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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여행 중 한 번은 아플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한국을 떠난 지 열하루도 채 지나지 않은 이른 시점일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었다.

사실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한 것은 하루쯤 전부터였다. 파리 8구를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앉았는데 온몸에 힘이 빠지며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앉아서 쉬고 싶었지만, 그마저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누구를 만나러 바로 또 나가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힘든 발걸음을 뗐다. 그곳에서 꿀을 탄 레몬차를 마시니 껄끄러웠던 목이 한층 더 부드러워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분명 몸이 괜찮아지는 듯 보였다.

급격히 나빠진 몸 상태... 여행이란 무엇인가

"매일 순간마다 새로운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매일 순간마다 새로운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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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저녁때까지만 해도 괜찮아지는 것 같았던 몸 상태가 아침이 되자 다시 급격히 나빠졌다. 어제 오후에 너무 무리했던 것인가... 결국, 계획해놓았던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침대에 누워서 쉬는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를 먹고자, 보고자, 하고자 하는 모든 욕망이 사라져버린 채 침대에 누워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여행이란 과연 무엇인가... 여행은 짜릿한 흥분과 기대감, 설렘의 연속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끊임없는 긴장과 스트레스의 연속이기도 하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생각지도 못했던 경관을 접하고, 어제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사람들을 만나 서로를 알아가는 것. 이 모든 것이 정말 아름다운 일이지만, 나에게는 한순간도 긴장을 놓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익숙지 않은 환경 속 시시각각 돌변하는 상황에 매번 새롭고 신속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매일 순간마다 새로운 결정의 순간이 찾아온다. 그 순간 어떤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얻는 것도, 잃는 것도 생긴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인생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여행에서도, 인생에서도, 모든 것이 계획했던 대로 매끄럽고 순탄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느 쪽이든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이유로 여행에 있어 준비는 필수적이다. 한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배경지식을 갖추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신이 준비되어야 한다. 정신적인 강인함에 더해 체력까지 다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에게는 이런 준비가 부족했던 것 같다. 그런데 준비가 다 되기를 기다리다가는 정작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정신이 몽롱한 상태로 이런저런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하며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요리하려는데... 준비해둔 '그것'이 사라졌다?

"김치가 다 익어갈 무렵 참치를 첨가해 풍미를 더 했다. 마지막으로 밥을 투입해 열심히 볶기를 거듭한 끝에 나의 김치볶음밥이 화룡점정에 이르렀다."
 "김치가 다 익어갈 무렵 참치를 첨가해 풍미를 더 했다. 마지막으로 밥을 투입해 열심히 볶기를 거듭한 끝에 나의 김치볶음밥이 화룡점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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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차리고 보니 오후 2시였다. 서둘러 늦은 점심을 먹고 어딘가를 갈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더욱 몸이 안 좋아질 것 같아서 오늘 하루는 그냥 푹 쉬기로 했다. '에라, 모르겠다.' 소파에 넋 놓고 앉아있는데 유나 아줌마가 다가오신다.

"오늘 저녁에 네가 말한 그 한국 요리를 해주지 않으련?"

아, 맞다. 파리를 떠나기 전에 한국 음식을 해주기로 했지...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그래, 어려운 것도 아닌데 한 번 해주고 말지. 그리고 어제 아침 한국 마트에서 공수해온 김치를 볶기 시작했다.

김치가 다 익어갈 무렵 참치를 첨가해 풍미를 더 했다. 마지막으로 밥을 투입해 열심히 볶기를 거듭한 끝에 나의 김치볶음밥이 화룡점정에 이르렀다. 그 무렵, 뭔지 모를 불안감이 나를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그래, 가장 중요한 것이 빠졌네. 프랑스에까지 와서 거금을 들여 구매한 '그것'이 아무리 눈을 뜨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어저께 분명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는데, 누군가 부엌을 청소한답시고 치워버린 모양이다. 결국 모든 요리를 중단하고 페펙까지 동원되어 부엌을 샅샅이 뒤졌지만, 나의 소중한 '굴 소스'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유나 아줌마가 해주신 밥이 너무 질었다. 그래서 볶다보니 흐물흐물 모양이 깨지며 프라이팬 바닥에 눌어붙기 시작했다.

원래 김치볶음밥은 오래 볶아야 제맛이지만, 이제 더 볶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는 수 없이 불을 끄고 한 숟갈 떠서 맛을 보았다. 그래, 실패작이긴 하지만 그리 끔찍하진 않네... 서둘러 다른 프라이팬에 달걀프라이를 해서 김치볶음밥과 함께 접시에 올렸다. 굉장히 맛있어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뭔가 그럴듯해 보이는 외형이었다.

매워서 모두 물을 찾고... 그래도 흐뭇했다

모두 식탁에 둘러앉아 한 숟갈, 정확히 말하자면 한 포크씩 동양의 특이한 음식을 자신들의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 대로 모든 사람이 헉헉거리며 물을 찾기 시작했다. 김치를 최대한 씻었음에도 정말 많이들 매웠나 보다.

그러나 여기에도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룩셈부르크에서 온 귀여운 꼬마 루카였다. 페펙의 사촌, 그러니까 베르나르 아저씨의 여동생네 아들인 루카는 프랑스인 엄마와 이탈리아인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독특한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룩셈부르크에 사는 그는 페펙네 집에는 하룻밤을 자기로 되어있었다.

왜냐하면, 폴 매카트니의 열성 팬인 자기 엄마가 그 공연을 보러 룩셈부르크에서 파리까지 3시간에 이르는 거리를 마다하고 달려왔기 때문이다. 룩셈부르크의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서 일하고 있는 루카의 아빠는 사정상 같이 오지 못했다. 그래서 공연시간 동안 루카를 봐줄 사람이 필요했고, 그런 이유로 페펙네 집에 오게 된 것이었다.

루카(Lucas)의 모습. 이 귀여운 꼬마는 결국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거의 한 접시에 이르는 김치볶음밥을 다 해치웠다.
 루카(Lucas)의 모습. 이 귀여운 꼬마는 결국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거의 한 접시에 이르는 김치볶음밥을 다 해치웠다.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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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귀여운 꼬마는 결국 물도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거의 한 접시에 이르는 김치볶음밥을 다 해치웠다. 이는 지켜보는 많은 사람, 특히 요리해준 당사자를 무척 흐뭇하게 만들었다. 보고만 있어도 절로 미소가 나오는 광경이었다.

비록 몸이 무척 아프고 아무것도 할 수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렇게 또 하나의 소소한 행복이 쌓여갔다. 여러 생각할 거리가 있고 내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한 사람 덕분이었다. 파리에서의 열한 번째 날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 편집ㅣ김준수 기자



태그:#파리, #한국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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