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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평범한 아침, 하싼 가족의 하루는 제각기 다르게 시작된다.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베르나르 아저씨와 막내 두 명. 서둘러 아침을 먹고 각자 회사로, 학교로, 또 유치원으로 떠난다. 보통 그 다음에는 유나 아주머니가 일어나신다. 집에서 베이비시팅을 하시기 때문에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는 것으로 아주머니의 분주한 일상이 시작된다.

잠시 후 졸음기 가득한 얼굴로 방문을 열고 나오는 것은 바로 페펙이다. 사실 페펙이 학교에 가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어떤 날은 9시까지, 어떤 날은 10시까지, 선생님 사정에 따라 아예 오전에는 수업이 없는 날도 있다. 보통 페펙이 일어날 때쯤 소피와 야나도 일어나지만 학교나 개인 일정이 항상 바뀌기 때문에 이 두 명의 기상 시간을 예측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이렇게 일어나는 시간이 각기 다르니 아침을 먹는 시간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하게 되는 첫 번째 고민은 바로 '누구와 함께 아침을 먹을 것인가'이다. 내가 잠에서 깨어나는 시간은 7시 근방, 같은 방을 쓰고 있는 일란이 그때쯤 학교 갈 준비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간대에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이 항상 쉬운 것만은 아니다. 베르나르 아저씨와 같이 아침을 먹으면 무언가 따뜻한 요리를 해주셔서 좋지만 오늘은 피곤한 관계로 조금 더 눈을 붙이기로 한다. 몇 분이나 흘렀을까, 얼마 뒤 페펙이 씻으러 가는 소리가 들린다. 페펙과 같이 아침을 먹는 것이 두 번째 옵션이지만, 이 친구는 집을 나서기 직전 워낙 후다닥 아침을 먹기 때문에 시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소피와 야나는 아직 잠들어있는 모양이다. '흠, 오늘은 혼자 아침을 먹어야 하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유나 아주머니가 솔깃한 제안을 하신다. 오페라 근처의 단골 카페에 같이 가서 아침을 먹자는 것이다. 아 네, 저야 좋죠! 그렇게 나와 유나 아주머니, 그리고 아주머니가 돌보고 계신 아기 두 명이 함께 집을 나섰다.

백년 넘는 역사 지닌 다양한 파리의 카페들

유모차를 끌고 몇 분을 걸어 드디어 카페에 도착했다. 유나 아주머니는 커피에 바게트, 나는 핫초코로 잘 알려져 있는 쇼콜라 쇼(chocolat chaud)와 크루아상을 주문했다. 슬쩍 창밖을 바라보니 말끔히 차려입고 어딘가로 바삐 향하는 파리지앵들의 모습이 보인다. 아무리 프랑스 사람들이 느긋하다고는 하지만 출근시간에 바쁜 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가보다.

쇼콜라 쇼를 홀짝거리며 잠시 카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내가 앉아있는 이곳도 아마 다른 여느 파리의 카페와 마찬가지로 독특한 개성과 매력을 가지고 있는 곳일 터였다. 프랑스인들은 적어도 하나씩은 자신만의 단골 카페가 있고, 저마다 그곳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듯했다.

파리만 해도 오스카 와일드가 즐겨 찾았던 카페 드라페(Café De La Paix), 헤밍웨이가 글을 쓰곤 했던 레 되마고(Les Duex Magots),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를 비롯한 많은 지식인들이 교류의 장으로 삼았던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 등 백여 년도 넘는 역사를 지닌 다양한 카페들을 찾을 수 있다.

이쯤에서 자연스레 한국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도 어느덧 커피를 즐겨 마시는 국가가 되었고, 이제는 어딜 가나 쉽게 카페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중 대다수는 특정 기업들의 특정 브랜드를 내걸고 있고, 비슷한 맛, 비슷한 가격, 비슷한 인테리어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한국에서도 카페에 자주 갔지만 어느 한 곳에 특별히 애정을 느껴 단골이 된 기억은 거의 없다. 카페 하나만을 보더라도 프랑스 사회는 전통과 다양성을 인정하는 반면 한국 사회는 지나치게 획일화되어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인 것일까. 여러모로 생각이 많아지는 아침이다.

카루젤 개선문
 카루젤 개선문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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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잠시 집에 들렀다 본격적으로 길을 나섰다. 오늘의 일정은 루브르 박물관 바로 앞의 카루젤 개선문(Arc de Triomphe du Carrousel)에서 시작된다. 1805년에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구조물은 1806년 착공에 들어가 2년만인 1808년 완성되었다. 카루젤 광장에 세워진 까닭에 자연스레 카루젤 개선문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카루젤(Carrousel, 마장 마술)'이라는 이름은 루이 14세가 이곳에서 기마술 시범을 보이게 한 데서 유래된 것이라고 한다.

개선문의 꼭대기는 아우스터리츠 전투 당시 베네치아에서 가져온 말 네 마리로 장식되었지만, 1815년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며 원위치인 산 마르코 성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후 루이 18세 시절 왕정복고를 기념하기 위해 현재의 조각상으로 대체되었다고 한다.

카루젤 개선문을 한동안 바라보다 튈르리 정원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 아래 수많은 비둘기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는 이곳은 한때 튈르리 궁전의 부속 정원이었지만 1871년 파리 코뮌 당시 궁이 소실되면서 하나의 독립된 정원으로 존재하게 되었다. 1664년 루이 14세의 왕실 정원사 르 노트르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튈르리 정원은 정말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오늘 여행의 핵심은 아니기에 "이런 곳이 있구나" 정도로 넘어가기로 한다.

튈르리 정원을 빠르게 지나 콩코드 광장으로 들어선다. 파리에서 가장 큰 광장이자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처형당한 장소이기도 한 이곳. 마찬가지로 유서깊은 역사와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곳이지만 역시 오늘 여행의 핵심은 아니기에 다음에 다시 한 번 찾아오기로 한다.

만 18세 미만이면 개선문, 미술관, 박물관 모두 무료

에투알 개선문
 에투알 개선문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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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코드 광장을 뒤로하고 샹젤리제 거리에 들어서니 오늘의 두 번째 목적지,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이 보인다. '에투알(별, Étoile)'은 광장을 중심으로 12개의 거리가 별처럼 뻗어나간다 해서 붙은 이름. 훗날 에투알 광장은 샤를드골 광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지만 에투알 개선문의 이름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있다. 에투알 개선문 역시 1806년 공사에 들어가 나폴레옹 사후, 루이 필립의 왕정복고 시절인 1836년 완성되었다.

여기서 생기는 의문점 한 가지. 어떻게 해서 파리에는 개선문이 두 개나 만들어졌을까? 각각 다른 시기도 아닌 같은 1806년에 말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바로 전해인 1805년 벌어진 아우스터리츠 전투(La bataille d'Austerlitz)의 상징성이다.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당시 유럽의 전후사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804년 12월 12일 프랑스의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에 맞서 영국, 오스트리아, 그리고 러시아는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을 결성하게 된다. 나폴레옹은 이 동맹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영국 본토 상륙을 계획했지만, 칼더 제독에 의해 저지당하고 만다. 한편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는 이때다 싶어 바이에른 지방을 점령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나폴레옹이 한 달 만에 600km를 달려와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수도 빈까지 점령해버리는 바람에 패잔병을 이끌고 러시아군에 합류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말 그대로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점점 프랑스군에게 불리해져갔다.

나폴레옹의 군대는 프랑스 본토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겨울에 접어들며 식량보급마저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의 넬슨제독에게 대패를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며 나폴레옹의 고민은 더욱 깊어져갔다. 몇몇 지휘관들은 이만 후퇴할 것을 주장했지만 나폴레옹은 이럴 때일수록 주변 국가들에 프랑스가 건재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805년 12월 2일, 나폴레옹이 이끄는 7만 2000명의 프랑스 군대는 현재 슬로바키아 지역의 아우스터리츠에서 8만 5000명의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압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제 3차 대프랑스 동맹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엄청난 영토와 배상금을 납부해야 했으며, 러시아 역시 수많은 손실을 입고 잔뜩 움츠러들게 되었다.

이 기념비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은 카루젤과 에투알 광장에 두 개의 개선문을 세울 것을 명령했다. 특별히 카루젤 개선문은 아우스터리츠 전투만을 기념하는 것이었고, 에투알 개선문은 나폴레옹 아래 프랑스 군대의 모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나폴레옹이 카루젤 개선문의 크기가 너무 작다고 불평하며 새로운 개선문을 짓게 했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잘못 알려져 있는 것이다.

공식 기록에 의하면 나폴레옹이 에투알 개선문 건설을 명한 것은 1806년 2월 17일이고, 카루젤 개선문 건설을 명한 것은 그로부터 9일 뒤인 2월 26일이다. 실제 공사가 먼저 시작된 것은 카루젤 개선문이었는데, 7월 6일에 공사가 시작되었고, 같은 해 8월 15일 에투알 개선문도 역시 착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대로 이 두 개선문은 각기 시차를 두고 완성되었다.

샹젤리제 거리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지하통로를 통해 개선문으로 향한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에투알 광장의 정중앙, 그러니까 개선문 바로 밑에 다다른다. 이곳에서 가장 처음 볼 수 있는 것은 무명병사의 무덤. 흔히들 개선문을 감상하느라 그저 지나치곤 하지만 1921년,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한 무명병사의 시신이 매장된 곳이다. 우리는 한국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터에서 죽어간 무명병사들을 과연 얼마나 기억하고 기리고 있을까 참으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한참 동안 개선문을 올려다보다 개선문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해 다시 지하로 내려와 줄을 섰다. 요금을 살펴보니 개선문도 만 18세 미만에겐 요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만 18세 미만에 파리에 오면 가장 좋은 점은 모든 국립 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문화유적 관람이 무료라는 사실이다.

한 번 둘러보고, 뭔가 놓친 것이 있으면 이튿날 다시 오고, 더 생각할 것이나 고민해볼 것이 있으면 또 다시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것이 바로 파리의 문화유산이다. 물론 당신이 만 18세 미만이라면 말이다. 내가 아직 만 16세밖에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엄청난 뿌듯함을 느끼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만 18세 미만은 부모님 없이 혼자 못 올라가요"

"18세 미만은 부모님 없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18세 미만은 부모님 없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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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행복이 실망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표를 받으려고 창구 앞에 선 순간, 만 18세 미만은 부모님 없이 개선문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청천벽력같은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지난 1월 벌어진 샤를리 에브도 총격사건 때문인지 아직도 거리 곳곳에 경찰이 있었고, 안전에 극도의 주의를 기울이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곳 개선문도 예외는 아니었나보다. 바로 옆에서 노려보는 경찰 아저씨 때문에 순순히 포기하고 뒤돌아서는 수밖에 없었다. 아뿔싸. 그야말로 완전 '멘붕'이다. 파리까지 왔는데 개선문에도 못 올라가보다니. 정말 이번 여행을 시작하고 벌어진 가장 큰 비극이었다.

다시 샹젤리제 거리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 다시 올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해서라도 이번에 개선문에 꼭대기에 닿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지며 다시 한 번 개선문으로 올라가는 줄에 슬쩍 편승했다. 처음에는 어떻게든 상황을 잘 설명해 상대방이 똘레랑스를 발휘해주기를 기대해보자는 생각이었지만 맨 앞에 있는 무뚝뚝한 경찰 아저씨를 보면 다시 희망이 줄어만 갔다.

이때 떠오른 생각. 부모님을 당장 한국에서 모셔올 수 없으니 일단 현지조달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바로 앞에 서로에게 달달한 애정표현을 하고 있는 한 커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혹시 제 부모님이 되어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았고, 일단 "Yes"라는 대답을 받았다. 그렇다면 이제 관건은 매표소. 20대 초반의 영국인 커플에 16살의 한국인 아들. 뭔가 조금 많이 이상하긴 하지만 어쨌든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다. 잠시 한눈 팔고 있는 경찰아저씨의 등 뒤를 지나 매표소 앞에 멈춰 섰다.

표를 파시는 직원분이 "몇 살이에요?", "여기 앞에 있는 분들이 부모님 맞아요?", "진짜요?"라며 나와 이 영국인 커플을 번갈아 수상쩍은 눈초리로 쳐다보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표를 '찌~익' 하고 끊어 나에게 주셨다. 표를 받아들었을 때의 그 기쁨이란, 정말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나는 광장 지하에서 급구한 영국인 부모님들과 함께 개선문에 오르기 시작했다.

총 234개의 나선형 계단을 지나 드디어 꼭대기에 도착했다. 파리 시내뿐만 아니라 에펠탑 몽마르트 언덕 그리고 라데팡스까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에투알 개선문. 멋진 전망을 감상하는 동시에 나폴레옹이 남긴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멋진 곳이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에펠탑과 개선문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개선문을 택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파리 전체를 바라보기에 조금 더 적합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에펠탑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생각할 거리도 많은 곳이다. 꼭대기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밑으로 내려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의 '일일' 영국인 부모님께 작별인사를 하고, 천천히 발걸음을 뗀다. 다음 목적지는 과연 어디인 것일까. 복잡다난했던 나의 개선문 기행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개선문에서 바라본 에펠탑
 개선문에서 바라본 에펠탑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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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박혜경 기자



태그:#파리, #개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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