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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기차

                                  김사인

모두 고개를 옆으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왁자하던 입구 쪽 사내들도
턱 밑에 하나씩 그늘을 달고 묵묵히 건들거린다.
해진 앞섶 사이로 런닝 목이 풀죽은 배춧잎 같다.

조심히 통로를 지나 승무원 사내는
보는 이 없는 객실에 대고
꾸벅 절하고 간다.

가끔은 이런 식의 영원도 있나 몰라.
다만 흘러가는 길고 긴 여행.

기차 혼자 깨어서 간다.
얼비치는 불빛들 옆구리에 매달고
낙타처럼.

무화과 피는 먼 곳 어디
누군가 하나는 깨어 있을까.
기다리고 있을까 이 늙은 기차. <현대문학> 2016년 1월호

시가 사상이거나 이념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현대문학>에 발표된 김사인 시인의 작품을 읽었다. 모쪼록 우리 시단에 난해하고 모호하여 독자의 시에 대한 흥미를 반감시키는 작품보다 쉽고 재미있으면서도 문학적 성취를 이루어내는 작품이 많이 생산되기를 소망하면서 <밤기차>를 읽는다. 

이 시를 읽으며 시가 사상이거나 이념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걸 다시 절감한다. 밤을 뚫고 달려가는 밤기차, 모두 졸고 있다. 모두 졸고 있는 객실을 향해 승무원이 의례적인 몸짓으로 꾸벅 절을 하고 간다. 야간열차의 극히 일상적인 풍경이 보일 뿐이다.

이 시에 깊이를 더해주는 시어가 있다. 영원, 낙타, 무화과다. 그로 인해 기차의 한 칸이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확장되고, 영원을 지향하면서도 깨어 있지 못한 일상을 이어가는 미망의 삶으로도 비치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사막 같은 인생을 기차 한 칸 풍경 속에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이 지루한 밤기차에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상이 숨어 있거나 시대에 던지는 어떤 메시지도 발견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마음을 파고드는 감동이 있다. 시가 무엇인지를, 시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밤기차 속의 사소한 풍경을 그저 묘사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독자가 재미를 느낄만하게 묘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어떤 시인은 "김사인 시인처럼 시와 사람이 일치하는 시인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김사인 시인과 가깝게 교분을 쌓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시 낭송하는 모습이나 시인들과의 대담 프로에 사회를 맡는 모습을 보면서 그 말이 타당하다는 걸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김사인 시인은 말투가 느리고 어눌하다. 아마 그런 말투는 그의 성격과도 연관 있고 그의 작품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의 시를 읽으면 어눌하고 느린듯하면서도 가장 적절한 시어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이 아주 탁월하다.

시 한 편 더 읽어보자. 

'굽은 허리가/ 신문지를 모으고 상자를 접어 묶는다./ 몸빼는 졸아든 팔순을 담기에 많이 헐겁다./ 승용차가 골목 안으로 들어오자/ 벽에 바짝 붙어 선다./ 유일한 혈육인 양 작은 밀차를 꼭 잡고.// 저 고독한 바짝 붙어서기./ 더러운 시멘트벽에 거미처럼/ 수조 바닥의 늙은 가오리처럼 회색벽에/ 낮고 낮은 저 바짝 붙어서기.// 차가 지나고 나면/ 구겨졌던 종이같이 할머니는/ 천천히 다시 펴진다./ 밀차의 바퀴 두 개가/ 어린 염소처럼 발꿈치를 졸졸 따라간다.// 늦은 밤 그 방에 켜질 헌 삼성테레비를 생각하면,/ 기운 싱크대와 냄비들/ 그 앞에 서있을 굽은 허리를 생각하면/ 목이 메인다./ 방 한 구석 힘주어 꼭 짜놓은 걸레를 생각하면.' <시 '바짝 붙어서기' 전문>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시인의 생각과 정서가 고스란히 내게 전달되어 온다. 작고 사소한 것에서 시대의 징표를 읽어내는 시인의 능력에 한 독자로서 박수를 보낸다.   

김사인 1956년 충북 보은 출생. 1982년 <시와 경제> 등단.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 <어린 당나귀 곁에서>. <신동엽창작기금><현대문학상><대산문학상> 수상.


태그:#김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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