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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표정이 왜 그래?"
"사실 나 오늘 사표 냈어!"

이미 예감을 한 걸까. 아내는 안고 있던 딸아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밖으로 나갔다.

'우린 이제 뭐 먹고 살아야 하냐?' 내지는 '이럴 거면 왜 나랑 결혼 했는데?' 적어도 아내는 앙칼진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는 게 옳다. 아니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런데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방을 나갔다. 멀리 간 게 아니란 건 안다. 멋대가리 없는 일바지 차림으로 어디 갔겠나.

1994년 11월 어느 날, 난 사직서를 냈다. 내 나이 34살 때다. 공무원을 시작한 지 딱 5년 조금 지난 시기였다. 박봉으로 생활이 궁핍했지만 그래도 살 만했다. 같은 해 딸아이도 태어났다. 가장이란 사람이 뚜렷한 대책도 없이 사표를 내 던지는 무모한 짓을 해선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난 흰 종이에 커다랗게 '사직서'라는 단어를 썼다. 난생 처음 써 본 글자다. 그것을 과장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 집으로 왔다.

능력의 한계가 사직 사유였다

공무원 첫 발령, 평생 보랏빛 향기만 있을 줄 알았다.
 공무원 첫 발령, 평생 보랏빛 향기만 있을 줄 알았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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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마, 거기가 공장이 들어갈 자리로 보이냐? 아무리 무식해도 그렇지 그 사람이 거기다 공장을 지을 것 같아?"

B과장은 뭐가 그렇게 화나 났던지 30여 분 가량 호통을 쳤다. 했던 말을 반복하길 수차례. 레퍼토리가 끝날 만도 한데, 말을 멎었다가 새로운 욕설을 만들어 냈다. 아마 자극적인 새로운 말을 생각했었나 보다.

그러곤 결재판을 바닥에 집어 던졌다. 신기하기도 하다. 집게에 견고하게 물렸던 100여 페이지의 서류가 마치 가을바람에 낙엽 날리듯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섬주섬 서류를 줍는 나를 뒤로하고 과장은 옷걸이에 걸린 점퍼를 걸치곤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사무실을 돌아오니 직원들이 한 명도 없다. 아, 12시가 넘었구나. 아마 모두 식사를 하러 간 모양이다. 멍하니 한쪽 귀퉁이에 놓여진 복사기 옆에서 창밖을 내다봤다. 희희낙락 웃으며 걸어가는 사람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 나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이유도 없는 눈물이 났다.

'내 능력의 한계를 느껴 사직코자 합니다.'

복사기를 열고 눈이 부실 만큼 하얀 종이를 한 장을 꺼냈다. 형식적으로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코자 합니다'라는 문구보다 내가 왜 사직서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을 하고 싶었다.

주변엔 산소는커녕 '개 무덤' 조차 없었다

내가 공무원을 처음 시작한 곳은 강원도 A군(郡)이다. 1989년 초, 타 시군에 비해 인원을 많이 뽑는다는 이유로 선택한 지역이었다. 2년쯤 지나자 타 시군에서 공무원을 시작한 동기들은 8급으로 진급했다는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왜 이 동네는 인사에 대한 이야기가 없나'라는 생각이 들 즈음 진급 인사가 났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동기 40명 중에 36명만 진급하고 4명은 탈락한 거다. 자세히 보니 진급자 명단에 내 이름이 없다. 정확히 말해 탈락자 4명 중에 내가 끼어 있었던 거다. 징계를 받았다거나 이렇다 할 잘못도 없는데 왜 미끄러졌을까. 그 4명의 면면을 보니 공통점이 눈에 띄인다. 외지에서 왔다는 것. 아마 인사 담당자는 '언젠가 이 사람들은 연고지로 갈 거다'라는 생각을 했었던 듯싶다.

이후 내 생각은 온통 일보다 고향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결국 만 4년 만에 고향인 화천으로 발령을 받았다. '만일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았었다면 그곳을 떠났을까' 지금도 가끔씩 생각을 하곤 한다.

"가자마자 어떻게 군청으로 발령을 받았냐?"

화천으로 와서 내가 발령을 받은 곳은 군청의 B부서였다. A군의 한 동기는 전화를  통해 의아하다는 말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A군은 '면(面)씨'와 '군(郡)씨'가 따로 있었다. 학연이나 연줄이 없는 사람이 처음 읍면으로 발령을 받으면 평생 군청으로 들어가는 일은 드물었다.

그에 반해 그곳 고등학교 출신이거나 연줄이 있으면 군청으로 발령이 났다. 이후 군청직원과 읍면 직원들의 진급은 확연히 큰 차이를 보였다. 읍면에서 공직을 시작한 사람이 사무관까지 진급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니 그 동기는 부러움 섞인 그런 말을 했을 게다.

그러나 우쭐하는 기분은 1개월을 넘지 못했다. 직원들로부터 설명을 듣는데 인색했던 B부서 과장은 일단 큰소리부터 치는 스타일이었다. 정확히 뭐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당시 직원들은 나를 '과장 스트레스 해소용 타깃'이라 불렀다. 조용하던 사무실에서 나만 과장실에 들어가면 큰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오죽했으면 '너 사무실 분위기 엉망으로 만들지 말고, 결재 받을 게 있으면 오후 늦게 받아라'는 말도 했다. 과장 앞에 불려가면 큰 소리가 났고, 그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나에 대해 직원들은 '참 괴상한 놈이 와서 분위기 망친다'라는 생각을 하는 듯했다.

상급기관인 도청에 긴급하게 보고해야 할 기안을 만들어 가면 과장은 일단 결재를 하지 않았다.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라는 고민을 한동안 하다 문구를 몇 개 고쳐서 다시 들어갔다. 과장은 아무 말도 없이 서류에 커다랗게 X표시를 했다. 또 이어지는 고민.

이렇게 고치고 저렇게 고치다 보면 서너댓 줄 밖에 되지 않는 문서 내용이 해괴해졌다. 결국 '문장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놈이 어떻게 공무원이 되었냐'는 핀잔으로 이어졌다. 문서 하나 때문에 하루가 다 갔다. 도청 담당자는 보고가 늦다고 난리다. 결국 일 못하는 놈으로 낙인이 찍혔다.

밤늦은 시간에 퇴근을 했지만 잠이 올 리 없다. 다음날 일찍 출근해 문서를 또 고쳤다.

'좀 있으면 도청에서 전화가 오겠지. 그러곤 욕설부터 하겠지'.

이쯤 되면 직원들 눈치 볼 상황이 아니다. 과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과장은 서류를 대충 훑어보더니 문서에 결재를 했다. 과장 사인 하나가 세상 그 무엇보다 가치 있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과장이 결재한 문서는 내가 전날 최초로 기안을 했던 문구다. 그런 일이 반복되다보니 한숨이 잦아졌다. 아내 앞에서 혼잣말로 '때려쳐야 할 것 같다'라는 말도 수차례 했다.

결국 일이 터진 건 공장 설립 민원서류 때문이었다. 그 부지에 법적으로 공장이 들어서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서류검토를 마치고 결재를 들어가자 과장은 '거기가 공장이 들어설 자리냐'며 결재를 하지 않았다. '관련법을 검토했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하면 또 큰소리가 날 게 뻔했다.

'그 민원인은 대체 왜 그곳에 공장을 지으려고 할까' 생각하며 아무 죄도 없는 민원인을 수도 없이 원망했다. 그쯤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다. 공장민원을 신청한 인근 부지에 혹시 모를 묘지를 찾는 일이다. 행여 묘지라도 발견되면 (묘지 주인을) 설득해 공장설립을 막아 보자는 의도였다. 그러나 하늘도 내 편이 아니었다. 주변엔 산소는커녕 '개 무덤'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민원서류 처리기한이 다가왔다. 결국 과장에게 '법적으로 하자가 없기 때문에 승인해 줘야 할 것 같습니다'라는 말을 해야 했다. 

혹시 나 때문에 '출근하기 싫다'는 직원 있을까

"그런 일도 견디지 못하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하냐."

사표를 제출한 날 저녁, 직원들이 소주를 사 들고는 우르르 집으로 몰려왔다. 고참 직원들이 '그 나이에 나가서 뭐하려고 그러냐. 내일 당장 사무실로 나와라'라고 말을 할 때면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가상하다. 나야 그럴 용기가 없어서 이 모양이지만 사람이 굶어 죽으란 법은 없다. 힘내라'는 또 다른 직원의 말에 아내는 눈치를 살폈다. '가족을 위해 한 번만 생각을 바꿔 달라'는 눈빛이다.

사직서를 낸 지 5일이 지났다. 삼일째 되던 날까지 우리 집을 방문했던 직원들도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았다. 아내와 대화가 끊긴 지도 이미 오래다. "까까"라는 말을 되풀이하며 칭얼대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난 아이에게 몇 백 원짜리 과자도 사 줄 수 없는 무능한 인간이 되어 버린 거다.

평생 못난 남편 위로해 주고 챙겨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평생 못난 남편 위로해 주고 챙겨 준 아내에게 감사한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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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왔다. 휴가 다녀왔다고 생각하고 맘 잡고 열심히 일해!"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아침 일찍 사무실로 나간 내게 한 동료직원이 건넨 말이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아직 사표수리가 안 됐구나...'

자리가 가시방석이다. 과장은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차라리 평소처럼 "그만둔 놈이 뭣 하러 나왔어 인마, 당장 나가!"라는 말이라도 했다면 속이라도 후련하겠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이, 등산 왜 안 갔어? 여럿이 갈 땐 같이 갔어야지."

5일 만에 과장이 내게 건넨 말이다. 직원 단합대회가 있던 날. 난 갈 형편이 되지 못했다. 사표를 내고 출근을 하지 않은 기간 동안 밀린 일이 있어서라고 스스로에게 말했지만 사실 아니다. 타부서 직원들이 '저 놈 사표 썼던 놈 아냐'라는 수군거림이 부담스러워서였다.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 과장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 '이 시키 건들면 일내는 놈이다'라는 생각했는지 내겐 별 잔소리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보니 내게만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었다. 가끔 짜증 섞인 과장의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확실히 그 강도는 약해 보였다. 계획서에 문제가 있을 땐 가끔 잘못된 부분에 대한 지적도 해 줬다. '더 이상 찍혀서는 안 된다' 라는 생존본능 때문이었을까. 밤을 꼬박 새워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다음날 '고생했다'는 짧은 한 마디에 피로는 씻은 듯이 날아갔다. 그렇게 과장이 타부서로 가기까지 2년여 기간 참 많은 것을 배웠던 시기였던 듯하다.

공무원 시작하기 2년 전, 만두가게를 열었다가 6개월 만에 망했다. 난 장사 체질이 아니란 생각에 급선회 했었다.
 공무원 시작하기 2년 전, 만두가게를 열었다가 6개월 만에 망했다. 난 장사 체질이 아니란 생각에 급선회 했었다.
ⓒ 신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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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음 내가 계장이나 과장이 된다면 절대로 직원들에게 잔소리 안 할 거다."

말단 시절, 수십 번 다짐했던 말이다. 돌이켜보면 20년 전의 일이다. 나는 지금 기획담당(계장)이다. 문득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혹시 저 녀석들 나 때문에 출근하기 싫다는 생각을 하진 않겠지!'


태그:#미생, #장그래, #공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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