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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은 약방. 고광립 약업사가 역사 깊은 나무간판을 가리키고 있다.
 한적한 시골에 자리잡은 약방. 고광립 약업사가 역사 깊은 나무간판을 가리키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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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살기 좋아졌다"란 말이 담고 있는 의미 중 하나가 의료복지다.

몸이 아파도 지척에 병의원이 있어 걱정이 없다. 그것도 내과, 외과, 소아과, 치과 등등 아픈 부위별로 전문적인 치료를 언제든지 받을 수 있다. 의료보장제도의 혜택으로 간단한 질병이라면, 가난이 치료를 받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시절이 있었다. 배가 아파 뒹구는 남편 때문에 또는 불덩이가 된 자식을 눕혀 놓고 몇십리 밤길을 달려와 약방문을 두드리기 일쑤였고, 경기 난 애를 들쳐업고 침쟁이를 찾아 고샅길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바로 40~50년 전 그 시대에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살았다.

산면에 딱 한 곳

고광립 약업사가 약방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고 있다.
 고광립 약업사가 약방 안에서 환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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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군 봉산면사무소에서 면천 쪽으로 화전·궁평리를 지나 3㎞ 정도 가면 마교교차로가 나온다. 거기서 우측방향으로 몇걸음 더 가면 행길가에 평화당약방(마교리 148번지)이 있다. 야트막한 함석지붕집 문설주에 세로로 나무간판을 내건, 흑백사진으로나 볼 수 있을법한 50여년 전 옛모습 그대로다.

봉산면에는 면소재지 영수당약방(약업사 김성환), 하평리 덕산중학교 인근 광제당약방(약업사 강태우) 두 곳이 더 있었는데 모두 간판을 내렸고, 이제 평화당약방 한 곳만이 남았다. 시대가 변해 약방을 찾는 이는 가뭄에 콩나듯 해도 약업사 고광립(80)옹은 꼿꼿하게 그 자리에서 약방을 지키고 있다.

평화당약방이 '평화당약포'란 상호로 지금 자리에서 처음 문을 연 때는 1964년으로 52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의 나이 28세때다.

해방이후 우리나라는 전국적으로 무의무약촌(無醫無藥村)이 많았고 정부는 약종상허가제도를 만들어 운영했다.

"할아버지께서 한·양방을 하셨고, 아버지(고시중)는 왜정시대에 평양의전을 나왔어. 면천에서 양의와 한의를 겸해서 하셨지.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어깨너머로 보고 자라서 그랬는지…. 평생 아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하게 됐네. 특별히 다른 할 일이 없었기도 했고."

그가 약업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은 1967년이다. 이듬해 충남도지사로부터 정식허가를 받아 '약포'를 평화당약방으로 등록했다.

그는 또 약업사를 취득하기 전 가업으로 내려온 한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1961년 서울의 한 전문학원에서 침구학을 이수해 한국침술연합회 회원이 되기도 한다.

"군대 제대하고 잠깐 놀다가 약포를 열었는데 쌀두짝 돈사가지고 시작했어. 뭐 가진 게 있어야지. 약장(진열장) 하나 장만하고 예산 정해종씨가 하는 삼선약도매상에 가서 그저 몇가지씩 떼다가 팔았지. 그냥 목구멍에 풀칠 할 정도였어."

'약포'에서 '약방'으로 바꾼 뒤, 매약 가지수도 차츰 많아졌다. 특히 약방 주인이 침술을 제대로 배운 사람이니 그 시절 몸이 아픈 사람들에게는 구세주나 다름이 없었을 터이다. 지금이야 한의사 면허가 없으면 침을 놓을 수 없지만 그 때는 몇 개 마을건너 한명씩 있는 침쟁이에게 많은 사람들이 아픈 몸을 의지했다.

평화당약방이 시골에 자리잡긴 했어도 판매권역은 보기보다 넓었다. 본 바닥인 마교리와 옹안·금치·궁평리 그리고 면천관내인 자개·율사·문봉·대치리 8개 마을주민들이 평화당약방을 드나들었다. 1970년대 마교리만 해도 100호(500여 명)였다고 하니 약방권역 안에 사는 주민수가 3000명은 됐을 것이다.

"한밤중에도 문을 두드렸지"

평화당약방 안, 50여년 넘은 진열장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평화당약방 안, 50여년 넘은 진열장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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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방은 문 열고 닫는 시간이 따로 없어. 한밤 중에도 '나 죽는다'고 문을 두드리는 게 다반사지. 애들 눈 흡뜨고 경기(의식을 잃고 경련)하면 업고 뛰어오고, 곽란(급체로 토하고 설사)난 사람 사관(통기를 위해 손과 발의 혈에 침을 놓음) 놓고 약주고…. 그래서 나으면 고맙다는 말듣고 그게 보람이었지 뭐! 돈은 못 벌었어. 여동생 둘 출가시키고 4남매 가르친 게 전부여."

가장 오랫동안 인기를 끈 매약이 뭐냐고 물으니 주저않고 '활명수'와 '쌍화탕'을 꼽는다. 한때 '이명래 고약'도 인기가 좋았고, 지금도 가끔 찾는 사람이 있다는데 안 나온 지 오래됐단다.

'부채표까스활명수'는 가장 오래된 한국브랜드다. 동화약방이 1897년에 내놓은 약으로 '목숨을 살리는 물'이란 뜻이다.

또 베이비부머세대가 잊지 못하는 추억의 약 중 하나가 '원기소'다. 60~70년대 어린이 영양제의 대명사였다. 살 만한 집만 벽장에 간수해 놓고 장남에게만 먹였다. 누르스름한 알약이었는데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렇게 반세기가 흘렀다. 이제는 자가용이 있어 교통도 편해졌고 무의무약촌엔 보건진료소를 설치해 약방문을 두드릴 일이 거의 없어졌다. 또 무엇보다 농촌인구가 크게 줄었다.

"예전엔 (물건 대주러) 도매상 몇 곳이 수시로 들렸는데 요즘은 한 곳에서만 와. 그것도 일주일에 한 번. 소화제, 감기약 조금 파는 거지, 그나마 담배도 파니까 손님들이 안 끊어지는 거야."

약방 안 벽에 걸려 있는 약업사 자격증과 허가증, 그리고 침구학원 졸업증서.
 약방 안 벽에 걸려 있는 약업사 자격증과 허가증, 그리고 침구학원 졸업증서.
ⓒ <무한정보> 이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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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자 소리 듣기 싫어 문을 내리지 않고 있다는 고광립 약업사는 한때 마을이장일도 봤고 노인회장도 맡아 지역에 봉사했다. 요즘은 마실가듯 약방 뒤에 있는 노인회관에 나가는 재미로 산다고 한다.

약종상허가제도는 1971년 폐지돼 사라진 지 45년이 지났다. 그래서 현재있는 약업사들이 약방문을 열고 있을 때까지만 유효하다. 예산군에는 현재 평화당약방 외에 △ 성신약방(예산로 25) △ 대동약방(예산읍 아리랑로1) △ 인화당약방(신양면 청신로 386) △ 상신당약방(광시면 광시리 85) △ 제중당약방(광시면 광시리 86-6) △ 대동약방(고덕면 중앙로 64) △ 오가약방(오가중앙로 88) 8곳이 남아있다. 협회 회장은 오가약방 안병출(83) 약업사이다.

고광립 약업사가 처음 약방을 할 때는 30곳이 넘었다고 하니, 많이도 간판을 내렸다. 반세기에 걸쳐 주민들과 애환을 함께 해온 약방들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서 사라지지 않고 이정표가 되면 좋겠지만 추억의 뒤안길로 사라질 날이 머지 않은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 보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와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약방, #약업사, #무의무약촌, #침술,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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