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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은 촛불혁명의 승리로 우리 사회 민주화의 새로운 전기를 맞은 해이고, 올해 2019년은 3·1혁명(3·1운동) 100주년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여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깊은 서울 동작구를 「동작 민주올레」라는 이름으로 구석구석 탐방하면서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탐방은 총 여섯 개 길(대방길,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 상도길, 현충원길)로 나누어 진행하며, 코스별로 6-7회에 걸쳐 연재한다. <대방길>과 <노량진길>, <흑석길>, <신대방길>에 이어, 이번에는 <상도길>이다. - 기자말

▶ 코스안내 : ①숭실대학교 - ②박영준·신순호 집 터 - ③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과 사저 - ④상도동 철거투쟁의 현장 - ⑤현대판 송덕비 <동작을 빛낸 인물> - ⑥복개천(상도천, 대방천) - ⑦장승배기 장승 - ⑧원충연 반정부음모 사건과 우덕주 대령 
  
숭실대학교 숭실대 옛 정문 입구의 표석은 1897년에 시작된 숭실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 숭실대학교 숭실대 옛 정문 입구의 표석은 1897년에 시작된 숭실의 역사를 잘 보여주고 있다.
ⓒ 김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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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도동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은 반독재민주화운동의 한 흐름을 형성했던 상도동계의 수장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상도동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저와 김영삼대통령기념도서관이 있다.

하지만 올해가 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상도동에 있는 숭실대를 먼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최초의 4년제 대학으로 기록되고 있는 숭실대는 비록 평양 시절이지만,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학교이다.

숭실대가 1957년 상도동에 새롭게 자리 잡은 후에는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4·19혁명 이래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그 이름을 드날렸다.

숭실대가 동작 민주올레 '상도길'의 첫 번째 코스로 배치될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

숭실대의 역사는 1897년 평양의 숭실학당에서 시작된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파견된 배위량(W. M. Baird) 박사가 1897년 10월 10일 평양에서 뜻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자신의 사랑방에 중학과정을 개설하면서부터이다. 대학부가 설치된 것은 1906년부터인데, 숭실전문 시절인 1938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면서 폐교될 때까지 숭실의 역사는 평양에서 계속되었다.

이 기간 숭실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다.

1911년 발생한 105인 사건(신민회 사건)에서부터 나중에 임시정부에서 일한 차리석(1881-1945)을 비롯하여 김두화, 길진형, 변인서 등 다수의 졸업생과 재학생, 교수 등이 관련되어 수난을 당하는데, 신민회는 안창호, 신채호, 양기탁, 이동휘 등이 1907년 군주정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꿈꾸면서 결성한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숭실에는 3·1혁명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조선독립청년단과 조선국민회 같은 비밀결사조직이 있었다. 조선독립청년단은 숭실학교 출신 장일환(1886-1918)이 1914년 평양에서 숭실학교와 평양신학교 재학생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한 독립운동단체로 <청년단지>를 발행하면서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후 미국 하와이로 건너가 미주국민회를 이끌던 무장투쟁론자 박용만과 항일투쟁의 방안을 협의하고 돌아온 장일환은 1917년 서광조·강석봉 등과 함께 이보식의 집에서 배민수, 백세빈, 김형직을 비롯한 30여 명으로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국민보>를 발행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햐였다. 조선국민회의 멤버 중에는 서기 겸 통신원을 맡았던 배민수를 비롯하여 이보식, 이수현, 노덕순 등 숭실 출신이 많았다. ('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장일환/ 배민수 편 참조)

장일환은 조선국민회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된 후 가혹한 고문으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조선국민회 멤버 중 숭실중학을 중퇴한 김형직은 북한 김일성의 아버지이다.

3·1혁명 당시 숭실의 활약상은 눈부셨다. 숭실은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이었던 김창준을 배출하였고, 숭실 출신 저명한 독립운동가 조만식은 평양지역의 주요 인물이었다.

3·1혁명으로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른 조만식은 1920년대 조산물산장려운동, 민립대학건립운동에 앞장섰고,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남지회장도 지낸 인물이다. 조만식은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숭실대 안에는 이런 독립운동가 조만식을 기리는 조만식기념관이 있다.

1919년 3월 4일 숭실대학, 숭실중학, 숭의여학교, 광성고등, 관립평양고보 등 학생들이 서로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일으킨 대대적인 만세운동 때는 숭실의 전교생이 학교 안팎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3월 1일의 만세운동 직후 평양에서 등사판 인쇄물로 발행된 <독립신문>은 조선국민회 출신으로 당시 숭실대생이던 이보식의 손때가 묻어 있었다. <독립신문>이 인쇄된 장소는 당시 숭실학교 교장이던 마포삼열(샤무엘 모펫)의 비서를 겸하고 있던 숭실중 출신 이겸호의 집이었다. 마포삼열과 선교사 마우리는 3·1운동에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3·1혁명 당시 서울에서 학생대표의 한 사람으로 3월 1일과 5일 두 차례의 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활약을 펼친 김원벽(당시 연희전문 3년)도 숭실대학 졸업생이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다보면 있는 정동교회의 목사 출신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2대 임시의정원 의장을 지낸 손정도 목사도 숭실 출신이다.

일제 경찰이 숭실을 가리켜 "불령선인(不逞鮮人)의 소굴"이라고 했다는 말은 다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숭실대 조만식기념관 1층 로비 숭실대 조만식기념관 1층 로비에는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숭실 출신 독립운동가 조만식 관련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 숭실대 조만식기념관 1층 로비 숭실대 조만식기념관 1층 로비에는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숭실 출신 독립운동가 조만식 관련 내용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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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에서 숭실의 역사를 만나다

이러한 숭실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옛 정문 입구에 있는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3층의 '숭실 역사실'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숭실 역사실'에는 평양 시절의 숭실대 교정 모형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의 역사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삼숭(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의여학교)의 폐교 소식을 담은 당시 신문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숭실이 낳은 독립운동가와 문인, 성직자 등도 소개하고 있다.

숭실대 한국기독교박물관 '근대민족운동사실'에는 근대 민족운동의 역사에 빛나는 소중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안중근 의사의 유묵 3점, 기미독립선언서, 숭실학교에서 3·1혁명 당시 사용한 태극기, 민족대표 48인 판결문,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언서 등을 비롯하여 1929년 광주학생운동 사건 관련 자료, 해방직후 백범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이 한마디씩 적은 <재유기념첩> 등은 독립운동의 역사에서 뚜렷한 의미를 갖는 소중한 자료이다.

숭실대생들,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선봉에 서다

1938년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된 숭실대는 1954년 영락교회에서 재건되었다. 이때 재단이사장은 조선국민회 멤버였던 배민수, 학장은 목사 한경직이었다. 현 상도동에 교사를 신축하며 자리 잡은 것은 1957년이다.

이후 숭실대는 반독재 민주화운동의 역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한다. 4·19혁명과 한일회담반대운동, 6·8부정선거규탄투쟁과 삼선개헌반대투쟁, 반유신투쟁을 비롯한 1960~1970년대 민주화운동은 물론, 80년 서울의 봄, 6월 민주항쟁 등 80년대 민주화운동에서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다.

우선 이승만 독재정권의 3·15부정선거에 맞서 일어난 1960년의 4·19혁명 때, 숭실대 학생들도 시위에 적극 참여한다. 당시 숭실대는 5개 과에 학생 수가 400명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규모였고, 학교가 기독교 이념에 입각하여 세워진 탓에 "데모 현장에 나가기보다는 기도로써 현 상황을 극복해 나가자"는 입장이 우세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의견이 신속하게 모아지지 않아 사학과와 철학과 학생 10여 명이 시내로 먼저 나가게 되었고, 오후 2시가 되어서야 40여 명의 숭실대생들이 학교에서부터 행진으로 노량진을 거쳐 서울역까지 진출하게 된다. 이때 늦게 출발한 학생들은 남대문 근처에서 막히면서 중앙청 진출마저 실패하고 만다.

먼저 출발한 10여 명의 학생들은 치열하게 싸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함께 경무대 앞까지 진출한 김창섭 학생(사학과 4년)은 소방차 위에서 시위대를 진두지휘하다 경찰의 총에 맞아 허리 관통상을 당하여 사망하고, 지정달 학생(사학과 1년)은 불행 중 다행으로 다리에 무려 4발의 총탄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현재 숭실대 생활관 앞에는 '김창섭군 순국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기념탑 뒷면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새겨져 있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문구는 김창섭 학생의 의로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
  
김창섭군 순국기념탑 4.19혁명 당시 순국한 숭실대생 김창섭 학생(사학과 4년)을 기리는 기념탑이다. 기념탑 뒷면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새겨져 있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문구가 있어 김창섭 학생의 의로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
▲ 김창섭군 순국기념탑 4.19혁명 당시 순국한 숭실대생 김창섭 학생(사학과 4년)을 기리는 기념탑이다. 기념탑 뒷면에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라고 새겨져 있는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문구가 있어 김창섭 학생의 의로운 죽음이 갖는 의미를 되새길 수 있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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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실대생들의 1980년대 민주화운동

독재자 박정희가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맞아 죽으면서 유신이 몰락하자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은 다시 한 번 본격적으로 표출한다. 1980년 당시 국민들의 이러한 기대는 '민주화의 봄', '서울의 봄'으로 불리게 된다.

이때 숭실대생들도 학원민주화 투쟁과 함께 사회민주화 투쟁에 적극 나선다. 5월 14일 숭실대생들은 계엄철폐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서울대·중앙대생들과 함께 영등포역 광장까지 진출한 후, 8천여 명의 시위대열을 형성하여 여의도를 거쳐 마포-서대문-신문로-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시가행진을 벌인다. '통한의 서울역 회군'이 있었던 5월 15일에는 1천여 명의 숭실대생들이 학교를 출발하여 장승배기와 노량진을 거쳐 한강대교를 건넌 후 용산을 거쳐 서울역까지 진출한다.

'전두환 신군부세력에게 쿠데타의 빌미를 줘서는 안 된다'며 단행한 '서울역 회군'은 거꾸로 전두환 신군부세력이 5·17쿠데타를 더 쉽게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준 셈이 되었고, 광주만의 외로운 싸움이 되고만 5·18민주화운동은 무참하게 짓밟히고 만다.

그럼에도 숭실대생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한 투쟁에 나선다. 남근우(철학 75)와 이평식(법학 78)은 1980년 9월 휴교령이 취소되기가 무섭게 채플 시간을 이용하여 "팔레비와 소모사보다 더 악랄한 살인마 전두환을 처단하라!"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며 시위를 주도한다.

1983년 3월에는 김상림과 최성남이 '숭전 학우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의 반정부 유인물을 뿌리며 역시 채플을 마치고 나오는 학생들 앞에서 시위를 벌인다. 학도호국단 간부도 참여한 이날의 시위로 9명이 강제징집을 당하기도 한다. 1983년에는 숭실대생들의 시위가 3차례 더 벌어진다.

1985년 5월 23일에는 서울지역 5개 대학생 73명이 당시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을 광주학살의 배후 또는 방조자로 지목하면서 사과를 요구하는 서울미문화원 농성사건을 벌인다.

숭실대생들은 이 농성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날 숭실대 도서관 앞 원형 잔디밭에서 단국대, 동국대, 서울대, 숙명여대, 중앙대, 숭실대 등 서울지역남부지구평의회 소속 7개 대학 학생 1천여 명이 모여 지지대회를 개최한다. 이들은 광주학살 책임자 화형식을 벌인 후 '학살원흉 처단'과 '미국의 사과'를 요구하며 교문을 나서다가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시위를 벌이기도 한다.

숭실대생들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고 평가되는 1987년의 6월 민주항쟁에도 적극 참여한다. 숭실대생들은 특히 항쟁의 구심점 역할을 한 5일간의 명동성당 농성투쟁에 한양대와 서울외국어대와 함께 15명이 참가하여 40명이 참가한 서울시립대 다음으로 많은 대오를 형성하는 등 맹활약을 펼친다.

아! 박래전,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

숭실대 민주화운동의 역사는 1988년 자신의 몸을 불살라 광주의 진실을 밝히고자 했던 당시 인문대 학생회장 박래전 열사를 빼놓고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박래전 열사는 1988년 여소야대 국회가 형성되면서 광주청문회 개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광주학살의 진상규명을 위해서는 광주학살 주범의 하나인 노태우를 권력에서 몰아낼 때 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친 후 학생회관 옥상에서 분신하여 큰 충격을 주었다.

박래전 열사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8일 열린 5·18민주화운동 37주년 기념식 기념사에서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열사로 호명하면서 다시 주목 받았다.

숭실대 도서관 옆에는 '박래전 열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에는 시인이 되고자 했던 박래전의 시 <동화(冬花)>가 새겨져 있는데, 당시 열사의 비장한 심정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게 하는 명시이다.
 
박래전 열사 기념비 숭실대 교정 도서관 옆에는 박래전 열사 기념비가 있다. 박래전 열사는 1988년 6월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 박래전 열사 기념비 숭실대 교정 도서관 옆에는 박래전 열사 기념비가 있다. 박래전 열사는 1988년 6월 광주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청년학도여, 역사가 부른다! 광주는 살아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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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밖에 숭실대 교정에는 1990년대 학생운동 과정에서 과로로 쓰러져 숨진 두 대학생을 기리는 '이상열 박현민 열사상'도 있다.

숭실대 안익태기념관, 아쉽고 또 아쉽다

숭실대 교정에 들어서면서 만나게 되는 안익태기념관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애국가의 작곡자로 유명한 안익태(1906-1965)는 1918년 숭실중학에 입학하지만, 1921년 일본 도쿄의 사립 세이소쿠중학교에 편입하는 바람에 숭실중학을 미처 졸업하지 못한 인물이다.

안익태는 1965년 사망한 직후 국민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고, 1977년부터는 서울현충원 제2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만 놓고 본다면 숭실대에 안익태기념관이 있다는 것 자체가 결코 이상한 일일 수 없다.
  
숭실대 안익태기념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끊임없는 친일논란에 휩싸여 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숭실대에는 숭실중학을 중퇴한 안익태를 기리는 안익태기념관을 세웠다.
▲ 숭실대 안익태기념관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는 끊임없는 친일논란에 휩싸여 있고,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숭실대에는 숭실중학을 중퇴한 안익태를 기리는 안익태기념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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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제 강점기 안익태의 친일행적은 최근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안익태는 일본 유학에 이어 미국에 유학한 후 주로 유럽에서 활동하는데,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면서 1938년에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주제로 하는 일본 정신이 배어 있는 <에텐라쿠>를 발표하였다. 1942년에는 일제의 괴뢰국인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경축하는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만주환상곡)를 4개의 악장으로 완성한다. (<친일인명사전> 참조)

안익태는 유럽에서 1940년부터 <에텐라쿠>와 <만주환상곡>은 물론 독일 나치제국의 제국음악원 총재이자 나치 협력자였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일본축전곡> 등을 계속 연주하였다.

안익태는 최근 이해영(한신대 교수)이 <안익태 케이스>(삼인)를 펴내면서 다시 한 번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지난 2015년에도 안익태가 1941년에 '기미가요'를 피아노로 연주한 사실을 밝혀냈던 이해영은 이번에는 한발 더 나아가 안익태를 일본군국주의는 물론 나치에도 부역한 인물이었다고 문제제기하였다.

안익태의 유럽 활동은 나치의 외곽조직인 독·일협회의 후원을 받아 진행되었고, 안익태는 1943년 괴벨스가 주도하여 만든 나치의 나팔수 '음악가 조직' 제국음악원의 정회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민족 숭실'의 한 건물이 안익태관으로 명명되어 있고, 내부에 안익태를 홍보하는 전시물이 설치되어 있는 점은 참으로 아쉬운 대목이다. 앞으로 안익태에 대한 재평가 과정에서 애국가에 대한 논란뿐만 아니라, 숭실대 안익태기념관에 대한 논란도 동시에 해결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김학규는 동작역사문화연구소 공동대표 겸 소장을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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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역사문화연구소에서 서울의 지역사를 연구하면서 동작구 지역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며, (사)인권도시연구소 이사장과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를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