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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오랜 당뇨병으로 이틀에 한 번씩 혈액투석을 하시다가 지난해 12월 5일 심근경색으로 쓰러지셨다. 평소 아내인 어머니에게 살갑게 대하지도 않으시고 아픈 어머니와 싸우기까지 하시던 아버지가 요즘 들어 유독 작아 보이신다.

어머니의 빈 이부자리를 보며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보시기도 하고, 결혼 48년 만에 병실에서 어머니의 생신을 직접 축하해 주시기도 했다. 밖에 나가시면 전화 한 통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심근경색으로 어머니가 쓰러지신 후 중환자실을 거쳐 일반 병실로 오신 후로는 병문안을 못 갈 때는 꼭 전화라도 하신다.

지금껏 아버지를 원망하며 살아왔다. 젊은 시절 실직하셔서 어머니를 고달프고 힘들게도 하셨지만 늘 다정하지 못하셨고 따듯하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런 아버지가 요즘 들어 부쩍 작아 보인다. 나도 한때 김숨의 <럭키슈퍼> 속 딸처럼 아버지를 유통기한 지난 식품 취급한 것은 아닐까. 이제라도 아버지의 거친 손마디 잡아드리고 싶다.

"아빠가 깨어나질 않아" "깨운다고 뭐가 달라지냐?"

김숨의 '럭키슈퍼'는 가난한 동네의 작고 볼품없는 구멍가게다. 아버지는 실직하여 자녀들의 표현대로라면 유통기한이 지난 지 오래되었고 어머니가 작은 구멍가게로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린다.

동네에 하나 있는 가게로 몇몇 찾아오는 단골들도 있었지만, 근처에 없는 것 없는 만물상 '서울슈퍼'가 생기면서 사람들의 발길은 아예 끊겨 버렸다. 새벽 6시부터 가게 문을 열고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등바등 열심히 일하는 어머니와 달리 깨어 있는 시간은 늘 술에 취한 '럭키슈퍼'의 가장 아버지. 고3인 아들에게 아버지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다.

나는 오빠에게 말한다.
"아빠가 깨어나질 않아."
"뭐?"
"아빠가 깨어나질 않는다고!"
"그래서?"
"아무래도 그만 깨워야 될 것 같아."
"제발 그냥 내버려둬라."
"그래도......"
"깨운다고 뭐가 달라지냐?"
오빠가 내게 버럭 화를 낸다.-p.311

차라리 없는 존재만도 못한 아버지가 되어버린 '럭키슈퍼'의 가장.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가게 안의 유통기한 지나버린 식품보다 더 멸시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투명인간 취급하며 무시하는 아들과 함께 중학생인 딸은 아버지를 유통기한 지나버린 간장과 같다고 생각한다. 아니, 유통기한 지난 그 어떤 물건보다 아버지의 유통기한이 가장 많이 지났다며 뻔뻔함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리고 아빠는 팔리지 않은 채 유통기한 날짜가 한참 지나버린 간장과 다를 게 없다. 먼지를 부옇게 뒤집어쓰고, 진열대 구석에 처박힌 간장 말이다. 아빠가 입이라도 벙긋 열면 짜디짠 냄새를 훅 끼치며 거무스름한 간장이 쿨럭쿨럭 토해져 나올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아빠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중략)그러고 보니 아빠의 유통기한이 오늘로써 3년하고도, 딱 162일이 지났다. 우리 가게에는 아빠 말고도 유통기한을 넘긴 물건들이 여럿 있지만, 아빠만큼 그렇게나 길게 넘긴 물건은 없다. (중략) 너무 뻔뻔하지 않은가? -p.288

입을 열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가족 간 대화가 없음을 보여준다. 투명인간 취급하는 큰아들과 아버지를 썩어가는 간장보다도 못하다는 큰딸. 그런 자녀들을 보면서도 나무라지 않고 자녀들과 함께 남편을 유통기한 지나버린 쓰레기 취급하는 아내까지. 가장의 의미와 자리가 사라진 가족이다.

10년이나 다닌 직장에 사표를 써야했던 이유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경제활동을 끝내고 무작정 집에서 놀고 있다는 비난으로 아버지를 대하는 자녀들. 그런 자녀들에게 꾸짖음도 이해도 구하려 하지 않는 아버지. 그런 남편을 멸시하는 아내와 아픈 막내.

식구를 위해 돈을 벌고 중심을 잡아주는 가장의 버팀목을 잃은 가족에게 아버지는 쓸모없어 폐기처분해야 할 유통기한 지난 쓰레기에 불과했다.

"아빠는 어쩌다 아무도 사가질 않아, 유통기한 날짜가 걷잡을 수 없이 지나버린 존재로 전락한 것일까. 나는 종종 아빠의 이마에 찍힌 유통기한 날짜를 지워 없애는 상상을 하곤한다. 엄지손가락에 침을 묻혀 스윽스윽... 엄지손가락 지문이 닳아빠지는 한이 있더라도 스윽스윽...(중략) 내 입속의 침이 메마를 때까지 열심히 침을 묻혀가며 스윽스윽..." p.290

'럭키슈퍼'의 아버지는 무능력하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나 실직을 했고 아내가 벌어오는 돈으로 먹고 산다. 자식들도 그런 아버지를 무시한다. 그림자 취급한다. 부부간, 부모·자녀간 대화는 실종됐다. 아버지의 권위도 없다. 있든지 없든지 상관없으나 차라리 유통기한 지난 식품처럼 폐기 처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머니의 가게 동전통에서 동전을 가져가는 모습을 보일지언정. 아버지가 왜 실직을 하셨는지, 왜 사표를 내야만 했는지 자녀들과 아내는 물어본 적이 있을까?

누군가에겐 폐기 처분해야 할 쓰레기 같은 존재일지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단 한 번이라도 만나보고, 안아보고, 말이라도 해 보고 싶은 그리운 존재일 수도 있다.

원해서 실직하는 사람이 누가 있으랴. 떠밀리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 사표를 쓰고 집에 계시다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멸시와 냉대를 받는 아버지가 있다면,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 하거나 살아 있어도 만날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들을 전해주고 싶다.


자전소설 1 - 축구도 잘해요

김경욱 외 지음, 강(2010)


태그:#김숨, #럭키슈퍼, #김숨의럭키슈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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