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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4월 25일 오전 9시 18분경 일본의 서일본 여객철도는 후쿠치야마 선의 쓰카구치역에서 아마가사키역 사이를 운행 중이었다. 역을 출발한 쾌속열차는 구간 내 반경 300m 커브구간에서 총 7량 중 선두 5량이 탈선을 하고 말았다.

선두 2량은 인근 9층 아파트에 충돌하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파됐는데,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매 분 간격으로 오가는 다른 열차에게 이 사고를 알리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렇지 않으면 제2, 제3의 사고가 불가피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고로 열차 안에 탑재돼 있던 '열차방호무선장치'는 전력이 끊겨 작동 불능 상태였다. '예비전원 변환 수동장치'가 남은 한 가지 희망이었으나 승무원의 미숙함으로 사용할 수 없었다. 일분 일초가 급한 상황이었다. 아무런 조치가 없으면 마주오는 열차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돼 버렸다.

마침 그때 사고를 목격한 인근 주민이 옆에 있던 건널목의 비상버튼을 눌러 특수발광신호기가 점등됐다. 이를 본 하행선 열차의 기관사는 약 100m 전에서 멈춰 설 수 있었다. 그렇게 최악의 상황은 피했지만 선두 2량에 타고 있던 승객 106명과 기관사 1명을 포함해 총 107명이 사망했다. 소위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다.

일본은 왜 민간인들을 구조작업에 받아들였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일본은 섬 국가다. 그로 인해 기후에 영향을 특히 많이 받으며 지진과 갑자기 해안을 덮치는 큰 파도를 의미하는 '쓰나미'가 많았고 지금도 진행형인 국가다. 이런 이유로 사고에 대한 재난구조나 국가의 대처능력은 타 국가에 비해 더 신속하고 빠르다. 비단 국가의 재난시 위기대응 체계만 그런 것이 아니라 국민 한 명 한 명도 안전사고에 각별히 주의하며 몸에 배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오래된 국가의 재난 상황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2005년에 있었던 열차탈선사고에서 보여준 모습은 우리와 사뭇 달랐다. 민간인들이 사고 초기에 적극 참여하고 국가가 독려했다. 당시 사고 후 최초로 응급상황을 감지하고 건널목의 신호를 누른 사람도 민간인이며, 구조 활동에 참여한 이들도 인근 주민이나 민간 기업이었다. 기업 중에는 공장을 일시 정지하고 참가하기도 했다. 부상자의 반수 가까이를 주민이나 기업 직원들이 의료기관으로 이송했다.

일본 정부는 사고 후 이를 기리기 위해 76개 기업 및 단체와 개인 1명에게 정부로부터 감사장, 48개의 기업 및 단체 개인 34명에게 효고현경에서 감사장, 32개 기업 및 단체 개인 30명에 대해 아마가사키 시의 감사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선로 내에 들어가 반대 방향 열차에 비상상황을 알린 개인에게는 훈장을 수여했다.

민간 잠수사들과 불화하는 정부, 아쉽다

지난 25일 오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철수한 민간잠수사들의 천막이 비어 있다.
▲ 민간잠수사 철수... 텅빈 천막 지난 25일 오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철수한 민간잠수사들의 천막이 비어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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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나라는 세월호 사건으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고 더 나아가 분노를 느끼고 있다. 우리는 사고 첫 날 세월호가 침몰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배에서 뛰어내린 사람들만 구해서 돌아오는 구조 현장도 보았다. 그 시각 배 안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게 배는 가라앉고 있었다. 첫날 구조를 하지 못한 점은 모든 국민이 안타까워하고 분노를 더욱 커지게 만들었다.

사고 10여 일이 지나고 있지만 첫 날부터 이 시점까지도 정부당국과 민간 구조대들과의 마찰은 끊이지 않고 있다. 수백 명의 민간 잠수부와 그들의 장비를 가지고 갔지만 허탈하게 돌아오기도 했단다. 그들은 생업을 중단하고 내 자식, 내 형제가 물속에 있다는 심정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국가는 왜 외면하는지 안타깝다.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의 경우, 민간 구조의 빠른 투입과 정부의 신속한 대응으로 사고 다음 달 5월 31일부터 복구공사를 시작해 6월 7일 시운전을 개시했다. 이는 자연재해가 잦았던 일본에서 위기대응 매뉴얼이 잘 수립돼 있었고 정부 주도 하에 일사불란한 구조작업을 벌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또 열차가 충돌한 아파트가 붕괴될 위험에 처하자 철저한 안전진단 후 거주자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 시켰다. 혹시 있을 수 있는 2차 사고 예방에도 만전을 기한 것이다. 무엇보다 민간인의 헌신적인 구조작업과 복구노력이 있었기에 사고로부터 빨리 회복될 수 있었다고 한다.

안전불감증이 만연한 우리나라 역시 많은 사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월호 사고에서 보여준 정부의 대응은 국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초기부터 정부는 민·군·경과 인력 및 장비에 있어서 많은 혼란을 빚었다. 결과적으로 결정적인 구조 시기를 놓쳤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국민의 애국심과 애민심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일본의 열차 탈선사고에서는 부상자의 절반 이상을 일반 국민이 이송했다. 그것은 국가가 국민을 믿고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하나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희생자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가지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정부는 '너희는 지켜 봐라, 이것은 너희가 할 일이 아니다'라는 모습인 듯하다. 왜 국가가 국민을 믿지 못하는 걸까.

덧붙이는 글 | JR 후쿠치야마 선 탈선 사고에 대한 설명은 위키피디아를 참고했습니다.



태그:#민간구조작업, #일본열차탈선사고, #쓰나미, #세월호 침몰, #구조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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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평범한 한 아이의 아빠이자 시민입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 우리 아이들은 조금 더 밝고 투명한 사회에서 살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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