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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인 1988년 6월 4일, 숭실대학교에 다니던 박래전 열사는 ‘광주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치며 분신했고, 6월 6일 사망했습니다. 어느 덧 그로부터 3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주기를 맞아서 박래전 열사의 뜻과 시를 알리려고 합니다. 뒷전에 밀어두었던 유품들을 정리하고 작은 추모관도 만들려고 합니다. 이번 스토리 연재에는 박래군 소장(인권재단 사람)과 김응교 시인(문화평론가, 숙명여대 교수)이 같이 글을 쓰고 <오마이뉴스>가 함께 합니다. 좋은기사원고료를 3만원 이상 후원해주시는 분들께는 박래전 열사를 알리는 책 <1988 박래전>을 드립니다. 주소를 남겨주세요. 7회 동안 연재되는 박래전 열사의 이야기와 그의 시대에 많은 관심을 갖고 응원해 주시길 바랍니다.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이름을 추모관에 적어두겠습니다. [편집자말]
2007년 19주기 박래전 열사 인권기금 전달식
▲ 박래전 열사 인권기금 2007년 19주기 박래전 열사 인권기금 전달식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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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학 다녔던 사람들에게 광주는 벗을 수 없는 짐이었습니다. 군인이 국민을 죽였다는 사실도 충격이었지만, 그 학살자가 대통령이라는 현실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다가 지식인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강조도 한몫했습니다. 아마도 당시에는 대학 진학률이 낮았던 탓이기도 했을 겁니다.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들이 이 불의한 정권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군사독재정권(군사파쇼정권)과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한 목숨 바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팽배했습니다. 하지만 용기 있게 나서는 그 길은 곧바로 경찰, 안기부(현 국정원), 보안사(현 기무사)에 끌려가서 죽도록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가거나 군대에 강제 징집된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당연히 학교에서는 제적당해야 하는 것이고요. 광주 학살의 진실을 말하기에는 이런 모든 위험을 감수해야 할 때였습니다.

1980년대 초의 대학 교정에는 정사복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캠퍼스 곳곳에서 그들이 학교의 주인이고 학생들은 위축되어서 눈치 보면서 그들을 피해 다녀야 했습니다. 도서관에도 강의실에서도 늘 그들의 귀와 눈을 의식해야 했지요.

1학년 어느 날 도서관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갱지 유인물을 발견했습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정도의 제목이었던 것 같은데, 광주에서 신군부세력이 얼마나 잔인하게 시민들을 학살했는가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유인물을 발견하고부터 얼마나 떨었는지 모릅니다. 화장실에서 달달 떨면서 다 읽고는 양말 바닥에 꼬깃꼬깃 접어서 갖고 나와서는 서클룸(동아리방)에서 돌려 읽었습니다. 내가 화장실에서 나온 뒤에 경찰들이 모든 화장실을 뒤지고 난리쳤다고 합니다.

문학의 꿈을 접게 한 광주학살

박래전 열사 장례 대오. 고향(화성시 서신면)에 도착해서 모교인 서신초등학교로 향하고 있다.
▲ 장례대오 박래전 열사 장례 대오. 고향(화성시 서신면)에 도착해서 모교인 서신초등학교로 향하고 있다.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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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 2월. 박래전 열사 명예졸업식
▲ 명예졸업 90년 2월. 박래전 열사 명예졸업식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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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었고, 동생은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각자의 학교에서 문학회에 들어가서 활동하면서 지하 서클에 가담하여 학생운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동생의 학생운동은 순탄치 못했습니다. 먼저 1학년 말에 학습모임을 다녀오다가 경찰 불심검문에 걸렸고, 이른바 불온서적을 빌미로 학교는 지도휴학을 강요했습니다. 휴학하지 않으면 제적시키고 감옥 보내겠다는 협박을, 경찰의 사주를 받아서 학교가 한 것인데 걱정이 많은 부모님이 시골서 올라와서 동생을 휴학시키고 끌고 내려갔습니다.

1983년, 여름에 군에 가기로 한 동생보다 제가 먼저 학내시위 때 연행되어 강제 징집당했습니다. 우리 형제는 각각 1985년 여름과 겨울에 제대를 했고, 먼저 제대한 저는 위장취업을 해서 노동운동을 한다고 인천으로 내려갔고, 동생은 1986년 1학기에 복학했습니다. 그런데 1986년 5월 당시 해고자였던 저는 한미은행 점거농성 사건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고, 이 일로 걱정 많은 부모님의 강요에 의해서 동생은 다시 휴학을 하고는 시골로 내려가 부모님의 농사일을 도와야 했습니다.

그해에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지요. 9월 20일부터 10월 5일까지 열리기로 된 아시안게임에 반대하는 투쟁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동생은 학교에 올라왔다가 시위에 쓸 화염병을 나르다가 경찰에 붙잡혔고, 노량진경찰서 유치장에 보름 동안 구류를 당했습니다. 마침 그때는 추석 명절 때였습니다. 시골서 농사지어서 두 아들 대학을 보냈던 부모님은 억장이 무너졌지요. 이때의 상황을 동생이 시로 남겼습니다.

어떡할려고 그러니 이노무 새끼들아
난 어떡하라고 두 형제 다 유치장에 있어
나와라
나와서 이야기 좀 하자
어떡하란 말이냐 애들아

노량진 유치장에 면회 오신 어머님
나이 오십에
칠십 나이 겉늙은
할머니 주름 가득한
어머님
- 박래전 유고시, 「어머님 말씀」 전문

87년 6월 항쟁 중에는 장안동 대공분실에도 끌려가서 고초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6월항쟁이 실패했다면 동생이나 저나 더욱 큰 고통을 당했을 겁니다. 6월항쟁이 노태우의 기만적인 6.29선언으로 귀결되면서 저는 감옥에서 석방되었고, 동생은 더는 대공분실에 끌려가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일어난 6월 항쟁, 그리고 7월부터 9월까지 전국에서 전개된 노동자대투쟁으로 세상은 일대 전변이 일어났고, 군사독재정권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 의해서 종식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김영삼-김대중 두 야당 지도자들이 서로 대통령 해먹겠다고 싸우다가 그해 12월 선거에서 학살의 주범인 노태우가 당선되는 어처구니없는 꼴을 만들었습니다.

우울했던 1988년

1988년의 시작은 우울했습니다. 대선 개표 때 부정투표함이 구로구청에서 발견되어 시민들이 투표함을 지키는 싸움을 했으나 그것도 진압되었습니다. 군사독재를 물리치기 위해 싸웠으나 합법적인 선거로 학살의 원흉이 대통령이 된 상황이었고, 6월 항쟁을 일구었던 운동진영은 대선 패배의 책임을 둘러싸고 극심한 갈등과 분열을 낳았습니다.

그 겨울에 동생은 자신이 속했던 정파의 결정으로 인문대 학생회장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복학생인 동생이 인문대학생회장이 된다는 게 마뜩잖아서 말려봤지만 조직 내에서 결정한 사항을 물릴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동생은 건강상태도 좋지 않을 때였습니다. 병원 좀 가라고 돈을 어떻게 마련해주면 후배들과 술 먹고 들어오고는 했습니다. 학생운동에서 요구하는 수많은 일들에 이리저리 치여서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렸는데 거기에 단과대 학생회장까지 한다니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동생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나가면서 부지런히 학우들을 만나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알기(주체) 인문'을 기치로 내걸고 자신을 헌신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동생은 인문대 학생회장에 당선되었고, 그 무렵 실시된 총선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때까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정치지형이 형성되었습니다. 여소야대 국회에서는 5공청산특위, 광주특위가 만들어져서 국민들이 광주의 진상과 5공화국 시기의 폭정에 대해서 알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졌습니다.

학살원흉은 처단되어야

박래전 열사
▲ 박래전 열사 박래전 열사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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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제 동생 래전이가 보기에는 당시의 노태우나 보수야당들의 정치적 타협에 의한 광주 문제의 해결은 기만이었습니다. 그 입장이 유서에 매우 단호하게 표현되었습니다.

지금 이 땅엔 노태우 군사독재 정권이, 8년 전 광주에서 우리의 형제, 친지들을 찢어 죽였던 칼날을 가슴에 품고 또다시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려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진정으로, 하나뿐인 사랑하는 조국 한반도는 분단의 원흉 미국에 의해 두들겨 맞고 칼부림당해 멍들어가고 있습니다.

- 학살원흉 노태우는 즉각 처단되어야 합니다.

8년 전 이 땅을 피비린내로 진동하게 했던 학살의 원흉이 대통령의 권좌에 앉아 있습니다. (중략) 학살원흉의 심판은, 아니 처단은 이 땅 4천만 민중의 투쟁에 의해 설치되는 민중재판에 의해서 이루어질 때에만 가능한 것이며 그때에만 광주의 원혼들은 구천을 맴돌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학우여! 아직도 학살의 원흉은 권좌에 앉아 있고 그 피묻은 손을 휘두르며 위대한 노가리의 시대를 떠들어대고 있다. 아직도 학살의 원격 조종자 미국은 핵무기와 수입개방의 칼날을 들이대고…88올림픽이라는 화려한 전광판 밑에는 군홧발에 짓눌려 신음하는 우리의 부모, 형제, 자매들이 있다. 학우여!

제 동생 박래전은 오로지 민중의 항쟁으로만 광주학살 원흉의 처단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소수의 학생들을 이끌고 숭실대 앞 3거리까지 진출해서 학살원흉의 처단을 외쳤지만 학생들의 호응을 별반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5월 15일, 서울대생 조성만이 명동성당에서 할복 투신하고, 5월 18일 단국대생 최덕수가 분신하는 일을 겪자 자신도 몸을 민주의 제단에 바쳐서 광주학살 원흉 처단의 불길을 만들고 싶었을 겁니다.

제 동생 박래전은 1988년 6월 4일 숭실대 학생회관 옥상에서 온몸에 시너를 끼얹고 "광주는 살아 있다. 군사파쇼 타도하자!"고 외치며 분신, 3도 화상을 입고 영등포 한강성심병원에서 투병 중에 6월 6일 저 세상으로 떠났습니다.

광주를 외치며 자신을 던진 사람들

박래전 열사
▲ 박래전 열사 문재인 대통령 박래전 열사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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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은 5.18 37주년 기념식에서 "수많은 젊음들이 5월 영령의 넋을 위로하며 자신을 던졌습니다. 책임자 처벌과 진상규명을 촉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었습니다. 국가가 책임을 방기하고 있을 때, 마땅히 밝히고 기억해야 할 것들을 위해 자신을 바쳤습니다"고 말하면서 박관현, 표정두, 조성만, 박래전을 호명했습니다. 

하지만 네 사람만이 아니었습니다. 제 동생이 죽기까지 광주의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을 외치면서 죽어갔던 이들을 찾아서 대통령의 연설문 형식에 맞춰서 정리해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여기서는 이들의 이름만이라도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략하게 연도별로 말씀드립니다.

1980년 스물한 살, 서강대생 김의기, 노동자 김종태.
1981년 스물두 살, 서울대생 김태훈.
1982년 스물아홉 살, 전남대생 박관현.
1985년 스물다섯 살, 노동자 홍기일, 스물일곱 살, 경원대생 송광영.
1986년 스물두 살, 사회운동가 강상철.
1987년 스물다섯 살, 노동자 표정두, 스무 살, 목포대생 박태영.
1988년 스물네 살, 서울대생 조성만, 스무 살, 단국대생 최덕수, 스물다섯 살, 숭실대생 박래전.


이번에 복원하려는 박래전 열사의 구두. 30년 전 분신 당시 신었던 '두발로' 표 구두. 옆의 부스러기는 구두 밑창이 부숴진 것. 보통 가죽으로 된 부분은 남지만, 화학재로 된 밑창들은 부스러진다.
▲ 박래전 열사 구두 이번에 복원하려는 박래전 열사의 구두. 30년 전 분신 당시 신었던 '두발로' 표 구두. 옆의 부스러기는 구두 밑창이 부숴진 것. 보통 가죽으로 된 부분은 남지만, 화학재로 된 밑창들은 부스러진다.
ⓒ 민중해방열사 박래전기념사업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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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동생 박래전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20대의 청춘들입니다. 이들은 직접적으로 '광주'를 외치며 분신, 투신 등으로 자신의 몸을 민주의 제단에 바쳤습니다. 이들뿐만 아니라 그 당시 치열하게 전두환 군사독재정권과 싸웠던 20대 청년들, 고문당해 죽고, 의문사로 죽고, 미제국주의에 반대하며 죽고, 노동권을 외치며 죽고, 인권을 주장하며 죽고, 군사독재정권 시기에 자신의 온몸을 던져서 싸웠던 많은 이들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20대의 젊은이들이 자신의 몸을 던지면서까지 처단하고 싶던 광주학살의 원흉인 전두환, 노태우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제 동생이 죽은 지 30년이 되어도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30년이 지났어도 제 동생의 뜻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동생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계속)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 입니다.



태그:#박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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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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