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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 파소도블레> 저자 최규화, 이현진, 김지현, 이주영 기자(오른쪽부터)
 <난지도 파소도블레> 저자 최규화, 이현진, 김지현, 이주영 기자(오른쪽부터)
ⓒ 한국기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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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성은 정말 커피만 마시고 갔을까?' 제목부터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내 생각에도 정우성이 커피만 마시고 가진 않았을 거 같다. 내 손엔 신간 <난지도 파소도블레>가 있고 난 책의 공저자인 이현진씨가 커피광고를 보고 쓴 글을 읽고 있었다.

커피를 다 마신 정우성에게 임수정이 "갈 거야?"라고 넌지시 묻자, 정우성은 임수정의 허리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아니, 향기는 남아 있잖아"라고 가겠다는 건지 말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애매모호한 입장을 취한다. 고수다. 엄마는 항상 임수정이 "갈 거야?"라고 묻는 대목에서 "그럼! 가야지!"라고 정우성보다 빨리 답하곤 했다.
- 본문 26쪽

부모님과 낯간지러운 장면을 같이 보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그런 상황에 닥치면 부모님은 헛기침을 하며 자식을 쫓아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렇게 대놓고 남녀상열지사를 비방하고 나서는 엄마도 흔하진 않다. 글쓴이는 커피 광고 하나 마음 놓고 못 보는 현실과 마주할 때마다 떠오르는 옛 일이 있다.

스무 살 초반, 백화점 앞 노천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적에 그 오픈된 테이블에서 대놓고 키스하는 커플이 있었다. 난 돈 주고도 못 볼 장면을 신나게 감상했지만, 함께 일하던 남자애는 굉장히 부끄러워했다. '아, 얘도 스토아학파 문하생이었군. 싶던 찰나, 부끄러운 와중에도 커플을 훔쳐 보던 그 애의 코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 본문 28쪽

키스가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걸 보고 코피를 쏟았을까? 그 청년이 안쓰럽다. 본인은 또 얼마나 창피했을까? 우리 삶이 금욕과 욕망 사이의 양쪽 극단을 달리면서 이런 기괴한 상황이 만들어진 거 같다. 이렇게 솔직담백한 글들이 많아진다면 이 기괴한 상황을 해결 방법도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진솔한 글에서 희망을 본다.

<난지도 파소도블레> 책의 글이 이렇게 다 재미있기만 한 것은 아니다. 책은 이현진, 최규화, 김지현, 이주영 네 명이 같이 썼다. 4명의 공저자는 기자를 업으로 삼는 청년들이다. 흔히 우리가 기자에게 가진 선입견인 똑똑하고 잘난 모습을 책에서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어수룩하고 궁상스럽게 보일 정도로 솔직하다. 하지만 바로 이 점이 이 책의 미덕이다.

어수룩하지만 솔직한 청년들의 이야기

ⓒ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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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사람들은 어딘가 놀러가서 하얀 시트가 깔린 침대에 누우면 대접을 받는 거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나 역시 마찬가지고 하지만 이주영씨는 다르다. 새하얀 시트만 봐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왜 그럴까? 그이가 쓴 "호텔 객실을 스친 투명인간들.... 보이나요?" 글을 읽어가면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시트 10초, 이불 10초, 베개 10초, 30초에 한 자리 정리를 끝내도록!"
조장은 첫날부터 내게 이렇게 윽박질렀다. 무리였다. 시트를 빼내는 데만 10초가 넘게 걸렸다. 새 이불 커버를 갈아 끼울 때면 커버 속으로 솜이불이 들어가는지 내가 들어가는지 헷갈릴 정도로 바둥거렸다.
- 본문 261쪽

10초가 그렇게 긴 시간일까? 일에 능숙해지면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정리하는 게 가능할까? 그 큰 이불과 침대를 가지고 씨름을 했을 저자와 지금도 하고 있을 노동자들의 모습이 머리에 스친다. 이젠 나 역시 새하얀 시트의 침대가 편하지 않을 거만 같다.

이 책의 글들은 이렇듯 이들이 스쳐 갔던 일터와 현재의 일터에 대해 촘촘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한편으론 마음이 아프고 허당 기 가득한 모습에서 웃음이 나온다. 내 눈물을 주르르 흘러내리게 한 글도 있다. 저자 중 한 명인 최규화씨의 신혼집에 글쓴이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모였다.

...말없이 지켜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말문을 열었다. 큰누나 고3 시절 이야기, 아버지가 큰누나한테 4년제 대학 말고 2년제 전문대를 가라고 했단다. 물론 돈 때문에. 그런데 처음에 알았다고 컴퓨터 자격증도 따고 아버지 말을 듣는 것 같았던 큰누나가 대학 등록을 코앞에 두고 울면서 '4년제 가고 싶다'고 말했다는 거였다. - 본문 116쪽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우리 친정아버지도 늦둥이인 내 등록금 마련하느라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려 다니셨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힘겹게 이끌어가던 장사를 접을 수 있었다. 동시에 며칠 전 고3인 첫째를 붙잡고 A대 다니면 돈이 얼마 들어가는지 B대 다니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계산을 쭉 해주었던 일이 생각났다.

마지막으로 내가 첫째에게 한 말은 "엄마 아빠가 자식이 너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너 밑으로 동생이 둘이 있어." 말을 하면서도 좀 어색했다. 첫째에게 동생이 둘이 있는 것은 아이의 의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전적으로 우리 부부가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도 나는 아이에게 그걸 강조했다. 내가 한 말이 아이에게 상처가 된 것은 아닐까 마음이 쓰인다.

상처가 될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글쓴이의 아버지와 그 말을 듣고 섭섭했을 큰딸의 마음이 다 보인다. 그래도 다행히 큰누나는 학비가 싼 지방국립대에 합격해서 아버지의 짐을 덜어주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17년 전 딸에게 그 말을 했던 것이 못내 미안하셨던 모양이다. 저자의 집들이에서 그 말을 꺼낸 것을 보면 말이다.

부모 세대가 젊었을 때보다 지금 우리나라 경제는 더 발전했고 더 풍요로워졌다. 하지만 자식을 공부 가르치거나 취업시키는 것 그리고 결혼시키는 것이 점점 더 힘겹고 어려운 일이 되고 있다. 얼마나 힘겨운지 이 책에 자세히 잘 나와 있다. 경쟁은 심해졌고 안정된 일자리는 줄었다.

젊은 세대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이렇게 씩씩한 청춘들은 자기 이야기를 솔직하게 글로 써서 책에 담아냈다. 우리네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는 이런 책들이 많이 나와야 우린 현실을 똑바로 볼 수 있고 또 우리 삶의 해답도 더 잘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난 이 책을 응원한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난지도 파소도블레 - 풋내기 신입기자들의 솔직궁상 사는 이야기

이현진 외 지음, 작은책(2015)


태그:#난지도 파소도블레, #작은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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