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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서서 바코드를 찍던 박이 쓰러졌다. 응급실로 실려가기도 전에 박의 심장은 박동을 멈췄다. 심근경색이라고 했다. 작업장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들어올 때부터 병색이 완연했다고 누군가 수군거렸다. 화장실에서 볼일 보는 것도 시원찮더라는 말도 나돌았다. 회사에서는 박씨가 들어온 지 며칠 안 되었지만 최대한 성의를 표했다고 발표했다. 그다음주에는 아무도 박씨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23p

물류업체에서 택배상하차 작업을 하던 무오에게 새로 들어온 이부라는 사내가 접근한다. 이부는 파트너가 필요하다며 무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안하고 무오는 이를 받아들인다. 무오에게 떨어진 일은 타깃을 미행해 얻은 정보를 이부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가끔은 미행 이상의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소설은 무오가 최근에 맡은 임무와 함께 전개된다. 무오는 얼마 전부터 도트라 이름 붙은 사내를 하루 종일 감시해 왔다. 도트는 모리자동차 노동조합 지도부로 지난 수 년 동안 사측과의 투쟁을 일선에서 이끌어왔다. 수차례 주인이 바뀐 모리자동차에서 노조와 사측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왔다. 노조는 도트를 비롯한 지도부의 지휘 아래 사측과 투쟁을 벌여왔지만 협상은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다.

차츰 무오는 이부로부터 미행 이상의 일을 요구받는다. 이를테면 시위현장에서 전경을 향해 볼트를 집어던지는 따위의 일이다. 이런 일을 하는 건 무오 뿐이 아니다. 이부의 지령을 받고 집회현장에 간 다른 사내는 누구보다 맹렬한 기세로 전경을 향해 달려들어 격렬한 분위기를 일으키기도 한다.

도트를 미행하며 무오는 자신의 역할이 노동조합의 투쟁을 와해시키는 것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일이 진행되면 될수록 무오의 마음은 무겁기 짝이 없다. 무오는 집회현장에서 다른 노조원과 어울리고 도트의 연설을 들으며 그들에게 차츰 동화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노조의 투쟁이 정점에 치달음에 따라 무오에게 떨어지는 임무도 무거워지는데 무오는 자신이 선 위치와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통받는다.

소설의 모티브가 된 쌍용자동차 노조 투쟁

상황은 이랬다. 오 년 전부터 계속해서 사장이 바뀌고 있었다. 공장을 인수한 외국계 기업이 공장을 사들인 이유는 순전히 기술을 빼가기 위해서였다. 기술을 빼돌린 후 목적을 달성한 그들은 본토로 돌아가기 위해 다시 공장을 팔아야 했다. 하지만 철수하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회계법인과 짜고 고의로 부도를 냈다. 장부의 숫자 몇 개를 고쳐쓰는 것만으로 몇 년간 우수기업이었던 회사가 한순간 부실기업으로 둔갑했다. 공장은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구조조정을 거친 뒤 다시 인도의 기업으로 넘어갔다. -57p

책 표지
▲ 없는 사람 책 표지
ⓒ 은행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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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없는 사람>은 쌍용자동차 노조 투쟁을 모티브로 삼았다. 수십 년 간 SUV 명가로 불리며 소비자들의 신뢰를 받는 명차를 제작, 판매했으나 경영실패와 상하이 자동차의 기술유출 및 먹튀행각 이후 법정관리까지 들어간 쌍용자동차 사태가 노골적으로 반영됐다. 가까스로 청산 위기를 모면한 쌍용의 세 번째 주인이 인도의 마힌드라란 점이나 노동자들이 물과 음식, 전기가 차단된 채 77일의 점거농성을 벌인 사건 등이 모두 그대로 쓰였다.

소설은 공개된 기사나 기록에서 찾기 어려운 이야기를 중심 줄기로 삼아 독자 앞에 내보인다. 사측이 노조활동을 무력화하기 위해 용역을 고용해 집회를 폭력시위로 보이게 하거나 노조 지도부의 도덕적 흠결을 만들기 위해 수를 쓰는 모습이 무오의 시선에서 적나라하게 그려진다. 철저히 무오의 시선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에 모든 일을 주도하는 이부의 내밀한 부분까지 비추고 있진 못하다는 게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다.

소설은 모리자동차 투쟁의 맞은 편에 무오가 처음 일했던 물류업체를 위치시킨다. 모리자동차 현장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돌아보지 않는 자본의 폭압적 행태를 내보여 무오가 도피할 곳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주려 함이다. 작가는 다만 이 같은 현실을 깊이 있게 묘사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뚜렷한 가치관 없이 살아가던 무오가 점차 자신의 생각을 갖게 되지만 끝내 현실을 바꾸는데 실패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그린다.

박의 죽음을 통해서 무오가 배운 것은 인간은 필요하지 않은 일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실이나 진실 같은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반대로 무언가가 필요하다면 없는 일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건강했던 박은 갑자기 입사 때부터 체력이 안 좋았던 것으로 합의되었다. 박을 데려온 황도, 늘 같이 퇴근해서 술잔을 나누었던 최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딴지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미련하다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누구보다 성실하게 작업했던 박이 애초부터 작업을 따라가지 못했던 고문관으로 뒤바뀌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인터넷신문 기사에는 박이 일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도되었다. 그의 죽음이 회사 탓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53p

만난적 없는 인물을 상상하다

감시대상인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 분) 부부를 감시하며 점차 그들의 삶에 감화되는 비즐러(울리히 뮤흐 분). 비즐러는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삶에 눈을 뜨게 된다.
▲ 타인의 삶 감시대상인 극작가 드라이만(세바스티안 코치 분) 부부를 감시하며 점차 그들의 삶에 감화되는 비즐러(울리히 뮤흐 분). 비즐러는 그로부터 자기 자신의 삶에 눈을 뜨게 된다.
ⓒ 에스와이코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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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사람>은 2012년 창비신인소설상을 통해 등단한 젊은 작가 최정화의 작품이다. 그녀가 지난 1년 간 문학잡지 'AxT'에 연재한 첫 장편을 정리해 묶은 것으로 주인공인 무오와 사건을 주도하는 이부, 실제 삶에서 급격히 무너져 가는 도트를 주요 등장인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야기는 여러모로 2006년작 독일영화 <타인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1980년대 냉전 당시 동독 비밀경찰 신분으로 극작가 부부를 감시하는 임무를 맡은 비즐러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이다. 하루 종일 극작가 부부가 나누는 대화와 통화를 엿들으며 이들을 감시하던 비즐러는 차츰 그들의 모습에 감화돼 자신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타인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삶에 눈 뜬다는 이야기,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 묵직한 역사, <타인의 삶>이 관객들에게 던진 감동은 결코 작지 않았다.

그와 유사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 이 소설이 영화와 차이를 보이는 건 캐릭터에 대한 묘사와 이해의 정도다. 저자가 직접 작가의 말 등을 통해 밝힌 것과 같이 처음 초점을 맞춘 인물 도트를 비롯해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점이 이 같은 차이를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다.

지난해 저자에게 제7회 젊은작가상을 안긴 섬세한 내면 묘사는 주인공 무오에게 집중됐다. 연재 초반 제목이었다는 <도트> 역시 무오를 뜻하는 <없는 사람>으로 교체됐다. 저자가 가장 큰 매력을 느꼈다는 이부는 부족한 자료조사 탓에 캐릭터에 현실성이 부여되지 못했다.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이부와 그가 꾸미는 일에 대해 충분한 설명이 이뤄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이러한 탓이리라 판단한다.

많은 조사도, 많은 수정도 하지 않는 작가, 그보다는 만난 적 없는 인물의 내면을 상상하는데 온 역량을 집중하는 것으로 알려진 최정화의 소설 창작은 단점만큼 매력적인 구석도 적지 않다. 그의 소설이 쌍용자동차 문제란 한국의 현실에 마주 닿자 결과물은 현실과 가까우면서도 꼭 같지는 않은 무엇이 되었다. 그로부터 오늘의 독자들에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이 소설의 역할은 다한 게 아닐까 생각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없는 사람 / 은행나무 / 최정화 지음 / 2016. 11. / 13000원>



없는 사람

최정화 지음, 은행나무(2016)


태그:#없는 사람, #은행나무, #최정화, #김성호의 독서만세,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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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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