처럼 국방부나 외무성과 같은 대외정책 부서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을 수 없었다.

미국인들이 상비군 유지를 얼마나 불필요한 세금낭비로 간주했냐 하는 것은 19세기 역사에서 잘 드러난다. 국가예산이 황제의 의지에 따라 거반 결정난 거나 다름없었던 러시아, 중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 제국에서 군대의 유지는 국가의 독자적 정책결정 영역이었다. 이에 비례해 국민의 등골이 얼마나 휘어질지는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해 파리에 입성할 당시 러시아가 보유했던 육군이 80만 명이었던 데 반해, 당시 미 육군은 1만6000명에 불과했다(Kennedy, 1989:154). 먼로독트린을 발표한 1823년에도 미 육군은 2만 명이 채 안됐다. 심지어 미국은 남북전쟁이 끝나자 정규육군을 해산하기조차 했다. 1차 대전 직전인 1914년, 러시아 육군이 135만 명, 독일 89만 명, 일본 30만 명이었던 데 비해 미 육군 숫자는 16만 명 수준이었다. 그래서 19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미국은 유럽 열강들에게 2류 국가 취급을 받았다.

고립주의와 아메리카 대륙 헤게모니를 표방한 먼로독트린은 실제로는 유럽에 비해 극단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미국의 군사력 수준을 반영한 고육책이었다. 먼로독트린의 실질적 창안자인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미국정계에서 보기 드물게도 국가이익과 세력균형을 중시하던 현실주의자였다. 영국과의 1812년 전쟁을 종결지은 갠트조약에서 미국 측 수석대표였던 애덤스는 나폴레옹 전쟁의 한 복판인 벨기에 갠트에서 유럽의 정치상황을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유럽 열강들은 구한말의 '삼국간섭'과 같이 신생공화국인 미국에 대해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입할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했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여파로 찢길 대로 찢긴 유럽평화를 복구하는 데 전력을 기울여야 했다. 게다가 대서양 너머까지 해군력을 동원할 수 있는 국가는 영국 밖에 없던 상황에서 애덤스 국무장관은 이때가 미국의 대외정책 노선을 표방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다.

중국인들이 요순시대를 회상하듯이, 미국인들은 위기에 처할 때 마다 좋았던 시절인 워싱턴 대통령의 고별 연설이나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의 연설을 떠올리곤 했다. 이런 경향은 고립주의 이후에 미국의 대외정책을 제국적 팽창주의로 비판한 윌리엄스나 커밍스 등 역사수정주의자들의 관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커밍스가 최근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정책을 높이 평가한 이유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고립주의적 맥락에서였다(<프레시안> 2018.6.15. 참조). 조지 워싱턴은 '대통령직 고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럽의 주된 관심사는 우리와 전혀 상관이 없거나 있다하더라도 아주 먼 관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유럽의 잦은 논쟁거리는 우리의 걱정거리가 아닙니다. 상업관계를 제외하고는 미국이 부자연스럽게 유럽 국가들의 변덕스러운 정치 그리고 복잡하게 얽힌 적과 동맹관계에 연루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은 방어적 자세로 그들과 거리를 둘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두 대양 사이를 건너는 데 감수해야 할 거리와 어려움에 비추어본다면 침략자들은 쉽게 우리를 도발하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유럽과 동맹관계로 얽히게 되면 미국은 행동의 자유를 위협받을 뿐 아니라,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유럽 내부의 갈등에 휘말려 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이 따라야 할 행동의 대원칙은, 상업관계는 늘리되 정치적 관계는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Nordlinger, 1995:50-51).

'먼로독트린'을 설계한 퀸시 애덤스 국무장관은 1821년의 유명한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일련의 '고립주의 신조'를 남겼다.

"자유와 독립의 기준이 펼쳐지면 그곳이 어디든 미국은 환영할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이 파괴해야 할 괴물을 찾기 위해 외국으로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모두의 자유와 독립을 지지합니다. 하지만 미국은 자기 자신만을 변호하며 옹호할 것입니다"(Cumings, 2010;154).

미국 대외정책의 정신사적 관점에 있어 이 두 연설은 굉장히 심대한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퀸시 애덤스가 불간섭, 중립, 비동맹원칙을 표방했음과 동시에 '미국예외주의'도 함께 설파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미국독립선언은 시민정부의 '정당한' 기반을 가진 유일한 국가가 발표한 최초의 엄숙한 선언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새로운 구조의 초석이며, 전 세계를 뒤덮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선언은 정복에 기반 한 모든 정부의 합법성을 단숨에 파괴했습니다. 이 선언은 수 세기 동안 지속된 노예상태의 모든 찌꺼기를 일소해버렸습니다"(Cumings, 2010:154).

'민족자결'과 '집단안전보장'으로 요약되는 14개조 평화원칙을 통해 국제주의를 주창한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역시 자신이 조지 워싱턴과 퀸시 애덤스의 후예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오히려 이와 같은 국제주의 정책을 시행하는 일이야말로 '건국의 아버지들'의 유훈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승발전 하는 것이었음이 명백했다.

"윌슨은 조지 워싱턴이 외부 문제에 연루되는 것을 주의하라고 했을 때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비범한 해석을 내놓았다. 윌슨이 규정한 '외부' 개념은 미국의 초대 대통령이 들었다면 분명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다. 윌슨에 따르면 워싱턴이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는, 미국이 '외부문제' 즉 다른 국가들의 목적에 휩쓸리는 일을 피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류와 연관된 일이 '우리와 동떨어진 일이라거나 우리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일일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미국은 스스로 외부 문제에 제한 없이 개입할 의무를 지닌다는 것이었다.

외부 문제에 연루되지 말라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경고로부터 전 지구적 개입의 의무를 이끌어내고, 중립철학을 정교하게 다듬어 1차 대전에의 개입이 불가피하다는 논리를 만든 그의 능력은 얼마나 특출한 것인가! 더 나은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면서 미국을 전쟁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도록 만들었던 윌슨은 한 세기에 걸친 미국의 칩거를 정당화하는 듯했던 활력과 이상주의를 불러일으켜서 이번에는 미국이 국제적인 활동무대로 들어가도록 만드는 데 사용했다"(Kissinger, 1994:47-48).


그 내용만 놓고 보았을 때, 먼로독트린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사이의 세력균형을 표방한 영국식 현실주의 아류에 가까웠다. 먼로독트린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내용보다는 오히려 형식, 곧 대외정책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식의 새로운 정치문법에 있었다. 유럽과는 결이 확실히 달랐던 독트린 외교, 다시 말해서 외교정책을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형태의 대외정책의 신문법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동시대의 유럽국가들, 특히 영국처럼 변화하는 국제상황에 유연하게 적응할 수 있는 외교정책을 만들어내기보다 외교원칙으로서의 먼로독트린을 표방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이렇게 해야 미국 국민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사를 면밀히 분석하면 미국은 시민의 힘에 의한 국가건설과정 만큼이나 유럽의 그것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문법을 창안했다. 미국 대외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국내정치와 긴밀히 연계해 만들어진다는 데 있다.
 
  1918년 미군 모병 포스터
  1918년 미군 모병 포스터
ⓒ 미군 모병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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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크빌(Tocqueville. 1997:59)은 미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개인들의 평등한 사회조건'을 꼽았다. 이러한 국내정치의 특징이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중시하는 시민의 기질적 요인에 더해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의 강한 연계가 미국 대외정책의 '아비투스Habitus'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개성 강한 국제정치 문법을 낳았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를 아무리 숨기려 해도 숨길 수 없고, 몸짓 하나 만으로도 그 사람이 누구인가를 금방 알 수 있게 해주는 행동거지로 정의했다. 이를테면 사람마다 다른 필체나 독특한 걸음걸이와 같은 것 말이다(Bourdieu, 2006:315). 미국 대외정책의 아비투스란 반복적이며 일관되게 등장하는 미국외교의 행위적 특징을 나타내는 개념으로 주로 일방주의적 성향을 드러낸다. 따라서 그 장점만큼이나 단점 역시 뚜렷한 편이다.

미국 대외정책의 아비투스의 주요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독트린으로 상징되는 외교원칙의 채택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건국 이후 대체로 불간섭, 중립노선을 유지했지만, 역사적으로 획기적인 대외정책을 표방할 때는 먼로독트린, 트루먼독트린, 닉슨독트린과 같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독트린 외교를 선보였다. 미국이 독트린 외교를 채택한 이유는 국내정치적 이유와 거의 동일했다. 건국 초기부터 정당 간 경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국민 다수의 지지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당도 반대할 수 없을 정도의 외교원칙을 공표해야 했다. 정당을 초월하는 초당적 외교라는 말도 여기서 유래한다.

둘째는 군사적 행동주의이다. 이것은 미국만 유독 외교 사안을 군사적 수단을 앞세워 해결하려 했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2차 대전 이후부터 복잡다단한 국제정치 현안을, 군사력을 동원해 해결하려는 양상이 반복되고 두드러져 나타났기 때문이다. 2차대전기의 '무조건 항복론', 한국전쟁기의 '롤백작전', 베트남전쟁에서 무제한 확전을 초래한 통킹만 사건 등이 대표적인 군사적 행동주의 사례에 해당한다.

위의 관점에 입각해서 미국 대외정책의 키워드를 고립주의, 문호개방정책, 국제주의, 봉쇄정책 등 네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미국의 대외정책에 상응하는 한미관계의 키워드는 거중조정, 태프트·가쓰라 밀약, 신탁통치, 한미동맹이다. 다음 호부터 연재할 각각의 글들은 위 여덟 가지 키워드 사이의 조합을 중심으로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미관계의 동태적 변화과정에 대해 분석한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반도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해방 직후에는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 키를 쥔 나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미국은 개항 이래로 지금껏 한반도에만 한정하여 단독의 정책을 수립한 적이 없다. 해방 직후 한반도문제의 해결책으로 미국이 제시한 '신탁통치안' 역시 예외가 아니다. 한반도정책은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했다. 그럴 때조차 중국과 일본을 우선시하는 동아시아정책의 일부로 취급되거나 종속변수였을 따름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반도문제와 결합coupling하거나 아니면 분리decoupling되는 식으로, 일련의 마주침과 헤어짐의 과정을 겪어왔다. 상식적으로는 미국의 대외정책과 한반도정책의 일치, 곧 미국의 강한 개입이 한반도문제 해결에 우호적 상황을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데 역사적 반전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이 점에서 이 기획은 기존 한미관계 가설을 상당부분 뒤집는 '전복적 해석학'에 속한다.

<참고문헌>
Bourdieu, P. 2006. [구별짓기: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상)]. 최종철 옮김. 새물결.
Cumings. B. 2010. Dominion from Sea to Sea: Pacific Ascendancy and American Power.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Kennedy, P. 1989. The Rise and Fall of the Great Powers: Economic Change and Military Conflict from 1500 to 2000. New York: Vintage Books.
Kissinger, H. 1994. Diplomacy. New York: Simon & Schuster.
Nordlinger, E. 1995. Isolationism Reconfigured: American Foreign Policy for a New Century.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Tocqueville, A. 1997. [미국의 민주주의 Ⅰ]. 임효선·박지동 옮김. 한길사.
 <프레시안> 2018.06.15 "브루스 커밍스, 미치광이 트럼프가 옳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no=200486#09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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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대학교 국제관계학부 교수. 정치이론, 한국정치, 국제관계, 한미관계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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