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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과 오만

팜플로나에 있는 순례자 상점 입구
 팜플로나에 있는 순례자 상점 입구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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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장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가는 800km 여정에 제법 큰 도시가 세 군데 있다. 팜플로나(Pamplona), 부르고스(Burgos), 레온(Leon).

만약 걷다가 몸이 아프면 제일 가까운 도시(세 군데 중 한 곳)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대부분 순례길은 시골 마을에서 마을로 길이 나 있다. 약국은 쉽게 갈 수 있어도 병원은 그렇지 않다. 한국 음식이 그립다면 대도시에 있는 중국인 슈퍼에 가면 된다. 김치는 없지만 라면이나 고추장 등, 웬만한 것은 다 있다.

신발 밑창이 뜯어져서 신발을 새로 사야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오래 걸어도 물집이 잡히지 않는 편한 신발이어야 한다. 전문 스포츠 용품점은 대도시에나 가야지 있다. 물론 노천카페와 고급 숙박업소도 많다. 많은 사람들과 자야하는 알베르게가 싫증난다면 하룻밤 정도는 사치를 부려도 된다. 풀장이 딸린 호텔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래선지 대도시가 다음 목적지가 될 때면 순례자들이 으레 들뜨는 것 같다.

수비리에서 다시 만난 니콜라도 그랬다. 그는 휴대폰에서 영어 단어와 사진을 검색해 가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내일 팜플로나에서 살사댄스를 추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 "내일 팜플로나에서 시설 좋은 호스텔에서 자고 싶은데 같이 갈래?" 그는 '내일 팜플로나'에서로 시작되는 문장으로 질문을 해댔다.

내가 수비리에서 멈추게 된 것을 굳이 변명하자면 중세풍 다리 때문이었다. 

론세스바예스에서 수비리까지는 거의 내리막길이다. 수비리 도착 전, 6km 구간은 빗물에 흙이 씻겨 제법 큰 돌이 드러나 있는 급경사 돌길이었다(다음날 길을 잘못 들어 이 길을 다시 올라왔다). 급경사 길이 다 끝나면 가운데가 아치형으로 뚫린 중세풍 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오래되고 단단한 돌다리. 아치형 아래로 맑은 물줄기가 흐르고 다리 너머로는 아름드리나무가 그늘을 만든다. 배낭을 벗은 순례자 몇이 이미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있었다. 

중세풍 다리는 이름도 특이하다. 우리말로 하면 '공수병'인 라비아 다리(Ruente de la Rabia)이다. 공수병은 '광견병'을 말한다. 병에 걸린 동물에게 물리면 물을 두려워해서 '인수공통전염병(人壽共通傳染病)'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라비아 다리를 건너기만 하면 공수병에 걸리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병에 걸린 동물을 데리고 가운데 아치 주위를 세 번 돌면 병이 낫는다는 설이 있다. 

나는 다리를 건너기 전에 세워놓은 마을 안내도 앞에 섰다. 우습게도 어제 설전을 벌였던 이탈리아 중년 남자가 추천한 알베르게를 찾고 있었다. 내 목적지는 6km 더 떨어진 라라소아냐였지만 이미 나는 내 자신과 타협하고 있었다. 

'적응하는 며칠 동안은 무리하면 안 된다. 오늘만 걷는 것이 아니다. 특히나 나는 혼자다. 내 몸은 내가 챙겨야 한다. 장장 앞으로 30일이 남아 있다. 체력도 정신력도 아주 길게 가야한다. 무엇보다 스페인 태양이 뜨겁다. 전날은 안개 때문에 우울했다면 지금은 작렬하는 태양에 정수리가 녹을 지경이다. 그래서 이곳은 시에스타(낮잠) 시간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도 시에스타 같은 휴식이 필요하다.'
 
다리를 건너 오른쪽 길로 향했다. 사설 알베르게가 모여 있는 곳이다. 제일 가까운 곳으로 들어섰다. 이미 도착한 젊은 무리(미국인)와 프랑스 중년 남자 두 명이 있었다. 중년 남자들은 배낭을 다음 숙소로 보내는 서비스를 신청해서 가뿐한 몸으로 앞서 걸어갔다.

나는 사설 알베르게 마당 의자에 앉아서 땀으로 젖은 배낭 등받이 쪽과 허리가방을 햇볕에 말렸다. 오후 1시부터 체크인을 한다고 하더니 40분 일찍 침대 배정을 시작했다. 나는 침대 배정을 받고 다시 의자에 앉아 메모를 하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알베르게 풍경을 스케치했다. 햇살은 강렬했지만 습기가 적어 그늘 아래에서는 견딜만 했다. 아침도 먹지 않아서 허기가 질만 한데도 배고프지 않았다.

팜플로나 가는 길
 팜플로나 가는 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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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남녀가 섞인 미국인들은 샤워를 하느라 부산을 떨었다. 그 중 여자 한 명은 침실과 떨어진 샤워장에서 샤워를 하고 난 뒤 수건으로 중요 부분만 간신히 가리고 마당을 가로질러왔다. 프랑스 남자 두 명은 체조를 하면서 몸을 풀었다.

샤워를 다 끝낸 미국인 무리 중 남자 아이가 다가와서 말했다. "식사하러 가려고 하는데 같이 갈래요?" 내가 내내 혼자 있으니 그들 눈에는 외로워보였나 보다. "고마워. 어떡하지? 아직 샤워를 끝내지 않았는데?" 그들이 사라졌을 때에야 그들의 호의를 단번에 거절한 것이 미안했다. 결과적으로는 남아 있는 것이 나았다. 스펜서와 니콜라를 이곳에서 만났기 때문이다.

스펜서는 수비리에서 묵을 예정이었다. 어느 알베르게가 좋은지 알아보고 다니고 있었고 니콜라는 라라소아냐가 목적지였으나 혹시 아는 사람이 있는지 보려고 어슬렁거리며 염탐(?)하고 있었다. 둘 다 나처럼 혼자였고 나처럼 첫날 만났던 사람들을 찾으러 다녔다는 것을 알았다. 스펜서는 그가 어디에서 자든 상관없이 아침에 같이 출발하자고 했다. 오전 5시에 내가 묵는 알베르게 앞으로 오겠다고 했다. 

스펜서보다 뒤늦게 나타난 니콜라는 6km를 더 걸어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나도 내일 팜플로나까지 가는데 여기서 자도 충분히 걸어갈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니콜라는 내 말에 찬성했다. 알베르게를 고르던 스펜서도 곧 내가 묵는 곳에서 짐을 풀었다. 드디어 세 명이 같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어제의 짙은 안개. 힘든 피레네 산맥. 안개 속 우울 입자. 이제야 만나고 싶었던 사람들을 만나니 입이 터졌다. 나는 론세스바예스 침대 번호가 167번이었다. 앞자리 '1'은 1층을 의미한다. 67번째로 도착했다는 뜻이다. 니콜라는 2층에서 잤고 스펜서는 3층이라고 했다. 3층은 99개 침대가 한 공간에 배치된 곳이었다. 서로를 떨어뜨려 놓은 것은 안개였다고 우리는 입을 모았다. 유리의 안부를 서로 궁금해 했지만 아무도 그의 소식을 몰랐다.

이야기를 끝낸 스펜서가 대학노트에 꼼꼼하게 메모를 시작하자 니콜라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일 팜플로나'로 시작되는 질문을 연속해댔다. 나는 그가 물어볼 때마다 고개를 흔들었다. 그와 단둘이 동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그의 턱수염 때문이었다.

172cm 키에 마른 체형. 길고 마른 턱에 그는 수염을 길렀다. 나는 그 수염을 염소수염이라고 놀렸다. 유쾌하고 개방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는 상징적인 염소수염(지극히 주관적인 해석이다). 내게는 일정한 거리를 둬야겠다고 생각한 표식이기도 했다(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든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는 12일 간 휴가기간에만 까미노를 걷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즐겁게 걷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물었다. "생맥주나 한 잔 하러 갈까? 다리 옆에 식당 있지, 그곳에서?" 나는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알베르게 빨랫줄에는 전날 는개비를 맞아 마르지 않은 빨래가 햇살 바람에 뒤척이고 있었다. 땀이 찼던 배낭 안쪽도 어느 정도 꼬들꼬들 해졌다. 맥주 한 잔 마시고 약간 취기 오른 기분으로 아르가 강에서 발을 넣거나 동네 한 바퀴를 돌면서 피로를 풀어도 좋을 시간이었다. 스페인 여름 햇볕은 저녁 9시가 지나도 저물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동무가 두 명이나 있었다. 안개도 없었다. 어제처럼 우울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되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술과 커피를 내 몸이 거부하고 있다는 것을. 심리적인 이유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나'를 혹사시키면서 왜 늘 먹던 음식을 내놓지 않느냐고 내 몸이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어디에서 김치찌개를 구한단 말인가. 급기야 고기와 밀가루 음식에 지나칠 정도로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불행하게도 내 시련은 시작일 뿐이었다.

다음날, 스펜서와 5시에 출발해서 부지런히 걸어간 곳은 팜플로나가 아니라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길이었다. 21km면 도착할 거리를 어렵게 내려온 급경사 길을 6km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야 했다. 총 34km를 걸어서 팜플로나에 도착했을 때, 내 체력은 방전 되다시피 했다. 그것도 허비한 시간을 만회하겠다는 듯이 쉬지 않고 걷는 긴 다리 스펜서를 따라 가느라 내 짧은 다리는 두 배나 더 빨리 움직여야 했다. 그날 30일 내내 나를 힘들게 했던, 발가락에 물집이 잡힌 첫날이었다.

팜플로나, 헤밍웨이

팜플로나에 있는 광장
 팜플로나에 있는 광장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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팜플로나는 산 페르민 축제(Festival of San Fermin)로 유명한 도시다. 산 페르민은 스페인 북부 나바라 주의 수호성인이자 3세기 말 주교였다. 그를 기리기 위해서 매년 7월 6일에 나바라(Navarra) 주의 주도인 팜플로나에서 축제를 연다. 7월 6일 정오에 시작해서 7월 14일 자정에 끝난다. 매년 1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이 방문한다. 대표적인 행사로는 소몰이, 투우, 행진, 폭죽 터트리기 등이 있다.

산 페르민 축제를 20여일 앞둔 광장은 차분했다. 스펜서와 나는 팜플로나 공립 알베르게에 배낭을 벗어놓고 카스티요 광장에 앉아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내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빵 한 조각을 먹고 오전 내내 걸었다. 그것도 뭔가를 먹어둬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서였다.

길을 잘못 든 스펜서가 미안했는지 스파게티를 사주겠다고 했지만 나는 도저히 밀가루 음식을 입에 넣을 수 없었다. 광장을 돌아다니다가 볶음밥과 비슷한 것('빠에야'라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을 발견했다. 포장된 거라 그것을 사서 광장 중앙에 앉았다.

"스펜서, 피곤하지 않나요? 왜 그렇게 서둘러 걸어야 했죠?" 나는 그에게 미처 물어보지 못했던 것을 물어봤다. "열두시가 지나면 더울 것 같아서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 스펜서가 대답했다. 그리고는 내 눈을 보고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피레네 산맥 기억나지 않아? 내가 느려지면 나를 두고 혼자 갈 것 같아서 죽을힘을 내서 걸었지?" 나는 좀 새침하게 있었는데 그 말을 듣고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아니, 이렇게나 키 큰 어른이 애처럼 행동하면 되나요?" 라고 되받아쳤지만 그의 말은 진심 섞인 유머이지 싶었다. 

그의 진심을 알았다고 해도 점점 쇠약해지는 내 몸이 금방 원기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아우성을 치는 내 몸 여기저기를 달래주었다. 햇살은 바로 위에서 쏟아졌지만 햇살 속에 바람이 숨어 있는지 덥지 않았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데도 광장은 퍽 적막했다. 시간이 지나자 적막 속에서 어떤 함성이 몰려왔는데 그 함성이 내 피곤함을 조금씩 누그러뜨려 주고 있었다.

길을 잃고도 활짝 웃고 있는 스펜서
 길을 잃고도 활짝 웃고 있는 스펜서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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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터가 셰리(술)를 가지고 오기 전에 축제를 알리는 불꽃이 광장에서 하늘로 솟아올랐다. 쾅하고 폭발하더니 광장 저쪽 가야레 극장 위로 하늘 높이 회색 연기 덩어리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연기 덩어리는 유산탄이 폭발한 것처럼 하늘에 떠 있었고, 내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새로운 불꽃 하나가 그것을 쫓아가 밝은 햇빛 속에 연기를 흩뿌려 놓았다. 또다시 불꽃이 폭발하며 내는 눈부신 섬광이 보이더니 또 다른 연기 구름이 나타났다.

두 번째 불꽃이 터질 무렵에는 1분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 있던 회랑에 어찌나 사람이 많이 몰려왔는지 웨이터는 술병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든 채 군중을 헤치고 우리 테이블까지 모여들었고, 거리 아래쪽에서 피리와 젓대와 북을 울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피리를 날카롭게 불고 북을 쿵쿵 울리며 리아우-리아우(나바라 지방의 춤곡)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으며, 그 뒤에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춤을 추며 따라왔다.

젓대 소리가 멎으면 그들은 모두 거리에 웅크리고 앉았고, 젓대와 피리가 날카롭게 소리를 내고 나지막하고 단조롭고 속이 빈 듯한 소리로 북이 울리기 시작하면 그들은 다시 하나같이 공중으로 껑충껑충 뛰어오르며 춤을 추었다. 군중 속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들의 머리와 어깨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해는 다시 떠오른다>, 민음사 p.234


리아우-리아우. 나는 내 마음대로 흥얼거리는 가락이 나바라 지방의 춤곡일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다가 아주 우연하게도 고개를 돌리는 순간, 멀리서 오는 니콜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두 여자와 함께 나타났다. 그들의 옷차림새로 봐서 순례자는 아닌 듯했다.

"니콜라, 살사댄스 추러 가니?" 나는 일부러 큰소리로 아는 척을 했다. "노!(아니!)"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말을 믿을 내가 아니었다. 두 여자는 니콜라만 남겨두고 앞서 가고 있었다. 그는 나를 따라 씨익, 웃으면서 친구들이라고 했다. 나는 그를 몇 분 더 붙잡고 쓸데없는 것으로 놀려주고는 놓아주었다. 

니콜라는 내 놀림을 다 받아내고는 부지런히 두 여자를 따라 걸어갔다. 그의 총총거리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내 몸이 무거울 대로 무거워져서 더욱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그가 어제 제안한 대로 오늘 살사댄스를 추러 함께 갔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니콜라가 내 뒤꽁무니를 저렇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따라왔을까.

니콜라의 자유분방함과 여유. 그것은 침체된 분위기를 띄우는 불꽃 같은 에너지를 닮았다. 지금, 스펜서와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생기'였다. 잠깐 그가 부러웠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순례길이었다. 금욕적인 순례자는 될 수 없을지라도 그림자 정도는 닮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니콜라의 저 여유로움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순례자였다. 태생적으로 그늘을 거느리고 있는 그 무엇이 있는?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는 없었다. 서로 스타일이 다를 뿐이었다.

앞서 언급한 헤밍웨이 소설도 산페르민의 화려한 축제를 배경으로 전개되지만 그 이면에는 세계 제1차 대전 이후의 붕괴된 도덕적 관념, 쇠퇴한 삶을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공허함과 외로운 모습을 그려낸다. 역설적으로 이들이 뿌리내릴 수 없게 만드는 사회을 비꼰다.   

팜플로나 가는 길목 십자가에 있는 노란 리본
 팜플로나 가는 길목 십자가에 있는 노란 리본
ⓒ 차노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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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갈 듯 한 걸음걸이로 니콜라는 골목으로 완전히 사라졌고 헤밍웨이가 단골로 다녔다는 야외 카페에서는 생생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광장은 점점 늘어나는 여행객들로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가벼운 현기증과 한기에 몸을 떨었다.

알베르게에 돌아와서 광장에서 먹었던 것을 다 토한 뒤 오후 내내 잠을 잤다. 니콜라는 어제 스마트폰으로 보내준 호스텔로 갔는지 아니면 호텔에 투숙했는지 공립 알베르게에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렇게 보고 싶었던 유리를 만났다. 팜플로나는 큰 도시였고 아는 사람과 헤어질 수도 헤어진 사람과 뜻하지 않게 만날 수도 있는 곳이었다. 밤새 야외 카페에서 맥주를 마셔도 미열에 뜬 눈으로 아침을 맞이해도 간섭할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 순례길 프랑스길'은 2017년 6월 13일에 걷기 시작해서 7월 12일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 도착했습니다. 30일만의 완주였습니다. 그 다음 날, '세상의 끝'이라는 피니스테레와 묵시아까지(100km)까지 내처 걸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34일 동안 900km 여정을 마쳤습니다. 몇 십 년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34일의 여정은 짧을 수 있으나 걸으면서 느꼈던 것들은 제게 인생의 축소판처럼 다가왔습니다. 움츠린 어깨를 펴게 하고 긍정적인 미래를 내다보게 했습니다. 이곳에서 34일 간의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을 도란도란 풀어놓으면서 함께 공유하려고 합니다.



태그:#산티아고순례길, #산티아고, #피에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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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이자 문학박사. 저서로는 소설집 《기차가 달린다》와 《투마이 투마이》, 장편소설 《죽음의 섬》과 《스노글로브, 당신이 사는 세상》, 여행에세이로는 《자유로운 영혼을 위한 시간들》, 《물공포증인데 스쿠버다이빙》 등이 있다. 현재에는 광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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