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방부에 의해 철거된 경기도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 건물 잔해위에 7일 오후 평화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국방부에 의해 철거된 경기도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 건물 잔해위에 7일 오후 평화의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가을원, 갈대원, 남원, 돼지원, 떡원, 똬리원, 밀원, 바깥흥농계원, 부자원, 봄이싼원, 작은원, 큰원, 골롬바원, 황새울, 신흥마을, 대추리, 세집매, 평화동산, 솔부엉이숲, 끝집, 도희네, 공소, 평택지킴이네...

2006년 5월 평택미군기지 확장 예정지의 대추분교가 무너지고 군 병력에 활새울 들판을 빼앗긴 후, 열두 번째 봄. 군대와 철조망과 굴착기로 가로막혔던 땅은 그 땅에 깃들어 살던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들과 함께 흙더미에 묻히고, 세계 최대 규모의 미군기지 완공을 앞두고 있다.

2007년 4월, 평화지킴이들은 대추리, 도두리를 떠나 '대추리의 봄을 싣고' 수레를 끌며 청와대로 행진했다. 강제이주당한 대추리 할머니의 육성이 담긴 CD와 황새울에서 수확한 볍씨를 청와대 민원실에 전달하고, 전경들에 둘러싸인 채 행진을 마무리하며 마지막 촛불을 들었다. 도두리에서 애지중지 키우던 닭이며, 묘지를 이장하여 파헤쳐진 땅을 갈아서 심었던 마늘과 완두, 마을로 찾아들던 지킴이들이 함께 꾸몄던 평화전시관, 철거된 빈집의 흙벽돌을 쌓아 만들었던 솟대…. 황새울에서 살며 투쟁하며 키우고 가꾸던 것들을 그대로 둔 채 마을을 떠나온 우리는 마지막 촛불이 건네는 작은 온기와 가물거리는 위로를 마주하고서 울음을 터뜨렸다. 군경에 의해 대추분교가 부서진 이후 처음 맞이하는 봄이었다.

그때는 알지 못했다. 대추리 도두리를 떠나와, 봄기운이 비칠 무렵이면 가슴 한복판에서 불쑥 감자 싹이 돋는 듯 쨍한 통증으로 오랜 봄을 맞으리란 걸. 2006년 3월 6일 군경에 의한 1차 행정대집행 이튿날, 우리는 언 땅을 곡괭이로 갈아서 버려진 땅에 씨감자를 묻었고, 마을출입이 통제되었던 그해 장마철에 진흙땅을 파헤쳐 늦은 감자 수확을 했다, 검문을 피해 농활을 오던 이들에게 새참으로 삶아 내주곤 했던 감자. 빨갛게 언 손으로 이른 봄 땅을 파헤쳐 감자를 묻던 기억은 황새울 들녘의 흙냄새며 녹슨 호미의 감촉이며 봄날의 비둘기 울음소리를 떠오르게 했다. 계절에 따라 배추 모종을 심고, 고구마 줄기를 묻고, 김장 무 씨를 뿌리는 일들이 우리가 외쳤던 수많은 구호보다도 더 오래 더 질기게 그곳을 떠오르게 하였다.

미군기지 확장을 반대하며 935일 동안 촛불을 들었던 대추리, 도두리 주민들에게 그 땅은 어떤 곳이었을까. 수레에 흙을 실어나르고 가래질을 하며 팥죽땀을 쏟으며 한 뼘 한 뼘 바다에서 건져 올린 땅. 헬기로 운반한 철조망으로 겹겹이 둘러싸여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 되기 전의 마지막 가을을 기억한다.

2005년 10월, 처음 평택에 와서 16번 버스를 타고 대추리 버스정류장에 내렸을 때, 들녘에서는 추수가 한창이었고, 집집마다 조그맣게 만들어둔 비닐하우스에는 가을볕에 매운 내를 풍기며 홍고추가 널려있었다. 대추분교 정문 앞 텃밭에서 마늘을 심으며 할아버지는 말했다.

"부모같이 허구 살어. 된장, 고추장 다 먹을 수 있게 담아 주지. 쌀, 고추, 참깨, 마늘, 파….금액으로 따지면 별거 아닌데 살림에 도움을 주고, 이걸로 자식한테 사랑을 주면서 사는 맛을 느끼고..."

객지에 나간 자녀가 불안하고 외로울 것을 걱정하는 할아버지는 미군기지 앞에서 보초서는 전경들을 보면 저들이 무슨 잘못인가 안쓰러워서 커피를 끓여 갖다 주곤 했다. 할아버지는 자식에게 사랑을 주는 아비로 살고 싶다고 했다. 미군들에게 이 땅 안 주고 이 마늘 잘 길러서 나눠 먹으며 살고 싶다고 말했다.

강제철거가 곧 있을 거라는 소문에 공포에 잠기던 주민분들이 자꾸만 생각나서 급기야 배낭을 꾸려 마을에 다시 왔을 때, 대추리는 '김장잔치'가 매일 이어지고 있었다. 오늘은 누구누구네 김장을 한다고 하면 이른 아침부터 각자 고무장갑 한 켤레를 챙겨 이웃집으로 출동한다. 절인 배추를 건지고, 항아리를 씯고, 김장김치 택배를 보내고, 양념을 버무리는 모든 일들이 후딱후딱 끝나고 다음 집 또 다음 집으로 잰 걸음이 이어졌다. 낮에 빈집을 돌며 이불과 베개를 수거하는 틈틈이 김장하는 집에 들러 일손을 거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수육이랑 굴 무침에 김장김치를 얹어 밥을 먹었다. 따끈한 검은콩 막걸리를 할머니들이 특히 좋아하셨다. 할머니께 물었다.

"김장 끝나면 뭐하실 거예요?"
"'고'해야지. 김치나 먹고 앉았지."

50년을 이렇게 모여 살다가 여길 떠나면 어떻게 살겠느냐고 한다. 아들이 몰래 협의매수를 해버려 김장하는 집에 와서도 큰소리를 못 내는 할머니도 있었다. 11월의 마지막 날, 촛불행사에서 할아버지는 말했다.

"물을 손아귀에 잡을 수 없듯이, 주민들의 목소리를 방패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미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외친 사람들이 그럴 수 없습니다. 다가오는 선거 때 보복해야 합니다. 더 강한 투쟁으로 보복해야 합니다. 더욱더 단결해서 끝까지 투쟁합시다."

김장시즌이 지나고, 곧이어 동짓날이 다가왔다. 주인이 떠나간 빈집을 꾸며 마을로 순례를 오는 분들을 위한 숙소, '평택지킴이네'를 열던 날, 황새울 들판에는 하얀 눈송이가 날렸다. 마늘밭에도, 대추리 공소에도, 비닐하우스 위에도 눈송이가 내렸다. 노인정에서는 할머니들이 팥죽을 쑤어 마을주민 모두가 와서 팥죽을 나누었다. 알싸하고 시원한 동치미가 빠지지 않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소주가 반주였다. 노인정 방이 빼곡히 모인 이들로 비좁아서, 할머니 몇 분은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서 팥죽을 드셨다. '마리아가 살 집이 생겼다'고 모두들 축하해주시고, 종이컵에 소주도 가득 따라 주셨다. 달콤한 커피까지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현관문에는 무단점유를 경고하는 계고장이 붙어있었다.

처음 고향을 떠나 투쟁을 시작했던 곳, 대추리와 도두리. '평택지킴이 네'가 문을 열자 할머니들은 시집올 때 혼수로 가져왔던 목화솜 이불을 숙소에 보내주셨고, 참기름이며 된장, 조선간장이며 겨우내 먹을 김장김치를 갖다 주셨다. 협의매수 이후 이사를 앞둔 할머니가 이웃 눈을 피해 밤사이 두꺼운 겨울 잠바를 담장 너머로 던져두고 가셨다. 행정대집행이 있기 전 마지막 겨울은 몹시 추웠지만, 그 겨울 나는 마을에 뿌리를 내렸다. 사라지지 않는 이름처럼, 한 조각의 뿌리가 여전히 그곳에 묻혀 있다. 봄이 오면 어디론가 순을 뻗으려 여전히 두근거린다.


태그:#대추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투쟁을 알리기 위해 가입했습니다. 평택 팽성읍 대추리와 도두리 주민들의 목소리를 전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