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표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책표지
ⓒ 책과함께

관련사진보기

요즘 동아시아 정치, 정말 복고풍이다. 2012년 치러진 선거에서 화려하게 재집권에 성공한 아베 신조가, 50~60년대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인인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라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옛날 냄새 풀풀 풍기는 것은 비단 정치가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재특회니 니찬네루니 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저 수단이 조금 바뀌었을 뿐 지금의 일본이 군국주의 시절의 일본과 얼마나 다른가 싶어서 좀 무서운 느낌마저 든다.

복고풍 정치의 대세 앞에서 한국도 예외일 수 없다. 요 몇 주간 신문 정치면에 오르내렸던 '비선실세'니 '십상시'니 하는 말들은, 사실 여부를 떠나서 흡사 수백 년 전 궁중비사를 보는 것 같아서 뒷맛이 영 개운치가 않다. 김일성과 닮으려고 성형수술을 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인 김정은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복고풍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별로 다르지 않다.

재미있는 것은 아베 신조나 김정은이나 박근혜 대통령이나 모두 유력한 정치인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아베 신조의 외할아버지가 기시 노부스케인 것은 이미 말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김정은 역시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 이들에게서 기시 노부스케와 김일성, 그리고 박정희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후계자에게 자신의 지역구와 정치적 영향력을 승계하는 것이 일본 정치의 상례임을 생각하면 아베 신조는 곧바로 기시 노부스케의 정치적 적자(嫡子)라 할 만 하다. 김정은도 김일성과 김정일로 이어지는 '신화' 속에 스스로를 자리매김 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모양이다(북한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신화' 구조에 대해서는 정병호와 권헌익과 '극장국가 북한'이 잘 다루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대선 기간 내내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대선 직전에는 '잘살아보세' 신화를 언급하며 노골적으로 박정희 정권을 자신의 배경으로 깔았다. 이런 과정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동아시아 정치는 과거의 흔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동아시아의 정치를 살피는 데 있어서 좋은 참고자료가 될 수 있다.

만주로 간 사람들

저자인 강상중과 현무암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가 공통적으로 만주국 경험을 가지고 있음을 지적한다(북한 정권과 만주 경험에 관해서는, 지난 회 독서공방 2회에서 지상현이 쓴 글을 참고해 주시기 바란다). 그러니까 그들이 만주국에서 겪었던 것들이 이후 일본과 한국의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1930년대와 1940년대의 만주는 무척이나 독특한 공간이었다. 딱히 어느 나라의 소유라고 말하기도 애매하면서 광활한 대지에 풍부한 자원이 지천에 깔린 공간이 바로 만주였다. 식민지 조선과 제국 일본의 피끓는 청춘들이 이 땅으로 몰려들었던 것도 그런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책에서 1930년대의 만주를 두고 "동양의 엘도라도"라는 표현을 쓴 것도 그러한 맥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엘도라도"로 몰려들었던 청춘들 중에 1896년생 기시 노부스케와 1917년생 박정희가 끼어 있었다(만주의 그런 성격은 각종 문화콘텐츠의 좋은 소재가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다찌마와 리: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같은 영화가 대표적이다. 이들 영화는 과거 한국영화계를 풍미했던 만주 웨스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최근 개봉했던 '군도: 민란의 시대' 역시 넓은 의미에서 만주 웨스턴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이 책은 만주국을 둘러싼 당대 청년들의 욕망들이 만주국을 지탱하고 기시 노부스케나 박정희와 같은 '귀태'들을 낳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지목한다. 다시 말해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개인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 그들과 같은 '귀태'의 존재를 가능케 했던 맥락이 무엇인지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을 단지 박정희를 신랄하게 '까기' 위해서만 쓰여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박정희에 대한 비판의 맥락으로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이 책이 우리에게 던지는 여러 가지 사유의 갈래들을 너무 쉽게 내치는 것이기도 하다.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으로 들어갔을 무렵, 대부분의 재만 조선인은 "식민지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원했고", "만주국군 내의 조선인 부대인 간도조선인특설부대로 징집되는 것을 기피하면서 김일성을 필두로 하는 항일운동의 활약상에 가슴이 뛰"면서도 "조선인 청년들은 사회적 향상의 장(場), 기회의 장을 찾아서 만주로 향했던"(다나카 류이치(田中隆一), <만주국과 일본의 제국지배>) 것이다. 만주는 그들에게 당시의 어려운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신천지'로 여겨졌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민족차별과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한반도로 귀환할 것인지, 중국 본토로 혹은 동남아시아로 유랑할 것인지, 아니면 "만주의 도시 하층사회로 전락할" 것인지, 그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재만 조선인은 "기지수(旣知數)의 사지(死地)"(=조선)와 "미지수의 사지"(=만주)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는 입신출세나 일확천금의 꿈을 이루어질 "동양의 엘도라도"로서 뜻이 있는 조선의 청년들을 끌어들이게 되었다. 만주국은 그저 일본인의 '신천지'나 '이상국가'에 머물지 않고 역설적으로 식민지 조선인에게도 미답(未踏)의 프런티어였다. 물론 그처럼 강요된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거기에 주체적인 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p. 56.)

만주는 이런 박정희처럼 입신출세를 노리는 식민지 청년들에게 '차별로부터 탈출할'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만주에서 조선인은 식민지에서 감히 올라갈 수 없는 지위에까지 오르는 기회를 맛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선인이 정교수로 임용된 적은 없었지만, 만주국의 최고학부인 건국대학(建國大學)에서는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교수로 채용되었다. 또한 식민지에서는 보통문관시험밖에 없고 일본에서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더라도 조선으로 발령이 나는 것이 관행이었지만, 이 같은 고급관료로의 지위 상승 기회 등으로 만주국은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식민지 청년들에게 '일확천금'과도 같은 '지위 역전'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런 '이중국적'의 상황을 활용한 조선 청년들의 '입신출세'는 한편으로는 식민지 조선인을 일본제국에 통합시키는 효과적인 기제가 되어 있었다. (p. 104.)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신나게 씹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면, 이 책이 굳이 그들이 만주로 가기 전에 겪었던 일들과 만주행을 결심하게 된 계기 등에 대해서 장황할 정도로 길게 서술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저자들의 목적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에 대한 엄정한 비판 외에도 그들이 그러한 선택을 하게 된 욕망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에도 있었을 것이다. 저자들의 목적이 단지 전자에만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통렬하고 자극적인 표현들이 책에 담겼겠지만, 저자들은 그러한 분노에 휩싸이기 보다는 냉정하게 한 발 물러서서 독자들과 함께 질문을 던지는 쪽이다. '그들은 왜 만주로 향했을까?', '그들이 만주에서 돌아와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덕분일까?'

역사를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하는 것

역사를 통해 사회를 통찰하고 자신을 성찰하려는 사람이라면 이런 식으로 질문을 던져 보는 일은 무척 중요하다. 또다시 그러한 조건이 반복되었을 때 다시는 그러한 '귀태'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저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단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개인에게 욕지거리를 퍼붓는 것만으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도출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책 말미에 붙어있는 박한용 선생의 글은 아쉬움이 크다. 물론 박한용 선생의 글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다. 박한용 선생이 그간 수행한 많은 연구와 활동들은 그 자체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고 이 글을 쓰는 나 역시 그 연구들에서 많은 가르침과 영감을 얻은 것이 사실이니다. 단지 아쉬운 것은 그 글이 그 위치에 있음으로 해서 발생하는 효과이다.

박한용 선생은 이 책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를 비롯한 만주국 인맥)의 정체를 폭로하고 그들을 준엄하게 비판하는 텍스트로 독해하였지만, 그런 글이 '해제'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한,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사유의 가능성은 제한될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건대, 이 책은 단지 '박정희 나쁜놈' 정도의 독후감만 남길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박정희를 비판하는 것은 쉽다. 하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이 감정적 카타르시스 외에 무엇이 더 있을까. 기껏해야 피아식별 정도나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 단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면 그런 역사는 정치판에서나 통용되는 것이지, 통찰과 성찰을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지난 수십 년간 우리는 박정희를 신나게 '깠지만' 2013년에 우리가 목도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아버지를 이어 청와대로 복귀하는 모습이었다. 독재자는 죽었지만 그 정신과 그 후예들은 30년이 지난 아직도 대한민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가 박정희에 대한 감정적 비판 이상을 넘지 못했으며, 박정희의 시대(와 그 후예들)에 대해서도 제대로 통찰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정희의 선택의 이유를 분석하는 것은 박정희의 선택을 변명해주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말하기 위한 첫 단추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박정희를 뿔 달린 괴물로 만들어서 신나게 조롱하고 욕하는 것이 아니다. 박정희 자신을 추동하기도 했고, 박정희가 우리에게 심어놓기도 한 사유와 욕망의 구조가 무엇인지 탐구하고, 그것을 깨부술 수 있는 방책이 무엇인지를 찾는 것이다. 그 작업을 생략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박정희의 정신과 후예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책에 대한 내용은 독서공방 기자들의 팟캐스트 <역사책 읽는 집>에서 더욱 상세히 들을 수 있습니다. 주소 : http://www.podbbang.com/ch/5579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 다카키 마사오, 박정희에게 만주국이란 무엇이었는가

강상중.현무암 지음, 이목 옮김, 책과함께(2012)


태그:#독서공방, #역사책 읽는 집, #서평, #정대훈, #지상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