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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
 인흥서원
ⓒ 추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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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仁興書院)과 문씨세거지(文氏世居地)는 대구 청룡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천내천을 사이에 둔 채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인흥서원의 주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730번지, 도로명 주소로 인흥2길 26이다. 문씨세거지는 본리리 401-2번지, 인흥3길 16이다. 도로명 주소로 보면 인흥서원과 문씨세거지는 제법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듯 싶지만 실제로 둘의 거리는 300미터 정도밖에 안 된다.

<명심보감>을 지은 고려 말의 추적(秋適, 1246~1317) 선생을 기리는 인흥서원과, 문익점의 후손들이 대대로 살아온 문씨세거지는 이렇듯 가까이 있다. 물론 대단한 선비 가문들이 이웃사촌처럼 정겹게 머물러 있는 광경은 아주 보기에 좋다. 문씨세거지를 방문한 나그네는 웬만하면 인흥서원을 찾고, 인흥서원을 둘러본 답사자 역시 십중팔구 문씨세거지의 골목을 거닌다.

인흥서원 강당
 인흥서원 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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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과 문씨세거지가 현재 자리잡고 있는 땅은 본래 사찰 소유였다. 문씨세거지 입구의 밭에 남아 있는 석탑 잔재 등은 온몸으로 그 사실을 부르짖는 증거물들이다. 하지만 보잘 것 없는 그 석탑 잔재를 보면서 옛날 이곳에 있었던 사찰이 일연 스님께서 1264년 이래 11년이나 머물면서 중창했던 인흥사라는 사실을 헤아리기는 참으로 어렵다. 어쨌든 숭유억불 정책이 한창이던 조선 시대 들면서 인흥사는 양반들에게 밀려 빈사 상태에 빠졌고, 지금으로부터 대략 150여 년 전에는 문씨들이 대웅전 자리에 종택을 짓게 되었다.

인흥서원이 지금 자리에 들어선 시기는 1825년(순조25)이다. 선비들은 당시 이곳 이름이 인흥마을이라는 데 착안하여 서원에 '인흥서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외삼문인 숭봉문을 지나면 펼쳐지는 강학 공간에는 동재와 서재를 두었는데 동재는 관수란, 서재는 요산료라 불렀다.

그리고 제향 공간으로 가는 통로인 내삼문에는 추모문, 사당에는 문현사라는 현판을 걸었다. 사당 옆에는 <명심보감> 판본을 보관하는 장판각도 별도로 건립했다. 장판각이 별도로 세워져 있다는 말은 인흥서원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재가 강당 등의 건물들이 아니라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37호로 지정되어 있는 명심보감판본(明心寶鑑板本) 31매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명심보감 판본을 보관 중인 장판각
 명심보감 판본을 보관 중인 장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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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은 '이 판본은 추계 추씨인 추적 선생이 편저한 것이다. 추적은 고려 원종 2년(1261) 문과에 올라 민부상서 예문관제학을 지냈다. <명심보감>은 공자 등 제자백가의 책과 시부 가운데서 쉽고 생활에 기본이 되는 내용을 골라 엮은 책인데, 이것은 국가에서 세운 학교의 학생들에게 심성수양의 기본서로 삼기 위함이었다. 현재 전하는 것은 고종 6년(1869) 추세문이 출판한 인흥재사본(仁興齋舍本)이 전수되어 국역 출판됨으로써 가정, 학교에서 교육용으로 널리 쓰여왔다. 이것은 총 31장으로 인흥서원의 목판이 유일하다. 이 판목은 중국, 일본에도 널리 보급되었으며, 영문으로도 번역되어 한국학 연구의 자료로 사용되기도 한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인흥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안내판 또한 <명심보감>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리 없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을 바탕으로 재작성된 현지 안내판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인흥서원 명심보감 판본은 국내의 다른 명심보감 판본에 비해 틀린 글자가 적고 글의 표현이 정확한데다 이율곡 선생 등 유학자들의 서문과 발문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와 '명심보감 판본은 인흥서원의 것이 유일본이다.'라는 대목이다.

인흥서원의 강당과 서재
 인흥서원의 강당과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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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누리집과 현지 안내판의 해설은 <명심보감>이 어떤 책인지, 인흥서원의 것이 어째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 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는지 잘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도 '공자 등 제자백가의 책과 시부 가운데서 쉽고 생활에 기본이 되는 내용을 골라 엮은 책'이라는 해설만으로는 <명심보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기가 어렵다. <명심보감>은 어떤 책일까?

명심보감(明心寶鑑) 네 글자를 한자의 뜻만 헤아려 읽으면 '마음(心)을 밝게(明) 해주는 보물(寶) 같은 거울(鑑)'로 풀이된다. 즉 우리나라의 <명심보감>은 대략 '고려 충렬왕(1274~1308) 때 추적이 어린이들의 학습을 위해 중국 고전에 나오는 금언과 명구를 뽑아 편집한 정신교육 서적' 정도로 간략하게 소개할 수 있다. 정신문화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이 책은 고려말, 조선초 이후 가정과 서당에서 아동들의 기본교재로 널리 쓰였으며, 수백년 동안 즐겨 읽혀지면서 우리 민족의 정신적 가치관 형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라고 평가한다.

인흥서원의 사당
 인흥서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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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차장 입구에 세워져 있는 또 다른 안내판도 읽어본다. 이 안내판도 제목은 '인흥서원'이지만 본문은 온통 <명심보감>에 관한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그만큼 <명심보감>은 인흥서원의 '얼굴'인 것이다. 안내판은 '인흥서원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 선생의 사당과, 추적 선생이 금언, 명구를 모아 저술한 책인 <명심보감>의 목판들이 소장되어 있다.'로 시작된다.

'한국 최초의 서원이며 안향 선생의 사당이 있는 소수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회헌실기> 권오 증보편에는 유교를 한국에 전파한 사람은 안향 선생과 추적 선생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1869년에 20대손 추세문 공이 인흥서원에 소장되어 있는 바로 이 목판들로 <명심보감>을 출판하였다.'

안향(1243~1306)이 중국에 가서 주자의 책을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초상화를 그려서 온 것은 1300년의 일이다. 안향은 또 1303년 관리를 중국에 보내 육경, 사서, 제자백가의 저서 등을 구해오게 했다. 안향보다 3년 뒤에 태어나 11년 뒤에 죽은 추적(1246∼1317)은 안향과 동시대 인물일 뿐만 아니라, <명심보감>을 편찬한 유학자이다. 그런 점에서, 안향의 전기에 해당하는 <회헌실기>가 '유교를 한국에 전파한 사람은 안향 선생과 추적 선생이라고 명시'할 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추적 선생 신도비
 서원 앞에 세워져 있는 추적 선생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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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흥서원에는 추적 선생 외에도 추황, 추유, 추수경 세 분을 더 배향하고 있다. 회암 추황(1198~1259)은 고려 때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로 추적의 아버지이다. 추적은 <명심보감>을 편찬한 외에도 1304년(충렬왕 30) 개경에 성균관을 세워 안향과 함께 이제현, 안축 등을 가르친 대유학자이다. 추유는 추적의 손자로 명나라 호부상서를 역임한 특이한 경력의 거물이다. 추적의 7대손인 추수경은 명나라에서 무강자사로 있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과 함께 조선에 와서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러나 추수경은 종전 직후 귀국하던 중 부상 후유증이 도져 전주에서 사망하였다.

인흥서원이 낳은 <명심보감>에는 재미있는 국제적 일화가 있다. 1957년 월남공화국 고 딘 디엠(吳廷琰)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다. 그 답례로 1958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이공(현 호치민 시)에 갔다. 두 대통령이 만난 자리에서 고 딘 디엠이 한 권의 책을 이승만에게 내놓으면서 "약 700년 전에 귀국으로부터 이 책이 우리나라에 전해져서 그동안 국민 필독서로 지금까지 내려 왔습니다. 이제 감사의 뜻을 담아 책을 돌려 드립니다." 하고 말했다. 고 딘 디엠이 내놓은 책은 다름 아닌 추적의 <명심보감>이었다.


태그:#인흥서원, #추적, #명심보감, #소수서원, #문씨세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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