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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장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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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숭산(崇山)에 가 있도록 하거라. 뒷일은 내가 책임지마."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왠지 모르게 평소의 친정아버지답지 않은 어조이다. 잔잔한 말투 속에 아슴하게 떨림이 배어 있다. 차오르는 걱정이 자신도 모르게 어조에 스며든 모양이다. 필진진은 이런 아버지의 모습을 바라보니 새삼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친정아버지께 심려를 끼쳐드리는 것만 해도 죄송한데 안전한 피신처까지 부담을 지우려하니 마음이 돌덩이에 눌린 듯 무겁다.

"숭산이라면 소림사(小林寺)를 말씀하시는지요?"
"음, 그렇다."
"소림사엔 무슨 인연이 있으신지요 아버님."

예로부터 불교에 신심이 깊은 집안인지라 금릉 최대 사찰 안흥사(安興寺)를 비롯하여 그밖에 여러 중소 사찰에도 시주를 많이 베푼 건 진진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멀리 소림사까지도 시주의 손길이 미쳤다는 건 금시초문이다. 소림 같이 큰 절에선 큰 시주의 베풂이나 불사(佛事)의 공덕(功德)이 있지 않고서는 아무나 머물 수 없다. 게다가 관부, 그것도 감찰기관의 주목을 받고 있는 입장에선 특히 그렇다.

소림은 무승(武僧)의 집결지이자 무예의 본산이라서 관(官)에서 함부로 대하지도 않지만 한편으론 은근히 주시의 대상이기도 하다. 간섭은 자제하되 견제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 소림을 대하는 관의 입장이라면, 어느 정도의 자율을 누리되 관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 소림의 행보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선에서 서로를 인정하는 관과 소림 사이에 끼어들 틈이 있을까. 금의위의 요주의 대상인 자신과 어린 아들을 소림이 과연 받아줄 것인가. 보통 인연이 아니고는 쉽지 않으리라는 게 진진의 생각이다.

한편으론 아무런 가능성이 없거나 별다른 대책도 없이 불쑥 말부터 꺼낼 친정아버님도 아니다. 분명 어떤 방책이 있을 것이다. 이분이 어떤 분이신가. 일찍이 진사에 급제하셨으나 무골충이 되기 싫다며 벼슬길로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꼿꼿하게 허리를 피고 지내시는 분이다. 이상하게도 필씨 집안은 과거에 응시는 하되 벼슬길을 마다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학식은 인정받되 명리를 탐하지 않는다는 탈속의 가풍인가. 진진은 예전부터 이러한 가풍이 궁금했지만 알려주지 않아 묻지 않았다.

"너는 우리 집안이 왜 벼슬을 멀리하는지 아느냐?"

진사 필원의 긴 수염이 대청마루를 스치는 바람에 살짝 몸을 뒤챘다. 주름은 깊어졌으나 형형한 눈길은 여전하고 도톰한 입술의 붉은빛은 젊은이 못지않은 혈색을 보여준다.

"소녀 어릴 적부터 이 점이 궁금했사오나 어른들께서 딱히 알려주시지 않아 그저 궁금증을 가슴에 묻어둔 채 여태 지내고 있었습니다."

"남송 시절 우리 선조께서 대리포정사의 공경(公卿)에 오르신 후 가문의 유구한 전통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다. 오랑캐 나라 원(元)이 송을 멸하고 그들의 세상이 되자 오대 선조께서는 임안(현 항주)에서 금릉으로 이주하였다. 그후 금릉에서 향리의 명문가로 자리 잡은 바 명(明)이 건국되고 원을 치고 일어설 때 우리 필가 역시 혼신을 다해 명을 지원했다. 그러나 명 태조 주원장은 금릉 명문가의 재력과 영향력이 두려워 향신의 세력가들을 모두 외지로 이주시켰다. 그때 삼대조께서도 못내 눈물을 삼키며 섬서로 떠났으나 도중에 소림의 도움을 받아 숭산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단다.

태조가 붕어한 후 정난의 역이 일어나 영락제가 즉위하자, 그는 그때까지도 골칫거리인 달단 (몽골) 오랑캐 세력을 무마하기 위해 도읍을 북평으로 옮겼단다. 덕분에 금릉에 대한 견제도 완화되었지. 영락제 태종은 적극적으로 북정(北征)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강남 세력가들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걸 느끼고 강남지방의 향리세력들을 포섭하기 시작했단다. 덕분에 우리 필가도 옛 기반을 되찾을 수 있었느니라. 이런 사연으로 소림사와 우리 집안 사이에 백년에 걸친 인연이 맺어지게 되었고, 항차 가문의 위기가 다시 발생할 경우 소림의 도움을 받기로 약조가 있었느니라. 물론 우리 쪽에서도 드러나지 않게 적지 않은 시주를 해왔단다. 이후 우리 가문은 명의 관직에 나가지 않고 권력의 부침에서 벗어나 가문의 안녕을 최우선하는 것을 가풍으로 삼게 되었느니라."

"그런데 왜 세간에서는 우리 집안을 필 대감댁이라고 하는지요?"

"사실 너의 조부께서 관직에 응하신 적이 있단다. 내가 어렸을 때이지 아버님께서는 북경에 가신지 채 칠년이 안 되어 고향으로 돌아오셨단다. 그 이후 관직에 대해선 입도 벙긋 안 하셨다만 주위에서는 아버님께서 제수하셨던 관작을 두고 대감이라 칭하곤 했느니라."

진진은 조부께서 어떠한 관직에 계셨느냐고 묻고 싶었으나 아버님이 직접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무슨 사연이 있는가 싶어 속으로 삼켰다.

"그러니 너는 부담을 갖지 말고 소림사에서 평안하게 지내기 바란다. 모든 바람은 잦아지기 마련이고 제 아무리 큰비라도 종내에는 그칠 것이니, 너는 관씨 가문의 적통을 잇는 것을 사명으로 알고 조용한 곳에서 근신하기 바란다."

필원의 입술이 멎었을 때 그의 눈빛은 좀전의 수심(愁心)을 벗어던진 듯 다시 여유를 되찾았다.

"아버님께서 이렇게까지 배려를 해주시니 저희 모자(母子) 안심이 되옵니다. 관에서 저희 모자를 주시하는 이유가 제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아이의 삼촌 되는 조운이 얽혀 있은즉 저희로 인해 그가 곤경에 처하게 될까봐 피해 있겠다는 것일 뿐입니다, 그 또한 죄를 지은 게 아니라 관에서 찾고자 하는 비급과 연관이 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너무 큰 심려는 하시지 마옵소서. 아버님."

진진은 말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다.

"내 소림의 원명 대사께 편지를 적을 테니 너는 행장을 준비하거라."
"네. 아버님."

진진은 친정아버지께 절을 올리고 본당을 나왔다.

금의위 영반 조복에게 수모를 당한 후 필진진은 관가장에서 하룻밤을 지내고는 아들 섭월을 데리고 친정으로 왔다. 금의위가 언제 또 그들 모자를 연행할지 모르거니와 관가장이 그들의 감시 속에 놓여 있다 생각하니 도저히 머물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 것이다.

한편으론 이런 일에 말려든 시동생 관조운이 야속하기도 했다. 관가 집안의 가풍을 따라 학문에 매진하고 유가의 전통을 따르면 만사가 궁할 리 없건만, 유협의 세계에 빠져 스스로 어려운 길을 택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함이 천정을 뚫게 했다. 유협 세계에서 제 아무리 의리가 천금의 무게를 가진다한들 어찌 가문의 안녕보다 중하단 말인가. 더구나 홀로된 계수와 어린 조카가 있는데 행동이 조신하고 언행에 좌우를 살피어야 하거늘, 듣자하니 소주에서 염업을 하는 처자와 눈이 맞아 왕년의 인연을 좇아 어디론가 사라졌다니, 그를 생각하면 명치끝이 아려왔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안채의 별당에 들어가니 아들 섭월이 뛰쳐나온다.

"어머니, 우리 이제 이곳 외가에서 생활하는 거예요?"
"아니다. 월아, 곧 먼 길을 떠나야 하니 너도 준비를 하거라."

"어머니, 우린 어디를 가는 거예요? 얼마 동안 가죠?"

아이는 원행이 곧 소풍이라도 되는 양 들뜬 기색이다.

"여기서 마차로 사흘 거리인 소림사에 갈 것이다."

"와, 소림사라면 무예로 유명한 곳이잖아요. 저도 소림사에서 무예를 수련하면 안 될까요?"
"안 돼!"

진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날카로운 고성이 튀어나왔다.
섭월은 엄마의 갑작스런 돌변에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월아, 우리가 소림에 가는 것은 무예를 연마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 사정이 있어서 조용히 지내려고 가는 것이란다. 너는 그동안 유학(儒學)을 열심히 공부하려무나. 무예는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을 어기는 것이 되니 다시는 입에 올리지 말거라"

진진이 냉정을 되찾고 섭월과 눈을 맞추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 어머님. 소자 아버님의 유지를 따르고 다시는 어머님의 바람을 거스르지 않겠습니다."

섭월이 머리를 조아리며 야무지게 답한다.

진진은 섭월을 와락 껴안았다. 그녀의 눈에선 다시 물기가 어리더니 어느새 방울져 볼을 타고 쪼르르 흘러내렸다. 엄마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섭월은 입술을 꼭 깨물며 허공을 응시했다. 마치 각오를 다지는 듯한 눈길이다.

별당 처마 밑을 제비 한 마리가 새액 하고 날아들더니 어느새 새액 하고 도로 나갔다. 처마 안 서까래에 둥지를 튼 제비집에는 새끼 제비 여러 마리가 어미를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어미 제비가 먹이를 물고 나타나자 새끼들이 서로 달라고 짹짹거리고 있다. 필진진은 제비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덧붙이는 글 | 월, 목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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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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