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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 설날, 성탄절, 석가탄신일, 삼일절. 모두에게 즐거운 날이 되어 마땅한 이런 날들이 불쾌하게 여겨질 때가 있다. 불법을 저지른 정치인과 재벌들이 감옥에서 줄줄이 풀려나올 때다.

이런 광경을 보고 있자면 특별사면이 말 그대로 특별한 이들이 받는 사면인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긴, 사실이 그렇다. 특사는 돈있고 백있는 사람들이 처벌을 피하는 창구로 이용돼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법치주의의 기본원칙을 훼손하고 사회정의를 땅에 떨어뜨리는 제도로 전락한 지 오래다.

특사 중에서도 가장 불쾌한 건 경제위기를 핑계로 경제사범을 풀어주는 것이다. 회삿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쓰고 회계를 조작해 금융질서를 어지럽힌 경제사범들이 무슨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건지. 매년 반복되는 재벌특사는 가히 부조리의 극치라 할 만하다.

피해액만 수백억대에 이르는 중죄를 저지르고도 권고된 양형에 미치지 않는 형량을 선고받은 재벌이 수두룩하다는데, 그 가운데 태반은 특사로 형기를 마치기도 전에 풀려나오니 과연 이 나라에 정의가 있기는 한가 싶다.

이번 광복절에도 이재현 CJ 회장을 포함해 4876명의 광복절 특사가 단행됐다. 김승연 한화 회장, 최재원 SK 수석부회장 등 사면후보로 예상된 재벌과 정치인은 대부분 제외됐다. 여론 악화를 고려해 사면을 최소한도로 진행한 결과다.

다만 이를 재벌에 대한 정권의 입장 변화로 해석하기엔 무리가 따른다. 여론이 악화되지 않았다면야 구본상 전 LIG넥스원 부회장, 담철곤 오리온 회장, 현재현 전 동양그룹 회장, 강덕수 전 STX그룹 회장, 이호진 전 태광그룹 회장,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 조석래 효성그룹 회장까지 줄줄이 사면받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들의 죄명을 들여다보면 입이 떡 하고 벌어진다. 거침없는 회계사기와 회삿돈 빼돌리기, 대규모 탈세는 기본이다. 정상적인 시민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범죄를 저지르고도 교도소에서까지 특급대우를 받다가 때가 되면 특사로 풀려나오니 돈이 법 위에 있고, 사람 위에 있는 세상이라 할 만하다.

그러니 이들이 어디 돈 없는 사람을 존중할 수가 있겠는가. 최근 몇년 간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한국사회 재벌들의 사고가 어느 지경에 와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부터 김만식 몽고식품 회장, 이해욱 대림산업 부회장, 정일선 현대BNG스틸 사장의 갑질 논란이 그것이다. 직원을 몸종 취급하고 폭언과 폭행을 일삼은 이들의 만행은 재벌의 특권의식을 만천하에 까발렸다.

자, 그렇다면 재벌이란 어떤 존재일까. 도대체 재벌이란 무엇이기에 한국 사회 제일 가는 기업 총수의 성매매 동영상이 공개됐을 때 그 사실 여부만큼이나 이것이 보도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렸던 것일까. 재벌 한 명 나오지 않는 드라마가 없을 만큼 친숙하지만 정작 재벌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은 한국에서 재벌을 이해하는 건 한국 사회를 온전히 알아가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여기 재벌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책 한 권이 나왔다.

책 표지
▲ 툭 까놓고 재벌 책 표지
ⓒ 왕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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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까놓고 재벌>은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다는 '이이제이'의 대표 진행자 이동형의 책이다. 한국 사회의 비틀린 역사가 낳은 재벌이란 집단을 그 탄생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날 것 그대로 적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설명하는 재벌의 성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 일제가 버리고 간 생산수단을 불하받아 이익을 취하고 2. 미국과 정부의 막대한 자금지원을 독차지하며 3. 탈법적인 인수합병을 감행하고 4. 시장을 독점하며 5. 문어발 확장을 시도하고 6.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막강한 세력을 구축해 7. 마침내는 골목까지도 침탈한다는 것이다. 모두가 부패한 권력과 유착해 벌이는 일이며 이를 통해 재벌은 전체 사회의 존속을 위협하는 '암덩어리'가 되어 간다.

재벌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부패한 권력은 마땅히 사회 전체가 누려야 할 자산을 일부 기업에 특혜로 몰아주고 그 대가로 검은 돈을 지원받는다. 그렇게 성장해온 권력과 재벌은 자신을 위해 서로 간에 강력한 유착관계를 형성한다.

이렇게 커온 재벌에게 혁신이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다수 대중은 재벌과 권력이 영합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서도 그에 대항할 기회를 놓쳐왔으므로 오늘의 상황을 마주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읽고 보면 틀린 말 하나 없다. 더구나 책이 다룬 두산, 선경, 한화, 대성, 쌍용, 한진, 삼성, 대우 등의 사례가 재벌의 탄생과 성장을 너무나 명료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어 이전까지 재벌에 대한 지식이 없던 사람이라도 문제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무엇보다 재벌이 오늘의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하기에 재벌을 바로 이해하는 건 한국사회 전체를 온전히 알기 위한 필수적 과정이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의 역할을 돌아보는 건 지나간 세대가 다가올 세대에 져야 할 책임이 무엇인지를 알게끔 한다. 이 책의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책의 마지막에서 저자가 내놓은 결론은 모두가 알 수 있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수도 없이 들었던 경제민주화와 그와 관련된 논의가 그것이다. 저자는 노동자의 삶이 나아지는 게 곧 재벌의 영속에도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설득하고 번 만큼 세금을 낼 것과 부동산 투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한다. 독점과 수탈을 중단하고 공정경쟁에 돌입하라는 구호도 뒤따른다.

생각해보면 이토록 온건하고 정당한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한국사회의 비극이다. 더불어 책이 대부분의 장에 걸쳐 역설하는 재벌의 속성에 따르면 이러한 개혁을 재벌이 먼저 받아들이길 기대하는 건 순진함을 넘어 멍청한 일이다.

결국 답은 정치에 있다. 소수 재벌이 역시 소수 권력자와 영합해 다수 대중의 이익을 가로채 왔음을 알리고 이제 맞서 싸워야 할 때가 왔음을 전하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목적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툭 까놓고 재벌 - 그토록 숨겨두고 싶었던 대한민국 재벌의 탄생과 성장 이야기

이동형 지음, 왕의서재(2016)


태그:#툭 까놓고 재벌, #왕의서재, #이동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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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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