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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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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 are with Europe but not of it."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영국 총리인 윈스턴 처칠이 강조했던 유명한 말이다. 우리는 유럽과 함께 하지만 거기에 속하지는 않는다는 이 말은 유럽에 대한 영국인들의 전통적인 고립주의를 압축적으로 반영한다. 유럽을 등지지 않으면서도 유럽에 완전히 속하지도 않고, 그러면서도 유럽을 자기 뜻대로 움직여 보고 싶어 하는 영국인들의 정서를 담고 있다.

지금뿐 아니라 옛날에도 유럽에는 공동체가 있었다. 국력만 있으면 어느 나라나 황제국을 자처할 수 있었던 동아시아와 달리, 고대 이래로 유럽에서는 로마제국과 그 후계자들만 황제국을 자처할 수 있었다. 그 황제국과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유럽은 오랫동안 공동체적 삶을 유지했다.

유럽에서 로마제국 계승자로 인정됐거나 그렇게 자처한 국가는 서로마제국·동로마제국·프랑크왕국·신성로마제국 그리고 러시아제국이다. 유럽에서는 이 나라들만 황제 칭호를 쓰고 나머지 국가들은 왕 이하의 칭호를 썼다. 그런 식으로 국가 간 질서가 매겨지고 공동체적 양상이 나타났다.

러시아는 이반 3세가 동로마 황제의 조카를 부인으로 맞이했다는 점을 근거로 로마제국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러시아 황제를 가리키는 차르(tsar)도 로마공화정 정치가인 카이사르(시저·Caesar)에서 따온 표현이다.

로마제국 계승자가 유럽에서 정치적 우위를 인정받았다면, 로마교황은 종교적 우위를 인정받았다. 로마제국 계승자는 교황을 떠받들고 교황은 로마제국 계승자를 승인해주는 속에서, 유럽 특히 서유럽은 여타 지역보다 긴밀한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1804년에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로 등극하고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것은 그런 질서의 종막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나폴레옹은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무시하고 프랑스 황제로 즉위했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거행된 황제 대관식에 교황 비오 7세를 초청해놓고 교황보다 뒤늦게 행사장에 나타난 것이나, 교황이 관을 씌워주려 하자 얼른 빼앗아 스스로 쓴 것은 자신의 황제 즉위가 기존 전통을 파괴하는 혁명적 사건임을 보여주는 연출이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파괴되기 이전, 그러니까 유럽이 공동체적 관계를 유지하는 동안에도, 영국은 윈스턴 처칠의 말처럼 '함께 하되 속하지 않는 태도'를 견지했다. 웬만하면 함께 해주지만 손해 볼 성싶으면 얼른 발을 빼겠다는 입장을 유지했다. 이로 인해 영국과 유럽의 관계가 이따금 심각한 파열음을 내곤 했다.

조선 중종 때인 1534년이었다. 영국왕 헨리 8세는 남자 후계자를 얻을 목적으로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고 궁녀 앤 블린과 결혼하고자 했다. 하지만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이혼을 반대하자, 헨리 8세는 유럽과의 결별, 즉 1534년 판 브렉시트를 단행했다. 영국왕을 영국 교회 수장으로 규정하는 수장령을 공포해, 교황과 손을 끊고 신성로마제국과도 선을 그었다.

발을 뺄까 말까... 영국의 오래된 고민
 
 헨리 8세.
 헨리 8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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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비슷한 일이 현대에도 있었다. 유럽은 1951년 4월 18일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 설립조약 체결로 통합 작업의 성과를 낸 뒤, 그걸 기반으로 1957년 3월 25일 유럽경제공동체(EEC) 및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설립 조약을 체결하고 1967년 7월 1일 유럽공동체(EC)를 창설했다. 이 과정을 거쳐 유럽 경제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본 뒤인 1973년에 가서야 영국은 뒤늦게 EC에 가입했다.

하지만 가입하자마자 오일 쇼크로 세계 경제가 어려워지고 EC로부터 얻을 게 별로 없다고 판단되자, 1975년에 해럴드 윌슨 총리가 이끄는 노동당 정부는 EC 잔류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때는 67.2%가 잔류를 택했다. 이처럼 지금뿐 아니고 과거에도 영국은 '함께 할까 말까, 발을 뺄까 말까'로 항상 고민했고, 이로 인해 유럽과의 사이에서 항상 갈등을 노정해야 했다.

오늘날의 영국인들이 브렉시트 쪽으로 눈길을 돌리는 데는, 위와 같이 과거에도 그렇게 한 적이 있을 뿐 아니라 그걸 통해서 이익을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헨리 8세가 수장령을 통해 자국과 유럽을 분리한 뒤, 영국은 국운의 상승 무드를 탔다. 수장령 이후 곧바로 그리된 것은 아니지만, 유럽의 굴레를 벗은 뒤로 영국은 대영제국을 향해 점차 나아갔다.

1588년에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고 유럽의 해상무역권을 장악했다. 이를 발판으로 세계 각지로 세력을 뻗어 나가다가 1840년 아편전쟁 때는 동아시아 최강 청나라를 꺾고 동서를 아우르는 세계 최강이 됐다. 유럽의 공동체와 분리된 동안에 유럽 최강이 되고 세계 최강이 됐던 것이다. 1534년판 브렉시트가 영국을 새로운 것에 도전하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안문석 전북대 교수의 논문 '브렉시트의 근원은 영국의 고립주의'에 이렇게 설명돼 있다.
 
"수장령으로 영국은 유럽대륙과 결정적으로 멀어졌다. 교황과도 신성로마제국 황제와도 견원지간이 되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은 대규모 선박을 건조해 해상무역을 확대하고 해군을 강화했다. 유럽대륙 이외 다른 대륙과 교역을 확대한 것이다."
-2016년에 인물과사상사가 발행한 <인물과 사상> 제220호에 수록.
 
영국은 유럽과 떨어져 있을 때 잘된 것은 물론이고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상까지 구축했다. 그러니 유럽과의 공동체적 관계가 무익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판을 깨고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고립주의가 영국의 도피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영국이 브렉시트로 기울게 된 데는 또 다른 사정이 있다. 유럽연합 회원국이기 때문에 난민 문제 및 분담금 문제의 부담을 져야 한다는 점 외에 또 다른 요인이 작용하고 있다.

만약 영국이 유럽연합을 주도해왔다면, 굳이 브렉시트를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는 것은 유럽연합 틀 안에서 프랑스 및 독일과 경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국이 브렉시트를 하는 저변의 동기는, 이 나라가 유럽대륙의 질서를 주도하지 못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에서 찾을 필요가 있다.

고전적 의미의 유럽 공동체는 나폴레옹의 황제 등극과 신성로마제국 해체를 계기로 와해됐다. 그렇게 무너진 공동체를 복구하기 위한 유럽 국가들의 노력이 제2차 대전 뒤에 진행됐다. 영국은 제2차 대전 승전국인 데다가, 최초의 핵보유국인 미국과 동맹국이다. 그래서 유럽의 공동체 복구 작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할 만한 역량과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영국은 그것을 살리지 못했다. 공동시장 형성을 위한 유럽 통합에 참여하기를 주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내부의 판단을 신종훈 경상대 교수의 논문 '브렉시트와 유럽통합 - EEC 창설기부터 브렉시트까지 영국의 유럽 정치'는 이렇게 설명한다.
 
"만약 공동시장에 영국이 가입하게 된다면 영국은 불가피하게 자국의 대외 관세자율권의 제한을 감수해야 하지만, 영국 외교정책의 세 범주 가운데 중요성이 가장 적다고 간주되었던 유럽을 위해 영국 경제주권의 일부를 포기한다는 것은 세계 대국의 지위에 걸맞지 않다는 것이 외무부의 판단이었다."
-2017년에 서강대 국제지역문화원이 발행한 <통합유럽연구> 제8권 제2집에 수록.
 
'영국 외교정책의 세 범주'라는 것은 윈스턴 처칠이 말한 '영국 외교 3대 범주론'에서 나온 말이다. 처칠은 영국의 미래를 결정할 때 (1) 대영제국 및 영연방 (2) 영어권 세계 (3) 유럽대륙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제2차 대전 직후의 영국은 셋 중에서 유럽대륙을 상대적으로 경시했다. 그런 유럽을 위해 경제주권을 일부나마 포기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정서가 영국 정부를 지배했다. 이런 정서가 유럽 통합에 대한 영국의 참여를 저해한 요인 중 하나였다.

그에 더해, 영국의 참여를 저해한 보다 더 결정적인 요인이 있다. 처칠이 말한 3대 범주 중 하나인 영연방의 존재다.

영연방은, 제1차 대전 뒤에 민족자결주의가 유행하자 영국이 식민지들을 묶어둘 목적으로 고안한 개념이다. 이 영연방에 대해, 영국은 제2차 대전 직후에 상당한 기대감을 가졌다. 껄끄러운 유럽대륙과의 공동시장 형성보다는 옛 식민지였던 영연방과의 경제 교류가 영국의 미래에 더 이로울 거라 판단했다. 박지향 서울대 교수의 <클래식 영국사>에 이런 말이 있다.
 
"식민지의 민족주의적 추세를 간파한 영국은 1926년 영연방이라는 개념을 공식적으로 규정했다. 동등한 지위를 누리는 제국의 자치령들이 자유롭게 형성한 연합체인 연방은 웨스터민스터법(1931년)에 의해 권위를 부여받았고, 1945년 이후 독립된 식민지들이 가입함으로써 규모가 커졌다. 영국은 식민지 해방 후에도 영연방을 통해서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다."

여전히 남아있는 '대영제국'에 대한 향수
 
 현재의 영연방 회원국들.
 현재의 영연방 회원국들.
ⓒ 영연방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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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은 과거의 착취 대상이었던 식민지들을 영연방으로 묶어놓으면 제2차 대전 후에도 대영제국의 영광을 이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식민지배에 원한을 품은 나라들이 자국에 도움이 되리라 믿었던 것이다. 근거가 상당히 불충분한 이런 믿음 때문에 영국은 유럽통합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견지했다.

그러다가 영연방과의 관계에서 경제적 이익이 별로 발생하지 않자, 영국은 뒤늦게 유럽대륙으로 고개를 돌려 1961년에 EEC 가입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프랑스 샤를르 드골 대통령(재임 1959~1969년)의 견제로 가입이 되지 않다가, EC가 창설되고 드골이 물러난 뒤인 1973년에야 비로소 가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때는 영국이 EC 주도권을 차지할 수 없는 때였다. 프랑스가 주도하는 공동체에서 영국의 입지는 매우 협소했다. 유럽공동체(EC)가 유럽연합(EU)으로 바뀐 1991년 이후에는 독일이 프랑스와 비슷하거나 우월한 입지를 구축했다. 영국의 자리는 더욱 더 협소해졌다.

약소국도 아니고 강대국이 지역 공동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다 보니 다른 회원국들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고, 이것이 결국 지금의 브렉시트로 이어지게 됐다. 대영제국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영연방에 대한 미련을 좀더 일찍 버리지 못한 것이 영국의 유럽 통합 참여를 더디게 하고 그것이 오늘날의 사태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영국 내부에 찬반 논의가 있을 뿐 아니라 유럽과 단절되고는 살 수 없으므로 향후 영국의 정권 교체 여하에 따라 유럽연합에 대한 입장이 바뀔 여지가 없지 않지만, 영국이 'We are with Europe but not of it'이란 입장을 가지고 있는 한 유럽대륙에 대한 영국의 주저함은 앞으로도 이따금씩 재현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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