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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공간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소박하게나마 하고 싶은 일을 꾸려가며 사는 것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80년이 넘은 한옥과의 첫만남부터 고치고, 수선하는 과정을 담아갈 이 연재는 앞으로 공간의 완성, 그 이후 공간에서 만들어갈 일들을 담아낼 예정입니다. - 기자말

이사를 여러 번 했다. 생애 최초 독립 지대는 방 한 칸, 부엌, 화장실로 이루어진 다세대주택 2층이었다. 그 집으로부터 오피스텔을 거쳐 아파트에서 아파트로 건너다녔다. 어린 시절 단독주택에서 살았던 기억이 좋기만 한 건 아니었지만, 늘 '집'이라는 단어에 일정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그런 집에 다시 살고 싶었다.

어린 시절 막연히 세계일주를 꿈꾸듯,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은 과연 현실 가능성이 몇 퍼센트나 될지 가늠하기 어려운 그냥 '꿈'이기만 했다. 하루 8시간 근무로 가늠할 수 없는 나의 직업은 일 외의 다른 것에 정신을 쏟을 여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80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던, 오래되고 낡은 이 집은 계약과 동시에 연정의 대상이 되었다.
 80여 년 전부터 이 자리에 있던, 오래되고 낡은 이 집은 계약과 동시에 연정의 대상이 되었다.
ⓒ 황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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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도 세월은 흘렀다. 나이가 들었고,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삶을 꾸리고 싶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살고 싶었다. 그것의 전제는 공간의 마련이었다. 아파트는 평수와 위치에 따라 매우 세부적으로 가격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발품의 의미가 그리 크지 않다. 구조도 엇비슷해 선택의 여지 역시 크지 않고 크게 낭패 볼 일도 많지 않다. 어느 동네에 살 것인가만 정하면, 나머지는 인터넷과 부동산 사무실의 도움으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단독주택은 같은 동네에서 이웃하고 있는 집들끼리도 가격대는 천차만별이고, 집의 사정도 각양각색이다. 여기에 더해 집을 내놓는 집주인의 상황에 따라 가격은 등락을 거듭한다.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라는 것이 통하지 않으면 결정은 몹시 어렵다.

그래서 발품만이 답이다. 시간이 될 때마다 집을 보러 다니는 것은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할 과정이다. 서울 오래된 동네를 보러 다니며 실망하는 날이 많았다. 깨끗한 동네의 집은 너무 컸고, 너무 비쌌다. 내 주머니 사정에 맞는 곳들은 집 한 채를 둘러싸고 사방이 모두 빌라촌이었다.

프라이버시 보호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무질서하고 지저분한 골목길을 돌아나와 깨끗하게 관리된 아파트 단지에 들어설 때면 '나는 왜 굳이 땅에 발을 딛고 살려 하는가'라는 자문이 여지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이라는 단어에 함께 따라나오는 그 이미지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은 뒤 한 번도 전면 교체하지 않았다는 기와는 자세히 보면 요즘 기와와 만듦새가 다르다. 얼핏 낡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빌라에의 유혹을 이겨낸 집이다. 어쩌면 바로 옆집 빌라 붉은 벽돌의 견고함보다 이 기와가 더 단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지붕을 타고 흐르는 선이 물결처럼 곱다.
 지은 뒤 한 번도 전면 교체하지 않았다는 기와는 자세히 보면 요즘 기와와 만듦새가 다르다. 얼핏 낡아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빌라에의 유혹을 이겨낸 집이다. 어쩌면 바로 옆집 빌라 붉은 벽돌의 견고함보다 이 기와가 더 단단한 것일지도 모르겠다.지붕을 타고 흐르는 선이 물결처럼 곱다.
ⓒ 황우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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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을 꿈처럼 품은 지는 헤아릴 수도 없다. 현실 가능성을 높여 본격적으로 발품을 팔아 알아보기 시작한 건 약 4년 전부터였다. 꿈은 깊어졌고, 시간은 훌쩍 지났다. 일 년 열두 달, 날이면 날마다 집을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시간이 날 때면, 오가다 마음에 드는 동네에 들어설 때면 눈에 보이는 대로 부동산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빌라에의 권유는 어디나 비슷하고, 단독주택을 찾는다는 이유로 세상물정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대접을 받는 것도 비슷했다. 아파트처럼 동행하여 집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지 않다. 주소를 겨우 받아들고 직접 찾아가 겉에서만 바라보고 와야 하는 일도 일상다반사다. 그렇게 찾아다닌 집들과 동네의 형편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나의 집과의 만남을 위해 치러야 했던 비용은 통장에 찍힌 숫자만이 아니다. 기대와 실망의 교차를 맛보며 흘려보낸 시간 역시 내가 치른 비용이며 준비였다. 인연인 듯 우연인 듯 만난 나의 집은 처음 집을 찾아 동네에 들어설 때부터 좋았다.

숱하게 다닌 서울의 어떤 골목길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골목 어귀에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쓰레기도 밉지 않았다. 오래되고 낡았지만 계약과 동시에 연정의 대상이 되었다. 포기와 타협의 결과가 아니라서 좋았다.

덧붙이는 글 | 사진을 찍은 황우섭은 주로 인물과 건축물을 찍는다. 사람도 건물도 기교와 치장 대신 있는 그대로의 표정을 카메라에 담는 걸 좋아한다. 오래된 것에 집착하고, 동적인 것보다 정적인 것에 주로 관심을 갖는다. 산티아고 순례와 나오시마 여행의 기록을 사진으로 남긴 단행본이 국내에 출간되었고, '조병수 건축사무소' 전속 사진작가로 활동하면서 찍은 사진이 영국 'Thames&Hudson'에서 펴낸 조병수 건축가의 작품집 『BYOUNG CHO』의 표지 및 본문에 실렸다.

*이 글은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되었다.(https://blog.naver.com/hyehwa11-17)



태그:#한옥, #도시형한옥, #한옥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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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지금은 혜화동 인근 낡고 오래된 한옥을 새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그곳에서 책을 만들며 살고 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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