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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장>

반 시진 만에 장문의 글을 완성한 기승모는 두 제자가 글을 읽는 동안 눈을 감고 있다. 관조운과 혁련지가 글을 다 읽고는 벼루에 먹을 적셨다.

"그럼 허산선사께서 사숙님을 치료해주셨나요?"

혁련지가 물었다.

"그렇다. 3년 전 사형이 나를 허산선사께 데려왔을 당시에도 나는 주화입마에 빠져있었다. 단(丹)이 뇌에 갇혀 태양혈이 불길에 휩싸였고 수시로 뇌음(雷音)이 천둥처럼 울려서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때 허산선사가 나의 관규를 뚫어주었다. 백약이 무효였고 강호의 온갖 기공도 소용없던 나의 단이 마침내 탈출하게 된 것이다.

소림의 내가기공이냐니까, 선사는 아니라고 하셨다. 소림을 나와 천하를 주유하다가 서쪽 변방에서 벽(碧)이라는 기인을 만났는데 그에게서 배운 운용법이라고 하셨다. 나의 기가 천축의 흐름과 상응하기에 통할 수가 있었는데 진경의 저술에 참여한 천축승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 선사는 추측하셨다."

사숙은 그때의 일을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으로 허공을 보더니 멈칫하며 다시 붓을 놀렸다. 

"사형의 문집을 보여다오."

관조운이 바랑에서 사운첩(思雲帖)을 꺼내 건넸다. 사숙은 천천히 음미하듯 책장을 넘기다가 사형의 작시가 나오면 멈추어 유심히 보았다. 속으로 몇 번이고 되씹는 것 같았다. 마지막 면까지 읽자 책장을 덮은 후 사숙은 붓을 들었다.

"사형이 너희를 이곳으로 보낸 까닭을 알 듯도 하구나."
"저희가 애초에 묘적암에 올 적에는 스승님께서 나머지 두 가지 유품, 즉 부채와 그림을 벗인 허산선사님께 맡겨놓으신 줄로 알고 온 것입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입적하고 말았으니 난감하기 그지없습니다."

관조운이 적었다.

"사운첩을 편집한 시점을 말해보려무나."
"저희도 그 점을 생각해보았는데 시점이 애매합니다. 문집 어디에도 날짜는 적혀 있지 않습니다. 제가 추정컨대 허산스님 입적 이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허산스님이 생존해 계셔야 누군가가 찾으러 오더라도 그것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관조운이 적었다. 이때 혁련지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붓을 달라고 했다.

"제 생각은 달라요. 애초 사부님이 허산스님에게 유품을 맡기신 건 맞다고 봐요. 그러나 스님이 이숙님을 치료해드리는 과정에서 입적을 하시자 이제 그 유품을 누구에게 맡겨야 할지 난감해지신 거예요. 이숙님에게 맡기시기에는 아직 완치가 안 돼 불안하셨고, 담 사숙님은 미덥지 못하셨던 거예요. 그래서 허산스님이 입적하시자 문집을 만드신 다음 담사숙님 몰래 자운헌에 갖다놓으신 거죠."

"굳이 자운헌에 갖다놓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관조운이 적었다."
"어쩜 사부님은 동창으로부터 진경의 소재를 알려달라는 위협을 받고 있었을 지도 몰라요. 금의위는 금의위대로 사부님을 무예서 편찬이라는 명목으로 초빙하면서 진경의 행방을 은근히 추궁했을 것이고요. 이런 입장에서 사부님으로선 셋째 습사숙이나 넷째 담사숙에게 맡기는 게 순리겠지만, 습사숙은 강호의 연을 끊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시는 분이니 새삼 부담주기 싫었을 것이고, 담사숙은 편지에서 보듯이 진경에 대한 욕심이 있으신 것 같으니까 꺼림칙하셨던 겁니다. 그래서 직접 맡기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관계가 없지도 않은 담사숙의 별장에 숨겨놓으신 거죠."

혁련지가 매끄럽게 적어나갔다. 

"혁련사질의 생각이 맞는 것 같구나."

기사숙이 일필휘지로 적었다.

"그렇다면 여전히 사운첩에 그 실마리가 있는 것으로 봐야 겠네. 관조운이 혁련지를 쳐다보며 말했다. 혁련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가 설핏 기울며 창호에 엷고 붉은 띠를 그었다. 산사의 밤은 일찍 찾아왔다. 저녁 예불시간이라며 기승모가 일어섰다. 그가 두건을 벗자 민머리가 나타났다. 그는 정식 출가를 하지 않았지만 불심(佛心)에 귀의한 모양이었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예불에 참석했다. 예불을 주관하는 스님이라곤 오로지 정운수좌 한 명이었고, 기승모가 정운의 뒤에서 절을 하며 염불을 따라했다. 비록 나이로는 손주벌이지만, 출가승이 예식을 주관하는 것이 불가의 법도였다. 탑을 세울 정도의 큰스님이 난 절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라한 암자였다.

예불 후 소박한 공양식을 마치자 정운수좌는 관조운과 혁련지를 요사채로 안내했다. 요사채는 거실을 중심으로 좌우에 두 칸씩의 방이 붙어있다. 사찰에 남녀가 유별한지라 그들은 거실을 사이에 두고 반대 방향으로 헤어졌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다. 산중의 괴괴한 정적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혁련지는 요사채 방에 몸을 뉘였다. 몸은 물 먹은 솜처럼 가라앉지만 상념은 향불처럼 자꾸 솟아올랐다. 지난 보름 도안  스스로 생각해도 정신이 없었다. 느닷없는 관조운의 출현, 그리고 그와 함께한 정주, 운부산, 낙양, 숭산까지의 여정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이때 "사매, 혹시 잠들지 않았으면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하는 관조운의 목소리가 들렸다. 혁련지의 상념이 와하고 달아났다. "좋아요, 사형. 거실에 계세요." 혁련지가 답하고는 옷을 갈아입고 거실로 갔다.

관조운이 등잔불을 켰다. 둘은 서탁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내가 곰곰 생각해 보았는데 사운첩에서 자작시 배열에 수수께끼의 열쇠가 숨어 있는 것 같애. 사매는 스승님이 유품을 어디다 숨겨 놨다고 생각해?"
"탑림에 있는 허산스님의 탑이지 않을까요?"
"어떻게 그걸 알았어?"
"사부님의 작시 '빙탑(憑塔)'을 보세요."

관조운이 사운첩을 펼쳤다.

  <탑에 기대어>                                                          憑塔(빙탑)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부처님 세상에선       千佛千塔 佛國土(천불천탑 불국토)
구궁과 팔괘도 부처님 손바닥                                  九宮八卦 如來掌(구궁팔괘 여래장)
빈산의 외로운 탑은 미혹을 속에서도 빛나리니          虛山孤塔 迷中輝(허산고탑 미중휘)
다만 세월 속에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로다       唯歲歲待 於顯顯(유세세대 어현현)

관조운이 미소를 지으면서도 한편으론 서운한 듯 말했다.

"아니, 사매는 진작에 이 시를 염두에 두었으면서 왜 나한테 알려주질 않은 거지?"
"그전까진 확실친 않았어요. 이곳 묘적암에 와서 보니까 비로소 모든 게 맞아떨어진 거죠. 저의 추론은 허산스님 입적과 탑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했어요."
"맞아, 나도 이제 그걸 깨달아서 사매를 찾아온 거야. 허산스님의 탑이 있다는 전제를 두고 보니까 빙탑의 3구 '빈산의 외로운 탑은 미혹을 속에서도 빛나리니(虛山孤塔 迷中輝)'와 4구 '다만 세월 속에서 드러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로다(唯歲歲待 於顯顯)'의 의미가 확연히 다가왔어."

등잔불이 가물해지자 관조운이 심지를 잘라 불을 밝혔다. 입술을 꼭 다물고 생각에 잠긴 혁련지의 모습이 목련처럼 환해졌다. 

"제가 보기엔 3,4구엔 배경을 묘사한 것일 뿐이구, 1,2구에 핵심이 있어요. 1구는 소림의 탑림을 가리키고, 2구의 구궁과 팔괘에 어떤 의미가 숨어 있어요. 둘 다 숫자로 이루어졌잖아요."

"오, 사매의 말을 듣고 보니 거기에 숫자를 숨긴 것 같구먼. 구궁(九宮)이란 만물의 생성과 순환을 숫자로 표현한 것이고, 팔괘란 주역의 괘사를 일컬음이니까. 사부님은 몇 년 전부터 주역에 굉장히 심취하셨어. 유학의 근본이 역경에 있고 성현의 가르침도 주역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시며, 늘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

"그런데 사형께서 자작시 배열에 열쇠가 있다는 건 무슨 의미에요?"
"사운첩의 구성에 우리가 알지 못한 어떤 의도가 숨어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은 우리가 며칠 전에도 한 적이 있잖아."

"맞아요, 보통은 글의 종류와 원작자에 따라 분류하는 것이 일반적이죠. 그런데 유독 사운첩에선 사부님의 자작시가 이백, 두보, 동파의 글 사이에 두서없이 끼어 있었어요. 그건 사부님의 성격과도 맞지 않는 배열이라고 생각했었죠." "오늘 밤 사운첩을 다시 들여다보니, 사부님의 자작시가 적혀 있는 면이 무언가를 암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거야."

관조운이 사운첩을 들어 책장을 넘기며 계속 말했다.

"시와 부 총 육십사 수 중에서 사부님의 자작시가 여덟 수, 이들 중 우리가 찾는 그림과 부채와 관련된 의미가 있는 시가 다섯 수였어. 2면, 6면, 8면, 44면, 53면에 있는 시들이지. 이 숫자들이 뭔가를 가리키는 것 아닐까?"
"빙탑은 몇 면에 있죠?"
"53면이야."
"…."

혁련지는 팔짱을 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혹시 사형께서 승탑(僧塔)의 생김새를 잘 아시나요?"
"잘 모르겠는데……."
"됐어요. 낼 아침 기사숙이나 정운수좌에게 물어보죠. 두 사람은 실제 탑을 봤을 거잖아요.
"어차피 잠이 달아났는데, 사운첩을 제가 볼 수 있을까요?"

관조운은 사운첩을 혁련지에게 건넸다.
첨부파일
크기 줄임 400.jpg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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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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