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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 박숙이 할머니는 바로 얼마 전인 12월 6일 영면하셨다. 할머니는 소녀상 아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셨지만 규정상 불가능한 일이어서 안타깝다고 김서경 작가는 눈시울을 붉혔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업실 내에 놓인 작품들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업실 내에 놓인 작품들
ⓒ 아름다운마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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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집회 1000회를 맞던 날, 집회 자리에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지다

2011년 12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요구하며 일본대사관 맞은편에서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던 집회(수요집회)가 1000회를 맞는 날이었다. 그날 집회 자리에 세워진 평화의 소녀상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심정과 일본의 후안무치를 드러내는 상징이 되고 있다. 그리고 2016년 12월 10일, 서울 강북구청 앞 소나무길에도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주민들의 자발적 모금과 노력으로 이루어진 결과다.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사람은 김서경, 김운성 작가 부부다. 부부를 만나고자 일산으로 향했다. 이날도 부부는 '전쟁과여성 인권박물관' 에 설치될 할머니 두 분의 조각상을 만드느라 작업실에서 흙으로 밑작업을 한창 하고 있었다. 이달 말에 완성해야 하는 일정이어서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면서도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부부는 동학 100주년 기념 무명 농민군 추모비, 친일문제 연구가 고 임종국 선생 추모조형물 등을 제작했고, 최근 강북 근현대사기념관 앞에 세워진 독립민주기념비도 그들의 작품이다. 한국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조각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온 부부에게 평화의 소녀상은 동일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작업실 옆 자택에 놓인 계단을 오르자 구명조끼를 입은 세월호 소년, 소녀를 형상화 한 작품이 자리 잡고 있다.

김서경 작가는 들고 다니던 손전화에서 영상을 하나 보여주었다. 홍천 팔렬고 학생들이다. 이들은 지난 11월 가로 세로 30cm 작은 소녀상을 교내에 세웠다. 역사동아리 '두메꽃' 학생들을 중심으로 텃밭을 가꾸고 축제기간에 모은 돈으로 비용을 마련했다며 기특해했다. 평화의 소녀상은 현재 전국에 50군데 넘게 세워졌고, 해외에도 여섯 점 이상이 설치되었거나 설치될 예정이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소녀상이 있는지 물으니, 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소녀상 외에 남해군 숙이공원에 놓인 작품이라고 한다. 이 소녀상의 주인공은 박숙이 할머니이다. 할머니는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다가 일본군에게 끌려가셨고 큰 아픔을 겪으셨다. 박숙이 할머니는 바로 얼마 전인 12월 6일 영면하셨다. 할머니는 소녀상 아래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남기셨지만 규정상 불가능한 일이어서 안타깝다고 김서경 작가는 눈시울을 붉혔다.

"(평화의 소녀상은)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 20년 역사를 기록하려 한 것인데, 그전에 할머니들이 겪은 고통의 역사까지 담고 싶었어요. 할머니들이 이 고통의 시간을 통해서 여성운동가, 평화운동가가 되셨는데, 오래전 고통당하셨던 그 시절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아, 끌려가서 이런 수모를 당했구나 하고 역사를 상상할 수 있도록 고리를 만드는 거죠. 그러길 바라는 마음으로 작업을 했어요. 그게 통한 것 같아요."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 때 특히 얼굴에 많은 공을 들였다.

"모델이 있었던 게 아니었고, 화, 울분, 슬픔, 희망까지 표현하고 싶은 욕심이 있었죠. 사람들이 그 부분을 읽어주기 바랐는데, 정말 읽더라고요. 제막한 첫날부터 자신이 걸고 있던 목도리로 발싸개도 해주고 그랬어요. 지금 할머니들의 삶이 연관되면서 상상력, 공감력이 증폭된 것 같아요. 일본대사관 앞이었으니까 또 가능하고. 그게 한꺼번에 작품을 만든 것 같아요."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에 세워질 작품의 흙작업에 몰두 중인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에 세워질 작품의 흙작업에 몰두 중인 김서경, 김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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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업실 내에 놓인 작은 소녀상(오른쪽)
 김서경, 김운성 작가의 작업실 내에 놓인 작은 소녀상(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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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배운 문제의식, 지금 삶에도 영향을 주고 있어

자신들이 고마운데 할머니들이 오히려 고맙다는 말을 많이 하신다고 한다. 현재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서른아홉 분이 생존해계신다.

"이렇게 증인들이 사라지기를 일본 정부는 기다리는 거니까 정말 나빠요. 소녀상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일본 정부는 소녀상을 치우라고 해요. 할머니들만 모두 돌아가시면 증인이 사라지는데 자신들이 한 짓을 기억하는 증거물이 생기니까…. 그래서 오히려 저희는 뿌듯해요."

부부는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80년대에 대학을 다녔다. 대학시절 같은 과에서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학창시절 배운 것은 지금의 삶에도 문제의식을 가지고 살아가게끔 영향을 주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알게 되고, 세상에 불합리한 게 있고 소통으로 하나하나 해결해나가야겠구나 하는 마음이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조각으로 세상 변화에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작은 조각전'이라 해서 조각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작업을 꾸준히 했고, 교육문제를 다루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티브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작품도 만들었죠."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에 세워질 조각의 흙작업에 몰두하는 김서경, 김운성 작가
 전쟁과여성인권 박물관에 세워질 조각의 흙작업에 몰두하는 김서경, 김운성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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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예술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조각가는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어떤 책임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대형 건축물 앞에 설치된 조각품 이야기를 부부는 들려주었다.

"그게 돈이 돼요. 그거 따내려고 로비도 해요. 설치 의무규정이 86년부터 실행이 됐고 삭막한 도시 환경을 아름답게 해보자는 취지였는데 오히려 조각계의 덫이 됐죠. 조각가가 아니라 전문회사가 계약을 따내요. 연구하고 학생들 가르치는 데 힘을 쏟아야 할 교수들이 그 계약을 따내려고 바빠요. 조각 예술이 사회에 어떤 영향 미칠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잘못됐어요. 저희가 돈을 좇았으면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됐어요. 미술학원 그만두었을 때도 가치가 안 맞아서 그만뒀어요. 아이엠에프 맞으면서 힘들어졌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가요. 힘이 없으면 무너지잖아요. 내가 추구하는 가치를 생각하며 힘을 내야죠."

부부는 미술학원을 운영하다가 추구하는 가치가 맞지 않고, 제도권 교육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학원 운영을 그만두었다. 자녀들은 홈스쿨링을 하거나 대안학교를 보냈다. 김운성 작가는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학교 측에 '때리지 말 것', '숙제 내지 말 것' 등을 요구했던 사건을 들려주었다.

"이런 학부모는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장학사가 왔길래 학교에서 신체발육, 인성교육, 지혜를 배워야 하는데 모든 면에서 교육되는 게 없다고 했지요. (아이와) 대화가 중요해요. 대안학교를 가든, 공교육을 보내든 대화가 잘되어야 해요. 초등 2, 3학년 때 대화가 안 되는 건 사춘기가 빨리 온 게 아니라 대화가 안 되는 거예요."

소녀상 제작 후 자녀들이 '몸 관리 잘해라'. '몸 조심 해라', '아직도 할 일 많다'는 식으로 자신들을 응원한다며 김서경 작가는 웃음을 보였다. 12월 28일, 부산 일본영사관 앞에 소녀상 한 점이 설치될 예정이었으나 강제철거되고 말았다. 일본대사관 앞에 평화의 소녀상이 결국 설치되었듯 소녀상은 세워지리라 믿는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아름다운마을신문 73호(2016년 12월)에도 실렸습니다.(http://admaeul.tistory.com/)



태그:#아름다운마을신문, #소녀상, #김서경, #김운성, #위안부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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