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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색해져 버린 시장

어릴 적 시골 5일장은 굉장히 신나는 하루였다. 버스가 미어터지고,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많은 사람들과 많은 물건들을 구경하다가 지각을 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언제부턴가 시장에 자주 가지 않게 됐다. 가더라도 시장 상가에서 식사를 한 끼 하거나 회식을 하러 갔을 따름이다.

그 사이 시장도 많이 변했다. 길거리도 깨끗해지고 화장실도 생기고 주차장도 생기고 현판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럼에도 시장에 가는 것은 뭔가 어색했다. 마트보다 시장이 더 싸다는 것을 알고 있고, 말만 잘 하면 말도 안 되는 가격에 말 그대로 '대박'이라고 할 만큼 많은 것을 건져올 수 있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여전히 시장과는 알 수 없는 정서적 거리가 있었다. 식자재를 거의 대부분 한살림이나 생협에 의존하는 필자의 까탈스러움도 있겠지만, 시장의 썰렁한 모습을 보면 그런 정서적 거리는 비단 필자 하나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릴 적 추억이 있던 시장. 우리가 어쩌다 이렇게 서먹한 사이가 됐는지 알 길이 없다.

시장으로 여행가자?

도서 <시장으로 여행가자> 표지.
 도서 <시장으로 여행가자> 표지.
ⓒ 피플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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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으로 여행가자(권영란 저). 이 책을 봤을 때 제목을 잘못 본 줄 알았다. 시장은 소비를 하는 곳이지 어떻게 여행을 하는 곳이냐. 요즘 관광지 안내도 잘 됐고, 정비도 잘 돼 있다. 지자체에서는 사소한 이야기 하나라도 포장해서 관광지로 만들려고 온갖 애를 쓴다. 그런 곳이 널렸는데 시장에 가서 뭘 볼 게 있다고 여행 가자고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시장에 대한 뻔한 내용은 아닌 것 같았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던 모습, 그러니까 마트 때문에 장사 안 된다고 상인이 하소연하거나 활어 한 마리를 번쩍 들어 올리며 싱싱하다고 호들갑 떠는 그런 뻔한 소리는 아닐 것 같았다.

책을 폈다. 본문은 흑백 인쇄를 했다. 거참 여행 가자고 해 놓고선 올 컬러가 아니라 흑백이라. 그럼 뭘 보란 말인가? 본문을 읽으란 말인가? 본문을 읽었다. 책은 주로 대화체로 이뤄져 있다. 중년의 필자가 시장 아지매(이 책은 사투리를 고스란히 옮겨 놨다. 이 책을 읽고 나면 필자처럼 사투리가 손에 익을지도 모르니 주의!)들과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 이야기들을 읽다 보니 왜 '시장으로 여행가자'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시장에서 찾은 뜻밖의 이야기들

남해시장에는 10만 원짜리 죽이 있다.

"아지매, 무신 이런 기 있는 기라예? 별별 죽 이름을 다 들어보았지만"

새알이 든 콩죽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들른 원조 죽집이었다. 안에 들어가 차림표를 살피다가 뜨악해져버렸다. 초상죽 10만 원. 콩죽도 생소한데 초상죽이란다.

"아, 초상집 대준다꼬 초상죽이다 아이가."
"무신 초상집에서 죽을 먹나예? 생전 처음 들어보는데예."
"우리 남해에서는 초상집에 밤참으로 죽을 묵는다 아이가 새알을 넣은 팥죽을 마이 무꼬 간혹 콩죽도 찾제. 저그는 한 솥에 10만 원 이라는 기다. 초상집에서 밤샘하는 사람들이 출출할 때 얼매나 달게 묵는다꼬."

진해 중앙시장의 매출액은 '남북 정세'가 결정한다?

"이용객들이 군인(해군)이 많다 보니 남북 정세에 따라 상권이 위축되기도 합니다. 남북 정세가 어려워지면 비상명령이 떨어져 금세 군대 내에서 긴장 상태가 되니 함부로 외출도 안 되고 쉽게 술자리도 못 만드니까요"

뜻밖의 한국사의 한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기억나는 게 있다면 여게(함양중앙상설시장)가 한국전쟁 때 인민군 훈련장이 된 적이 있었제. 비행기가 하늘에 뜨면 인민군들이 숨을 데가 없으니까 점포 안으로 전부 숨어들었제."

"음력으로 8월 14일 인민군들이 올라갔다 아이가. 그래 피난갔던 사람들과 군인들이 올라오데. 어떤 사람이 물건을 사러 왔는데, 팔이 한쪽은 새까맣고 한쪽은 생생했다 아이가. 낙동강 전선에서 (미군이) 원자포를 썼다더이. 그기 맞았는기라. 우리 시장에서는 전쟁으로 죽은 사람은 별로 없었제. 죽는 건 그 뒤에 '보도연맹'인가 머신가 그 때문에 마이 죽었다카더라. 경찰이 와서 한 구뎅이에 모아 대번에 죽였다카네."

중국과 일본에 수출하는 뻥튀기도 있었다.

"우리 집 꺼는 한 번 묵어본 사람은 계속 주문한다 아이가. 일본, 중국 다른 나라 가 있는 사람들도 주문해서 보내준다예."

사전에도 안 나오고 구글 검색에도 안 나오는 나물이 있었다.

"아지매, 이기 머시라예?"
"도…이다."
"예? 머시라꼬예?"
"도…이라쿠니까."
"예? 도록? 도녹?"

생전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이름을 알아 먹기에는 아지매와 좀 많은 문답이 오가애 했고 막판에는 목소리가 커졌다. 도롭이었다. 어찌 이런 이름을 가진 게 있었단 말인가?

"이기 뼈가지 아픈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약체라 안쿠나. 바짝 말려가꼬 물처럼 달여 묵어도 되고 살짝 데쳐가지고 초무침 해 묵어도 좋고 무시를 채 썰어 가꼬 같이 볶아 묵어도 맛있다아이가."

3대째 내려오는 게 아니라 숫제 3대가 같이 운영하는 국밥집, 허씨(GS그룹)와 구씨(LG그룹)의 동맹이 처음 맺어진 진주중앙시장 포목점 등 널린 게 듣도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그제서야 책 제목 '시장으로 여행가자'가 이해됐다. 시장은 지역의 모든 이야기를 품고 있는 곳이다. 그 자체가 방대한 콘텐츠를 가진 관광지다. 일반적인 관광지에서는 도저히 알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이야기들이 바글한 곳이다. 마치 여행지 블루오션을 개척한 기분이었다.

진정한 견문의 완성, 시장

여행 블로그, 여행 전문가, 여행 콘텐츠가 차고 넘치는 세상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 이야기는 부족한 화려한 사진과 박제된 스토리만 남아 있다. 어찌보면 기존 여행지에서 이미 다 얻은 건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모르던 곳에 가서 그곳을 알아오는 과정을 거칠게 정리해서 '견문록(見聞錄)'이라고 한다면, 기존 여행 콘텐츠는 '견'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제 이 수준이 약간 업그레이드돼서 체험도 하고 맛도 보는 수준까지 이르렀지만 여전히 가장 핵심인 '문'에 이르진 못했다.

시장은 과거 그 지역의 핵심이었다. 모든 이야기가 집중되는 곳이다. 그리고 숱한 이야기를 품은 사람들이 있다. 시장에 가야 비로소 견문록의 완성에 이르는 것이다. 이 책은 시장을 토대로 견문록을 완성시킬 수 있는 가장 좋은 교재이기도 하다.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자. 왜 시장이 신이 났었나? 새로운 물건이 있어서? 그것보다는 사람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소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그 소통의 기억의 잊은 채 물건 사는 공간으로만 남겨졌기 때문에 어색한 것이었다. 이젠 시장에 갈 자신이 조금 생겼다. 물건은 덤이다. 이야기를 사러 나는 시장에 간다.


시장으로 여행가자 - 꼭 가보고 싶은 경남 전통시장 20선

권영란 지음, 피플파워(2014)


태그:#시장, #견문록, #시장으로여행가자, #권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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