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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가서 그리고 봄이 와서, 주눅이 든다. 봄이 가고 여름이 왔을 때도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을 때도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을 때도 나는 어김없이 주눅이 들었다. 자신이 없으니 포기도 쉬웠다.

지난 삶을 되짚어 보면 끝까지 해낸 일이 거의 없다. 타고 난 성격 탓인지 칭찬만 받고 자란 유년 시절의 부작용인지 그럴 듯한 이력 하나 없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살아왔다. 서른여섯 번째 봄이다. 무엇도 되지 못했기에 무엇도 되지 못할까 봐 주눅이 든다.

       
아이에게 편지를 받았다.

"발레리나 엄마 잘헤라 다온이가 응원한다. 수영선수 아빠 잘헤라 다온이가 응원한다. 사랑해요. 엄마 아빠"

아이의 편지
 아이의 편지
ⓒ 김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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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도 교정하고 근력도 키우려고 발레를 배우고 있다.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지만 굳어버린 나쁜 자세와 바닥을 치는 체력으로 여전히 헤맨다. 엉성한 폼으로 쩔쩔 매는 모습을 직접 봤는데도 나의 아이는,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발레리나"라고 한다.

"엄마 오늘도 글자 많이 만들었어?" 노트북 앞에서 글자들을 잔뜩 만들어 내는 나는, 책 한 권 내지 못했지만 작가다. 다른 이의 그림을 보고 겨우 흉내를 내는 나는, 전시회 한 번 하지 못했지만 화가다. 오직 나의 아이에게.

고요한 곳에 스미는 바람의 말, <바구니 달>

<바구니 달> 저 : 메리 린 레이, 이상희
 <바구니 달> 저 : 메리 린 레이, 이상희
ⓒ 베틀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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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바구니를 팔러 도시로 나가는 아버지를 늘 따라가고 싶다. 하지만 아직 어려서 안 된다. 대신 바구니 만들기에 좋은 나무를 구별하고 나무 껍질을 벗기고 바구니를 짜는 법을 배운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드디어 소년은 아버지를 따라 도시로 나간다. 모든 것이 좋았다. 도시 사람들의 까마귀 같은 비웃음을 듣기 전까지는. 달빛 같던 아버지의 얼굴이 순식간에 초라해지던 그 순간을 소년은 보았다.

집으로 돌아 온 소년은 바구니도 바구니를 팔러 나가는 아버지도 싫어 더 이상 바구니를 만들지 않는다. 남몰래 창고로 가서 잔뜩 쌓여있는 바구니를 걷어찬다.

그림책 속 소년은 나의 아이였다가, 또 나였다가 한다.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드는 바구니를
무조건 사랑하는 소년은 "엄마는 예쁜 발레리나"라고 말하는 나의 아이 같아서 고맙고 애달팠다. 아버지와 아버지가 만드는 바구니를 미워하는 소년은 스스로를 못미더워 하는 나 같아서 서글펐다.

엉망진창으로 무너져 뒹구는 바구니들 사이에 서 있던 소년에게, 이웃 아저씨가 말한다.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배워서 음악으로 만들어 노래 부르지. 그리고 또 어떤 이들은 바람의 말을 듣고 시를 쓴단다. 우린 바람의 말로 바구니 짜는 법을 배웠지. 바람은 믿을 만한 존재가 누군지 알거든."


바람의 말은 고요한 곳에 깃들기 마련이다. 달빛마저 희미한 숲에서 소년은 그리고 나는 바람의 말을 듣는다. 바람이 믿을 만한 존재, 바구니를 짜는 아버지를 보며 소년이 바구니 짜는 법을 배우듯 한 줄 한 줄 삶을 엮는 나를 보며 아이는 삶을 배운다. 나는, 나의 아이에게 유일한 존재임을 기억해낸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발레리나였다가 작가였다가 화가가 된다. 이렇게 산다.

이렇게 살아도 괜찮아, <바람은 보이지 않아>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글, 그림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글, 그림
ⓒ 한울림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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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말을 좀 더 들어볼까. 소년이 묻는다. 바람은 무슨 색이냐고.

늙은 개에게 바람은 빛바랜 털색, 늑대에게 바람은 젖은 흙이 품고 있는 어둠의 색, 마을에게 바람은 이야기를 간직한 지붕의 색, 꿀벌에게 바람은 태양처럼 뜨거운 색, 개울에게 바람은 물속에 빠진 하늘의 색이다. 

답을 구하러 나섰지만 답이 없다. 지친 소년에게 아주 커다란 거인이 말한다.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하지. 바람은 모든 색이란다. 네가 이 책 속에서 만난 모든 색처럼."


나에게 바람은, 잠든 아이의 속눈썹에 깃든 작고 옅은 그림자 색이다. 눈에 거의 띄지 않는 색이지만 괜찮다. 바람은 이 색이기도 하고 동시에 저 색이기도 한다니까.   

지난 봄 벚꽃이 필 때쯤 아이가 폐렴에 걸려 입원을 했다. 병원 간이침대에서 몇 밤을 자고 집으로 돌아오니 벚꽃이 지고 있었다. 세상은 나만 여기 두고 저 멀리 앞서 간다. 이렇게 살아서 주눅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새 봄이 왔다.

어딘가에 나 같은 마음으로 살고 있는 엄마들이 있을까 봐 벚꽃이 피지도 않았는데 성급하게 글을 쓴다. 당신은 바람이 믿을 만한 존재, 그래서 아이에게 유일한 존재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이미 위로가 넘쳐나는 세상에 나까지 더할 필요가 있을까 망설였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말해주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더 퍼스트 미디어>에도 게재됩니다.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글.그림, 김벼리 옮김, 한울림어린이(한울림)(2015)


바구니 달 - 베틀리딩클럽 저학년 그림책 2001

메리 린 레이 글, 바버리 쿠니 그림, 이상희 옮김, 베틀북(2000)


태그:#그림책 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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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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