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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주세요."

과학계에 큰 뉴스가 터지면 언론사들로부터 이런 요구를 자주 듣는다. 지난해 노벨 물리학상이 발표되던 날에는 그 수상 내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해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급기야 지난 3월 태초의 중력파를 검출했다는 뉴스가 나왔을 때는 내가 이해시켜야 할 대상이 유치원생까지 내려갔다.

나는 나름 최선을 다해서 설명을 하지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현대물리학은 거의 없다는 말을 꼭 덧붙인다. 20세기 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 현대물리학의 신호탄을 쏘았을 때,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당대 최고의 과학자들조차 새로운 자연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생각의 회로를 바꿔야만 했다. 지금은 그로부터 100년도 더 지났다.

현대물리학을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는 별개로,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왜 유독 기초과학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게 설명을 해야만 하는지 그 공평하지 못한 처사에 불만을 드러내기도 한다. 사도세자가 왜 뒤주에 갇혀 죽었는지를 이해하는 초등학생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초등학생이 이해할 수는 없지만 가치 있는 것들이 아주 많다.

그렇긴 해도 나는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을 요구하는 기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볼 수는 있었다. 언젠가 나는 기자들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기사를 쓰도록 훈련받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공교육을 정상적으로 받은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세상은 분명 정상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기 위해 양자역학 수준의 복잡신묘한 원리까지 알 필요는 없다.

수사권과 구성요건이 왜 양자택일의 문제인가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지난 10일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국민공감혁신위원장이 지난 10일 국회에서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기자간담회를 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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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도 이와 비슷하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닌 한, 일정한 나이에 이른 평범한 성인은 누구나 공평하게 한 표를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 부자든 빈자든, 똑똑하든 멍청하든, 배움이 많든 적든 아무 상관이 없다. 가장 못난 사람이라도 주권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하는 데에 큰 어려움이 없어야 민주주의가 작동한다.

민주주의가 왕정이나 귀족정체제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이 때문이다. 동료 과학자 중 한 명은 이런 이유로, 복잡한 칩이나 전자회로를 거치게 되는 전자개표기 사용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첨단기기와는 거리가 먼 시골의 촌부까지도 한 눈에 알 수 있는 방식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다. 민주주의도 기술의 발전과 함께 발을 맞춰 나가야겠지만,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가장 필요한 곳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데에는 나도 크게 동감한다.

새정치민주연합(아래 새정치)의 박영선 원내대표가 새누리당과 합의한 세월호 특별법안 내용을 보면서 나는 이 상황을 과연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까, 정상적인 교육을 받은 평범한 상식의 시민들이 납득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박영선 원내대표는 <오마이뉴스>와 한 인터뷰에서("수사권보다 진상조사위 더 중요 유가족에 설명하지 않은 건 전략")에서 진상조사위가 수사권을 확보하는 것보다 진상조사위원회에 유가족 추천위원수를 한 명 더 늘리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고 밝혔다. 박 대표는 7·30 재보선 이후 수사권과 위원회 구성요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후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항변했다.

무엇보다 나는 수사권과 구성요건이 왜 양자택일의 문제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재보선 이후 정치지형이 변한 탓이라면, 그 전에 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을까? 전후반 무승부 뒤 야권이 연장전 페널티킥을 얻은 것과도 같다던 7·30 재보선에서는 어쩌다 '브라질 스코어'보다 더 참혹한 결과를 얻은 것일까? 왜 그 책임을 세월호 가족들이 져야 하는 것일까?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물론 전문가 여론조차 수사권 및 기소권 확보를 선호하는데 왜 박 대표에게는 이것이 선택의 문제였을까? 얼마나 더 우호적인 여론과 조건이 만들어졌어야 했을까?

박 대표의 비밀협상은 그 자체가 심각한 문제

박 대표는 수사권을 얻어 봐야 위원회에서 수적으로 밀리면 수사권을 발동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조사위가 관련 자료를 100% 확보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했다. 과연 수사권 없이도 세월호 관련 자료를 100% 확보할 수 있을까? 박 대표는 수사권 확보야말로 명백한 진상규명의 가장 유력한 수단임을 잊은 듯하다.

박 대표의 논리는 비유적으로 말해, 운전면허를 따 봐야 돈이 없어 차를 못 사면 어차피 운전을 할 수가 없으니 면허를 따는 대신 일단 차를 살 돈부터 모으자는 얘기와 다르지 않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면허가 없으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갈 수가 없다. 물론 돈도 넉넉해야 원하는 차를 살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둘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고 모두가 충족되어야 하는 필요조건이다.

박 대표는 특검추천권을 포기하더라도 상설특검법 안에서 중립적인 특검을 충분히 내세울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박 대표의 바람일 뿐이다. 박 대표는 특검후보추천위원회에서 여야 4인이 합의를 하면 나머지 3인(법무차관, 법원행정차장, 대한변협 추천 몫)도 따라올 수밖에 없을 걸로 기대하겠지만, 애초에 여야합의가 되지 않는다면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은 수사 및 기소권이 대통령이 임명하는 특별검사에게만 주어지는 셈이다. 세월호 특검이 꼭 밝혀야 할 내용 중에는 국정원과 세월호의 관계, 세월호의 정확한 항적과 해경 교신내용, 해경이나 해군 등의 인명구조가 늦어진 지휘체계상의 원인 등 박근혜 정권의 권력핵심을 수사하지 않고서는 밝힐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과연 대통령이 임명한 특검이 국정원과 청와대 등 세월호 관련 권력 핵심부의 문제점을 제대로 수사하고 기소할 수 있을지 근본적인 의문이 남는다.

박 대표는 특별법 협상에 나서면서 처음부터 수사권보다는 위원회 구성요건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그 내용을 유족들과 사전에 충분히 협의하지 않은 것은 협상내용이 미리 공개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라고 해명했다.

박 대표의 비밀협상은 그 자체로 대단히 심각한 문제가 있다. 설령 박 대표의 협상내용이 옳다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사건의 일차적 당사자인 세월호 가족들이 배제된 협상안은 가족들의 협상안이 아니라 박 대표 개인의 협상안일 수밖에 없다. 이는 마치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가 의뢰인과 상의도 없이 검사와 합의해 놓고 어쩔 수 없었다며 의뢰인에게 도장을 찍으라고 강요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박 대표의 협상전략이 얼마나 절묘하고 기발한 것인지 알 재간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유족과의 사전협의도 하지 못할 만큼 복잡하고 까다로운 정치역관계가 작용되는 협상전략이라면 처음부터 잘못된 전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박 대표는 세월호 특별법을 통상적인 국회에서의 여야협의로 인식한 듯하다. 하나를 내 주고 다른 하나를 얻는 그런 방식 말이다. 그러나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한, 뭔가를 내주고 뭔가를 얻겠다는 애초의 발상 자체가 잘못된 것이었다.

초등생 이해 못하는 협상전략, 그것은 '당리당략'일 뿐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27일째를 맞은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지난 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고 있다.
▲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27일째를 맞은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지난 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하고 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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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누리당은 정권을 잡고 있는 집권당으로서 300명이 넘는 승객을 수장시킨 책임을 져야 하는 당사자다. "바람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하는 것이다"는 유명한 영화대사도 있듯이, 세월호 사고에서 새누리당의 몽니는 계산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과 응징의 대상이다. 130명이나 되는 금배지로 그 정도의 바람도 극복하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야당인가.

세월호 가족들이나 일반 국민들이 원하는 특별법은 그렇게 고도로 복잡한 정치 엔지니어링이 필요한 사안이 아니었다. 단지 "내 새끼가 왜 죽었는지 알고 싶을 뿐이다." 사람 목숨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초등학생도 이해하지 못하는 협상전략이라면, 그것은 그야말로 당리당략일 뿐이다.

상식을 가진 보통의 시민이 이해할 수 없는 논리와 전략이라면 그 논리와 전략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된다. 지난 재보궐 선거에서 새정치가 참패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정치인들에게는 전략공천이니 후보단일화니 하는 말들이 사활적이었을지 몰라도 일반 유권자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자기들만 아는 언어와 논리를 들고 나와 유권자들에게 이해를 강요하는 정치세력에게 누가 표를 주고 싶은 마음이 들까. 진보정당이 존재감 없이 사라져 가는 이유도 똑같다.

세상 돌아가는 물정은 초등학생 정도로만 아는 나 같은 사람은 이번 세월호 특별법 협상 과정과 결과를 도저히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 새끼와 내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진상을 밝혀 달라는 것이 힉스 입자나 중력파 검출만큼 알아듣기 힘든 말도 아닌데 무슨 조건과 토씨가 그렇게 많이 필요하단 말인가.

새정치는 즉시 협상안을 파기하고 새로운 특별법 제정에 나서라. 사랑하는 이들을 바다에 묻은 세월호 가족들은 이미 자신의 목숨까지 내걸었다. 하루하루 자신의 관을 이고 곡기를 끊은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린다면, 협상이나 타협을 말하기 전에 원칙과 상식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부터 돌아보기 바란다. 그 결과를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을지, 상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이 과연 수긍할 수 있을지부터 살펴보기 바란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태그:#세월호 특별법, #박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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