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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에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지고 살자는 '직업종말론자'로 살려면 몇 가지 대비가 필요하다. '하나의 튼튼한 직장에서 일하는 것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것보다 안정적이다'라는 타당한 말에도 굳이 의문을 제기해야 속이 풀리는 삐딱함이라든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고 싶다'라는 낭만적인 수사 대신 '땅을 파 봐라, 십 원 한 장 나오나'라는 억척스러움을 사랑하는 성정 따위가 그런 것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배곯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딴에는 온갖 몸부림을 치며 산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 곁에서 지내면서도 밥을 벌어 먹고사는 방법을 강구하다 보니 종내에는 책 읽는 술집을 하게 되었다. 잡지 발행인, 책 큐레이터, 출판사 마케팅 프리랜서, 서점 직원을 지나 도착한 곳을 둘러보니 이곳이었다.

 책 읽는 술집 서울 성산동 <낮섬>
 책 읽는 술집 서울 성산동 <낮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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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술집 '낮섬'.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곳에 대해 오지랖이 나만큼이나 넓은 마음 따뜻한 분들이(결코 비꼰 것이 아니다) 책과 술의 어색한 조합에 대해 걱정해주셨다. 책은 조용한 집에서 맨정신으로 읽는 것, 술은 대화를 나누며 마시는 것이 아니겠어? 누가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겠어?

정말 그렇다면 아무래도 곧 책 읽는 술집이 망할 것 같다. 하여, 그렇지 않다고 어떻게든 우기기 위해 술에 어울리는 책을 추천해보려 한다. 술을 마시며 읽으면 술맛을 돋우는 책들을 소개한다.

술 마실 때는 역시 소설!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소설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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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실 때는 이야기가 담긴 소설이 좋다. 공부하듯 읽어내는 인문학보다 이야기꾼이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 풀어내는 입담 걸은 소설이 딱이다. 술이 들어가는 소설로는 권여선 작가의 <안녕, 주정뱅이>와 은희경 작가의 <중국식 룰렛>을 추천한다.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는 세상의 모든 주정뱅이들을 위한 변론이 담긴 소설이다. 이름에서부터 주정뱅이들을 향한 작가의 따뜻한 포옹이 느껴진다. 책에는 일곱 편의 단편이 담겼다. 책 속의 인물들은 불행했거나 불행하거나 불행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족에게 착취당한 삶에 지쳐 아파트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이모>의 삶, 알코올중독과 지병에도 불구하고 서로에 대한 끈기 있는 사랑을 계속하는 <봄밤>이 그렇다. 소설 속 인물의 삶은 이미 바닥이지만 삶은 그보다 더 바닥을 보여주겠다는 듯 소설은 더 깊은 비극으로 그들을 밀어 넣는다. "인생이 농담을 하면 인간은 병들거나 술을 마신다"라는 말에 걸맞게 불행을 다루는 이 소설에는 술 마시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안녕,주정뱅이> 본문 중
 
불행에 대한 소설을 읽으며 술을 마시는 것이 그리 유쾌하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을 견뎌내는 사람들을 아름답게 그려낸다.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비극의 굴레에서 자연스럽게 술을 찾는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안녕, 주정뱅이>를 읽다 보면 소설 속 인물처럼 술을 찾게 된다.

위스키 좋아한다면 은희경 <중국식 룰렛>

 술에 어울리는 책
 술에 어울리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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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애호가라면 하루키의 책을 읽어도 좋다. 하지만 이번에는 은희경의 <중국식 룰렛>을 보면 어떨까? <중국식 룰렛> 소설 속 K의 술집에 나오는 위스키의 종류만 해도 10여 개가 넘는다.

"K의 술집에서는 세종류의 위스키만을 팔았다. 씽글몰트로만. 다른 술은 없었다. 주문하는 방식도 여느 술집처럼 메뉴를 보고 고르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자리에 앉으면 K는 황금색 액체가 반쯤 들어 있는 작은 유리잔 세 개를 날라왔다. 세 가지 술을 직접 한 모금씩 마셔본 뒤 그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잔에 든 술이 12년산 스탠더드급이고 어떤 잔의 것이 21년산 스페셜 에디션인지 상표와 숙성연도는 말해주지 않았다."
소설은 K의 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하룻밤 에피소드로 끝난다. 진실게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불행을 털어놓는다. K의 술집에 모인 불행한 사람들은 운명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소설 속 위스키에 대한 K의 평을 읽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맥켈란, 글렌피딕, 발베니처럼 알려진 술부터 글린리벳 쎌러 컬렉션, 라가불린, 카듀까지 다양하다. 언젠가 한번은 책 읽는 술집에서도 <중국식 룰렛> 속 K처럼 술의 상표를 가리고 운명을 랜덤으로 나누어주고 싶다.

이토록 진지한 책을 술과 함께? 

 술 마시며 보기 좋은 책
 술 마시며 보기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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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이반 일리치의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는 어떨까?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라는 부제가 붙어있는 이 책은 급집적인 사상가이자 사회학, 철학, 경제학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이반 일리치의 저서다.

제목과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상품 가치로 전락한 인간이 느끼는 무력함과 산업화가 만들어내는 가난의 현대화를 다룬다. 이렇게 진지한 책을 왜 술을 마시면서?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답하겠다. 속이 시원하니까!

독설을 시원시원하게 쏟아내는 친구와 술을 마시면 술자리가 즐거워지는 것처럼 이반 일리치 같은 사상가의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시면 마치 그와 술을 마시는 것처럼 즐겁다. 그가 쏟아내는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통찰, 후련한 대안은 기가 막힌 술안주가 되어준다.

"내가 지금 가난한 것은 로스엔젤레스에 살면서 35층 고층건물에서 일하느라 두 발의 사용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첫 번째 환상은 인간은 소비자로 태어났고 어떤 목표를 세우든 상품과 재화를 구매해야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은 언제나 감옥에 갇힌 수인이다. 시간을 빼앗기는 자동차에 갇히고 학생을 바보로 만드는 학교에 잡혀 있고, 병을 만드는 병원에 수용되어있다."

속 시원한 독설을 내뱉는 술친구를 원한다면 마루야마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도 추천한다. 정신이 말짱해서 어려운 텍스트도 술술 읽힐 정도라면 한병철의 <피로사회>도 좋다.

술에는 역시 시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시집
 술 마시며 읽기 좋은 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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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니 뭐니 해도 술을 마시며 보기 좋은 책은 역시 시집이다. 수요일 오전 열 시에 사무실에서 보는 시와 (그럴 일도 없겠지만) 한밤에 술을 한 잔 앞에 두고 읽는 시는 완전히 다른 시처럼 보인다. 황지우 시인의 <어느 흐린 날 나는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그러므로,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혼자 앉아 있을 것이다/완전히 늙어서 편안해진 가죽부대를 걸치고/등 뒤로 시끄러운 잡담을 담담하게 들어주면서/먼 눈으로 술 잔의 수위만을 아깝게 바라볼 것이다"
술 마시면서 보기 좋은 시집에는 심보선 시인의 <오늘은 잘 모르겠어>나 이사라 시인의 <훗날 훗사람>, 허수경 시인의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도 있다.

 시 제목으로 이름 지은 낮섬 칵테일
 시 제목으로 이름 지은 낮섬 칵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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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섬에서는 술을 만들면서 좋아하는 시 제목을 칵테일의 이름으로 지었다. 스코틀랜드 전통술 핫토디는 따뜻하고 달콤해서 자꾸 먹게 되니까 이문숙 시인의 <무릎이 무르팍이 되기까지>로 정했다. 무릎을 꿇게 될 때까지 마셔버릴 것 같은 술이었다.

소설에 보면 압생트를 마시는 주인공들은 늘 가난한 선술집에 있는 것 같아 임솔아 시인의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로 정했다. 술을 마시면서 자신과 어울리는 시를 찾아보는 것도 재밌지 않을까?

가끔은 죽은 지 몇백 년은 넘어 종이 속에만 남아있는 작가들이 진짜 사람보다 더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게다가 그 친구들은 내가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나를 기다린다. 현명한 조언과 재치있는 입담으로 무장한 채로. 그러니 책이 술친구가 되지 못할 이유는 또 뭘까?


안녕 주정뱅이

권여선 지음, 창비(2016)


중국식 룰렛

은희경 지음, 창비(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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