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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책을 한 권 얻었다. <혜주-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피플파워). 저자 소개는 단 2줄이다.

정빈
"지난 30여 년간 역사연구와 저술을 해왔다.
더 이상의 작가 소개는 원하지 않았다."

황당했다. 세상에 21세기에 작자미상의 소설이라니. 경남도민일보 김주완 출판미디어국장 블로그(http://2kim.idomin.com/2958)에 따르면 지난해 10월 말 책 내용을 모르는 메일로 받았다고 한다. 김 국장이 저자 소개를 메일로 요청했으나 돌아온 답은 "지난 30여 년간 역사연구와 저술을 해왔다"는 한 줄이 전부였다.

사실 일제시대나 독재정권 시기에 가명으로 노래를 짓고, 글을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역사책'에서 읽은 적은 있었다. 혹은 유명 작가(또는 작곡·작사가)가 이름을 바꿔서 작품을 내는 경우도 아주 가끔씩은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건 숫제 '나에 대해서 알 생각이랑은 마쇼'가 아닌가.

도대체 왜 저자는 자신을 이렇게도 철저히 숨기려 했을까?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현 정권을 정면으로 겨눈 책

책을 좀 읽다 보니 왜 자신의 이름을 숨기려 했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조선에 여왕이 즉위했다. 여왕이 즉위한 후 자신을 따르던 승려와 술사에 고위직을 주고, 보모상궁과 함께 3인방을 측근으로 삼았다. 대부분의 의사 결정은 이 3인방의 손에서 결정된다. 여왕이 즉위한 후 온갖 사고가 생기는데 그 대응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하다.

폭우로 두물섬이 강 한 가운데서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그 시각 여왕은 다른 곳에서 승려와 밀회를 즐기고 있었고, 도승지의 보고는 무시되었다. 이후 두물섬이 완전히 수몰되고 주민 백여 명이 사망한 것을 여왕은 뒤늦게 보고 받았다. 보고를 받은 여왕의 반응은 황당했지만 익숙한 느낌이다.

소설 <혜주> 표지
 소설 <혜주> 표지
ⓒ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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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 저도 그 보고를 받았습니다만, 저로선 도저히 납득하기 힘듭니다. 청년들은 헤엄쳐 나왔다는데 다른 사람들은 뭐 했나요? 물가에 사는 사람들이 헤엄도 하나 못치나요? 그리고 섬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평소부터 물난리에 만전을 기했어야지요." - <혜주> 본문 중

분노한 백성들이 대궐 인근에서 농성을 벌이면서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자 우의정은 "이번 사고는 전적으로 천재일 뿐입니다. 따라서 백성들의 그같은 요구는 무리하다고 사료되옵니다"며 관료들을 두둔한다.

성균관 유생들마저 농성을 하기 시작했지만 조정과 여왕은 요지부동이었다. 되레 유생들의 약점을 틀어쥐고 유생들을 분열시킨다.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어차피 떠나야 할 고위 관료 몇 명을 파직하고 관청 이름만 바꿔 민심을 수습하려 한다.

두물섬 참사가 잊혀질 무렵, 이번에는 역병이 창궐한다. 여왕이 즉위하기 전에는 역병에 대한 감독을 나름대로 철저히 해왔으나 이미 윗선의 심기를 거스르는 보고는 올라가지도 않는 것이 관행화 됐기 때문에 여왕은 역병이 퍼진 사실도 몰랐고 조정에서도 논의되지 못한다. 내금위(대궐 호위 병력) 군졸과 나인 몇 명이 역병에 걸리자 결국 여왕에게 뒤늦게 역병이 퍼진 사실이 보고 됐다. 여왕의 첫 반응은 황당했다.

"그걸 왜 인제 보고합니까? 과인이 역병에 걸리기라도 하면 영상이 책임질 거요?"
책임질 거냐는 말에 홍문식은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임금이라는 자가 백성들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의 안위만 걱정하다니. - <혜주> 본문 중

이후 사람들과의 접촉이 부담스러워진 여왕은 '알현은 반드시 측근을 통할 것, 대면보고 대신 문서보고로 바꿀 것'을 일방적으로 통보한다. 여왕은 점차 모든 일에 자신의 책임은 조금도 없다는 듯이 행동했다. 문제가 터지면 늘 아랫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했다. 여왕에게는 사람을 부르고 누르는 권한만이 있을 따름이었다. 민심이 흉흉해지고 괴소문이 나돌자 여왕은 '정탐서'를 만들었고, 괴소문을 퍼뜨린 자는 혀를 자르는 형벌을 제정했다. 급기야 성균관 유생들이 혜주의 퇴진을 요구하자 유생은 참수를 당하고 만다. 관료들 가운데서도 비위를 거스리지 않는 예스맨들만 남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애초에 왕실 소생도 아니었다. 왕비가 측근의 아기를 왕실 소생으로 속인 것이다. 따라서 아예 왕이 될 자격도 없었는데 왕이 된 것이다.

이 책 저자는 현 정권과 박근혜 대통령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지만 저자의 상황 때문에 참고 참다 소설로나마 답답한 마음을 푼 것일 수도 있다. 저자는 정부와 관계된 일을 하고 있거나 사람들이 알 만한 지식인일 수도 있다.

10년 만에 사라진 '대통령을 욕할 자유'

10년이면 강산이 바뀐다고 한다. 2004년 8월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은 <환생경제>라는 연극을 공연한다. 노무현 대통령을 '노가리'라 칭하고 대통령에게 "개잡놈, 거시기 달고 다닐 자격도 없는 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으며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박수를 치며 한껏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같은 해 한 방송인은 공개집회에서 권양숙 여사를 향해 쌍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명예훼손이나 자신의 안위나 밥줄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원없이 누렸다.

지금도 일부 정치인이나 지식인들은 SNS를 통해 과감한 비판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혹 명예훼손에 걸릴라, 혹 이를 문제 삼을라 말을 다듬고 다듬어서 올리는 것이 눈에 선하다. 가끔 야당 의원이 대통령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하면 종편이나 여당은 화들짝 놀라 거의 '미친 사람' 취급하면서 윤리위에 회부하겠다느니 난리법석을 떤다.

대통령을 마음껏 욕하는 시대, 대통령을 욕하기 전에 주변과 조건(밥줄, 인맥, 출세길, 소송)을 비겁하게 계산해야 하는 시대. 어느 시대가 더 좋은 시대인가? 어느 시대가 자유민주주의에 가까운 시대인가?

이 책은 대통령을 욕하기 전에 자신의 주변을 돌아보고 계산해야 하는 비애를 상징하는 책이다. 차라리 박정희 시대엔 잡혀가 고문을 받더라도 나온 뒤에는 남들에게 인정이라도 받을 수 있지만, 지금은 또라이 취급 받으면서 밥줄부터 끊긴다.

덕분에 이 책은 그 자체로 보관할 가치가 있다. 훗날 '2016년이 어떤 시대였습니까?' 묻는다면 나는 자신있게 이 책을 꺼낼 것이다. 대통령을 비판하는 게 두려워 익명으로 역사소설을 써야 하는 시대였다고.


혜주 - 실록에서 지워진 조선의 여왕

정빈 지음, 피플파워(2016)


태그:#혜주, #역사소설, #박근혜, #환생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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